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 전태일 전후로 나뉘어
시대 따라 노동운동 분위기·방식 변화
노동자들의 투쟁 목적 달라지지 않아
노동자로서 가치 인정·권리 보장 절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1965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재단·봉제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생겼다는 설렘도 잠시, 그는 평화시장에서 참혹하고 끔찍한 노동현실의 참상에 눈을 떴다. 그는 노동환경 개선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다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 나이에 분신 항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5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은 전태일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노동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보장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전태일 분신항거 49주기를 맞아 60·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전태일의 삶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노동문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짚어봤다. 4편에서는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 노동운동 역사를 다룬다.   

지난 5월 1일 열린 2019 세계노동절 대회 ⓒ뉴시스
지난 5월 1일 열린 2019 세계노동절 대회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 분신 이전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실태의 심각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사용자들에 의해 부당한 노동행위가 자행되더라도 이것이 위법 행위인지 아닌지,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는커녕 근로기준법 등 관련법의 존재나 내용조차도 알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다.

결코 무지해서가 아니었다. 먹고살기가 어려운 탓에 한 푼이 아쉬웠고, 해고되지 않으려면 부당한 상황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항거는 노동계와 시민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동자들은 반응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처한 부당한 노동현실 문제를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쟁을 통해 작업환경, 노동시간, 임금 등 개선을 쟁취해내기도 했다.

전태일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상황은 달라졌을지언정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전태일들이 있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히 ‘노동환경 개선’, ‘노동시간 단축’. 전태일 분신 후 50년이 흘렀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부르짖고 있다.

새마을노동교실 개관식에 참석한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 <사진 제공 = 전태일기념관>

1960년대 말 한국 노동운동의 흐름이 변화했다. 그 시발점은 전태일이 결성한 ‘바보회’다.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를 시작으로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자신보다 어리고 연약한 직공들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끼고 버스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는 등 개인적으로 도움을 줬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며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한 후에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 구조 문제와 노동실태 개선 등에 집중했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로 한다. 그렇게 최초로 활동하기 시작한 조직이 바로 ‘바보회’다.

1968년 전태일이 재단사 10명을 모아 조직한 바보회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심각성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 아쉽게도 바보회는 큰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이후 1970년 평화시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가 다시 돌아온 전태일이 바보회를 기반으로 ‘삼동회’를 만들었다. 삼동회는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환경 개선 등은 번번이 무산됐다.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전태일은 그해 11월 13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당한 노동실태를 세상에 알렸다. 전태일은 죽기 직전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어머니가 이뤄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장례를 거부하고 전태일의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유급휴일 실시 △법적 임금인상 △8시간 근무 △정규 임금인상 △정기적인 건강검진 △여성노동자 생리휴가 △이중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 8개항을 사용자와 정부 측에 요구했다.

정부는 협박과 회유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소선 여사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악화된 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정부는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전태일 분신 2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청계피복노조는 그동안 벌어진 평화시장 내 크고 작은 노동투쟁 끝에 얻은 최초의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이들은 노조 합법화를 쟁취해냄으로써 노동운동 성장에 또 다른 발판을 마련했다.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동일방직, YH무역 등 사업장의 갖은 수모와 탄압에 맞서 싸워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의 필요성이란 메시지를 남겼다. 그 영향 때문인지 1970년대에만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깨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이 변화가 전태일의 분신이 남긴 가장 유의미한 결과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념비 ⓒ뉴시스

1980년대 초반에는 민주화와 함께 노조 결성이 활발히 이뤄졌다. 그러나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사실상 노조 결성이 어려워졌다. 군부정권의 탄압으로 노동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3달에 걸쳐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이는 전 산업과 전 지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전국 총파업’으로 투쟁은 임금인상, 노조건설, 근로조건 개선 촉구 등이 주를 이뤘다. 노동자들의 직접투쟁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노동통제체제를 깨고 노동기본권을 억압했던 노동관계법과 지배권력의 강권을 무너뜨렸다고 평가된다.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1990년대 중반까지 큰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1998년 IMF 경제위기로 다시금 위기를 맞았다. 노동자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의 ‘경제위기와 노동조합의 대응’ 발표문에 따르면 노동자 파업은 1998년 이후 매년 증가해 2004년에는 462건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난 2009년 5월 23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열린 정리해고 분쇄! 구조조정 저지! 총력집중 금속노조 결의대회 ⓒ뉴시스

2000년대에는 경제 위기가 한풀 꺾이며 이로 인해 맺었던 노사 간 양보교섭을 회복하기 위한 임금인상, 정책 제도 개선, 비정규직노동자 권리 보장 등을 위한 투쟁이 활발했다.

열띤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저항 방식은 거칠어졌다. 장시간 농성, 집회, 시위, 점거 등도 마다하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따르면 2015~2016년 사이 노동탄압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만 6명에 달한다.

대표적인 예가 ‘쌍용차 사태’다. 사측이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자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은 이에 반발하며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약 76일간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복직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10년의 시간 동안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 30명이 사망했다.

최근에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한국도로공사 측에 자회사 전환이 아닌 직접고용과 해고노동자 복직을 촉구하며,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명절을 앞둔 지난 9월 11일 고공농성 중인 민주노총·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요금수납원들 ⓒ뉴시스
명절을 앞둔 지난 9월 11일 고공농성 중인 민주노총·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요금수납원들 ⓒ뉴시스

노동자연대 최일붕 운영위원은 현재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매년 세계노동절과 전국노동자대회 참여 규모만 보더라도 서구 노동운동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강력하다고 평가했다.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노동계급 운동은 비교적 강한 편이며 여전히 탄력적이라는 의견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소극적인 시기도 있었던 반면 노동자 개개인이 스스로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적극적이고, 격정적이었던 시기도 있었다. 시대 흐름에 따라 노동운동의 분위기나 방식도 계속해서 변화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환경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 직접고용 등 노동자로서 가치 인정과 그에 합당한 권리 보장이라는 같은 목적을 바라보며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지금도 우리 사회가 떠안고 있는 노동과제라는 부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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