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가족을 향한 검찰 수사를 두고 몇 주째 옹호와 비난의 목소리가 사회를 가득 울리고 있다. 결국 조 전 장관은 가족의 곁에서 법정 다툼을 준비하기 위해 법무부를 사퇴했다.

그의 사퇴 후에도 여전히 광화문과 서초역에선 집회가 이어지는 중이다. 국회 앞으로도 번졌다. 물론 이런 상황을 혼란과 분열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서초역 집회든, 정부를 비판하는 광화문 집회든, 시민들이 모여서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하는 과정은 다음 세대 한국 정치의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제도는 오래전에 마련했지만 민주주의의 내적 역량이 그만큼에 이르지 못한 현대사를 갖고 있다. 시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 표현이 억제된 자리를 권력집단의 이익 추구 체계화가 대신했다. 때문에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정계에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단 시민사회가 가진 담론 문화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구조가 잘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 근본적인 한계를 낳는다고 본다. 

보통 사람들이 주변의 부조리함에 대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일상의 정치활동이다. 시민사회의 정치적 주장이 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자연스럽게 컨베이어 벨트를 잇게 되면 외진 곳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도 보호받을 수 있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에선 평범한 개인도 당연 보호 대상이 된다. 힘 없는 사람들도 힘 있는 사람들과 동등한 정치력을 가지려면, 결국 시민사회의 담론장이 의회정치와 연결되도록 보다 탄탄한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 구조가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다. 노동자가 옷을 벗어야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수개월을 외쳐야 하고, 사법기관의 부당함에 홀로 맞서야 했던 것은, 사회가 지금껏 이 구조적 미비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장의 구호는 의회정치가 실종되어서 등장한 게 아니라, 의회 정치에 이르기까지의 시민정치가 구조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탓이다. 

이를 개선하려면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리할 수 있는 정치인을 발굴하고 선별해서 의회에 진출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담론장에서 근거 없는 비난과 강요가 정론을 대신해 시민정치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작용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에 손을 놓으면 거기에 걸맞은 수준의 정치인들이 의회에 진출한다. 시민은 광장을 떠날 수 없게 되고 노동자들은 첨탑에서 내려올 수 없게 된다. 

나라 단위의 정치적 해결도 시민사회의 정치적 역량이 사회구조적 문제를 건강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이 역량의 성장에는 큰 비용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가 근래 맞이했던 충돌들은 우리가 반드시 치를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비용이다. 그것은 정부와 여당의 떨어진 지지율과 주말광장의 데시벨이 보여준 크기만큼 그렇게 컸다. 

그 비용 중 일부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비용을 치른다. 검찰과 사법부에 있는 법조 공무원들도 비용을 떠안아야 한다. 언론 종사자들도 비용을 치르고 있고 앞으로는 더 커질 예정이다. 시민들도 주말의 시간과 일상의 감정이라는 비용을 치른다. 직이 무엇이든 결국 비용을 치르는 건 사람이다. 그중에 누군가는 과도한 청구서를 떠맡기도 한다. 시민정치가 굳건하지 않으면 개인에게 많은 비용이 전가된다.

조국 전 장관이 사퇴하던 그날,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연예인 설리의 죽음을 접했다. 조 전 장관의 사퇴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갑자기’라는 느낌 정도였다. 하지만 본명이 최진리인 연예인 설리의 죽음은 오랫동안 뭐라고 할 말이 잘 안 떠오를 정도로 충격이 컸다. 왜냐하면 나는 그이에 관해 칼럼을 쓸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리는 노브라 상태의 착장을 자신의 SNS에 자주 올렸다.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것은 신체의 자유만큼이나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게다가 21세기를 사는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자유에 왈가왈부할 정도로 미성숙하지 않다. 그러나 설리의 옷차림에 관한 언론의 보도들은 촌스러움을 넘어 추악한 수준까지 갔다. 

논쟁을 일으켜 클릭 장사를 하려는 속셈이 너무나 뻔히 보이는 제목의 기사 아래에는 이들이 정말로 정상적인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의 무자비한 댓글들이 달렸다. 몇몇 기자들은 그의 속옷 착용을 반드시 논쟁적 사안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댓글을 다는 무도한 이들은 익명의 뒤에서 난도질 게임의 쾌감에 몰입했다. 

이 무참하기까지 한, 폭도들의 광기나 다름없는 모습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칼럼 지면이 비록 협소하지만 꼭 이 문제에 할애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 잘못 없는 앳된 청년 설리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료 시민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악의적 댓글들 앞에 홀로 서 있다 스러져가는 동안, 나는 일상에 치이고 사회정치적으로 큰 사안들에 눈길을 더 보내면서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내 개인 SNS 계정에서조차 지나가는 말로라도 안 썼다. 그의 SNS에 지지의 말을 적은 적도 없다. 아무것도 쓴 게 없었다. 

세상이 바뀌길 원했다면 그를 위해 글을 썼어야 했다. 무고한 그를 위해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그런 목소리들로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약자들을 향한 괴롭힘이 줄어들며, 그것이 사회의 규칙이 되어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안전해진다. 시민의 정치활동이란 게 별건가. 다 떠나서, 죄 없이 괴롭힘당하는 약자를 편들어줬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무심했고 게을렀다.

연예인 설리가 성적 대상으로 극심하게 소비되는 사이, 인간 최진리는 이 사회가 불의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가버린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전가시킨 빚이다.

지금의 마음을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이라고 말하기에는 염치도 면목도 없다. 그저 뭐가 더 중한 문제인지, 진짜 우리 곁의 정치라는 게 뭔지, 뭘 그리 대단하게 할 말이 많아서 주절주절 칼럼을 써왔던 건지, 개인적인 회한이 왔다. 나이로도 업으로도 직무유기 비슷한 짓을 한 거 같아서, 그래서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한동안 입 근처 표정이 감감해졌다. 너무 늦게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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