국가가 나서 외화 벌어오는 ‘애국자’라며 격려
강제 성병검진·격리수용·폭행 등 인권침해 당해
피해자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진행 중

지난 2015년 1월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2차 변론기일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5년 1월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2차 변론기일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우리는 국가가 기지촌을 형성하고 내버려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국가가 형성했으면 그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봐야 하고 관여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애국자라 칭송한 국가는 기지촌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미군폭력과 악랄한 포주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의 창구가 되는 직업소개소를 단속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팔려왔습니다.

왜 국가가 나서서 기지촌을 더 활발하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우리가 잘못한 게 무엇이기에 내 나라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나요? 안에서는 달러벌이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살아 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2017년 12월 21일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원고 박영자의 최종변론 중

‘위안부’ 하면 우리는 대부분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리게 된다. ‘위안부’ 문제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한국의 아픈 역사이며 그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에서도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은 연세가 많아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이제 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0명이다. 일제의 침략 하에 이뤄진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고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시민사회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됐다. 그러나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를 관리하고 피해를 방치했다. 바로 미군 ‘위안부’다. 이들은 현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캠프 스탠리’는 현재 평택으로 이전했다. ⓒ투데이신문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캠프 스탠리’는 현재 평택으로 이전했다. ⓒ투데이신문

직업소개소 통해 찾아간 기지촌서 포주에게 팔려가

1950~1980년대 당시 미군 장병들의 경제력은 한국 국민의 경제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았다. 때문에 미군부대 인근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이 발달했다. 이렇게 발달된 마을은 ‘기지촌’이라고 불렸다. 기지촌에서는 미군들이 원화가 아닌 달러화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지촌의 경제규모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등으로 불린 미군 ‘위안부’는 서울 용산, 경기 평택·동두천·파주·의정부, 전북 군산 등 주한미군부대 인근에서 미군을 상대로 일했다. 국가는 미군 ‘위안부’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달러를 벌어다 주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며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독려했다.

미군 ‘위안부’들은 과연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하는 애국의 마음으로 기지촌을 찾았을까.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기지촌으로 들어가게 됐다. 성매매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소개를 받아서 찾아갔다가 포주에게 끌려가게 됐다는 것이다.

의정부·동두천 지역에서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단체 ‘두레방’의 김은진 원장은 “직업소개소에서는 포주에게 돈을 받고 여성들을 팔아넘긴다. 피해자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기지촌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스스로 기지촌을 찾아온 분들도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는데 갈 곳이 없어 기지촌까지 흘러흘러 오게 된 것이다”라며 “스스로 오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미군 ‘위안부’가 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경기도 기지촌 외국인여성 성매매 피해실태분석’(안태윤 (재)경기도 가족여성 연구원 2012.4)에 따르면 1964년 미군 ‘위안부’로 등록된 여성은 1만9986명이다. 또 1962~1968년 동안 기지촌 보건소에 등록된 미군 ‘위안부’는 동두천 7000여명, 의정부 3200여명이다. 등록된 인원만 이 정도 규모이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피해자 대부분이 큰돈을 벌 수 있다거나 숙식을 제공한다는 광고를 보고 기지촌으로 왔다. 어린 나이에 집에서 쫓겨나 홀로 상경해서 가정부, 식모살이를 하다가 폭력, 성폭행 등 피해를 당한 뒤 도망쳐 나와서 기지촌에 정착하게 된 경우도 있다. 다른 곳에서 피해를 당하고 아무것도 없이 쫓겨나 돈을 벌기 위해 지인 혹은 직업소개소 등을 통해 기지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인근에 위치한 미군전용 클럽. ‘캠프 스탠리’의 이전으로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인근에 위치한 미군전용 클럽. ‘캠프 스탠리’의 이전으로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돈 모을 수 없는 착취구조…남는 건 ‘빚더미’

(포주가) 니네들 밥 먹고, (나한테 빚진 거) 뭘로 (내가) 받을 거냐, 이거야. (우리들에게) 돈 10원 하나 없어야지…… 아가씨들 도망갈까 봐. 그러니까 싹 뺏는 거야, 돈을. 거 아가씨들 수중에 돈이 없어야지 도망을 못 가잖어. 아가씨들이 돈이 있으면 도망을 가잖아, 그 돈 갖고. 그 대신 스타킹 같은 거, 이런 거는 자기네들한테 이자로 빌리라는 거지. 막 1000원이면, 1000원에 이자가 100원이잖어?

방세, 밥값 합쳐갖고 60만원이야. 60만원에 거기 이자가 붙지. 그럼 다음 달에는 육십 몇만원인데 또 이자가 붙는 거지. 그럼 칠십 몇만원이 되는 거지.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p.240 (미군 ‘위안부’ 김정자의 증언. 한울엠플러스, 김정자 증언,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기지촌에서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달러가 많이 유통됐다. 그렇다면 미군 ‘위안부’들도 돈을 많이 벌었을까.

미군 ‘위안부’들은 대부분 기지촌의 클럽에서 일했다. 이 클럽들은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는 ‘특수유흥접객업소’다. 미군 전용 클럽인 것이다. 클럽들은 미군 ‘위안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일을 시켰다. 하지만 이 ‘숙식제공’은 미군 ‘위안부’들을 착취하기 위한 덫이었다.

김 원장은 “돈을 벌기 위해 기지촌에 들어오지만 돈을 모을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고 말했다. 포주들의 착취로 인해 미군 ‘위안부’들은 빚더미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기지촌에는 클럽 외에도 옷가게, 미용실, 목욕탕, 세탁소, 패스트푸드, 가발가게(미군 ‘위안부’들에게는 긴 머리가 요구됐다) 등 ‘스토어’가 있다. 미군부대가 들어서면 외지인 혹은 동네 주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김 원장이 전한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돈이 어느 정도 모일 때가 되면 포주가 “네 방 가구 바꿀 때가 됐네”하면서 마음대로 가구를 바꾸고는 이를 장부에 기록한다. 미용실비, 화장품, 옷값, 목욕 비용도 모두 장부에 올리고 하다못해 빨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밥해주고, 세탁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그 비용도 장부에 기록해 착취하는 것이다. 기지촌의 ‘스토어’들은 이렇게 기지촌 여성들의 소비로 돈을 벌게 된다.

심지어 포주들은 마약을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매일 하루 최소 5명 이상의 미군을 상대하면서 두려움, 불안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약을 권하고는 중독되면 약을 구해다 주며 빚을 물리는 것이다.

클럽에 댕겼을 때는 미군을 받아야 되는데, (어렸기 때문에) 술을 못 먹잖아. 그럼 맑은 정신으로는 챙피해서 못 끌어. 막 잡아 끌어서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리고 맑은 정신에…….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땅을 방으로 삼고서 못 한다구……. 그럼 이거 먹구서…… 약을 먹구서…… 그거 취한 김에 하는 거지. 손님을 끌고 들어오면 주인[기지촌여성들은 ‘포주’를 ‘주인’, ‘포주집’은 ‘집’이라고 표현한다]한테 안 맞잖아, 내가. 그러니까 먹었지. 그 약 바람에 헬렐레[마약성 약에 취한 모습]거려갖구서 돌아다니는 것도 무섭지 않았지, 겁나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놈들이 사다가 주는 거야, 아가씨들 약. 그러면 오래 있던 애는 오빠 나도 그거 줘, 줘, 그럼 돈 내놔 이년아! 그러면 만약에 지네들이 500원에 사갖고 오면 1000원에 파는 거지. 새로 온 애들은 주인이 줘, 돈. 사다가 나눠주지. 야, 하나 먹어! 하나 먹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응? 그럼 두 개 먹어! 자꾸만 높아지는 거지.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p.70~71 (미군 ‘위안부’ 김정자의 증언. 한울엠플러스, 김정자 증언,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인근에 위치한 미군전용 클럽 입구. ‘캠프 스탠리’의 이전으로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경기 의정부시의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후문 인근에 위치한 미군전용 클럽 입구. ‘캠프 스탠리’의 이전으로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국가의 관리·통제로 이뤄진 ‘강제 성병검진’

김 원장은 미군 ‘위안부’에게는 감금, 감시, 폭행, 성매매 강요 등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포주들은 이들에게 생리 중에도 손님을 받으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임신을 한 경우 일을 할 수 없으니 강제로 낙태를 시켰고 그 비용은 또 고스란히 빚으로 올라갔다.

강제 성병검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 ‘위안부’들은 보건소에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성병검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여기서 낙검(落檢)하게 되면 성병관리소(낙검자 수용소-일명 몽키하우스)로 끌려가 감금을 당한다. 강제입원인 것이다.

정기검진뿐 아니라 미군과 경찰, 보건소의 합동단속인 ‘토벌’을 통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김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공무원들은 불시에 단속을 나와 보건증(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보건증에 정기 성병검진을 받았다는 도장이 없는 미군 ‘위안부’를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 격리했다.

또 성병에 걸린 미군이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을 지목하는 ‘컨택’에 걸려도 역시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됐다. ‘컨택’에서 미군이 잘못 지목해 억울하게 격리수용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성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보건증이 없으면 토벌, 컨택으로 무차별하게 끌려갔다.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기지촌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서 경찰에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피해자들을 다시 포주에게 인계했다고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인계된 여성들은 포주에게 폭행당한 후 빚을 더 올려 다른 곳으로 팔아넘겨졌다. 정부는 이들의 피해를 방치했다.

정부는 기지촌 내 각종 불법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권유, 조장했고, 한편으로는 관리·통제했다. 1957년 미군 위안부를 의무적 건강검진 대상으로 하는 ‘전염병예방법’과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을 제정·시행했다.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미군 ‘위안부’의 성병검사는 이에 따라 관리됐다.

김 원장은 “정부에서 미군 ‘위안부’를 관리·통제했으니 경찰에 도움을 청해도 당연히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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