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계인의 시선’ 김민섭 작가
청년, 미래 선도주체서 과거에 견인되는 피주체로 전락
공정성밖에 기댈 곳 없는 청년세대 두려움 이해해야
‘강력한 연대’ 아닌 ‘느슨한 연결’이 세상 바꿀 것

김민섭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김민섭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화제 중 하나는 ‘공정성’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차별과 특혜에 민감해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저항 역시 거세지고 있다.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비리를 경험한 바 있는 대학생들은 이른바 ‘조국 정국’을 마주하면서 불공정 문제를 제기하는 학내집회를 열기도 했다. 대학생·청년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향해 ‘공정성에 매몰됐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년들의 문제제기는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기성세대가 만든 심화된 경쟁사회에서 그들이 기댈 곳은 ‘공정성’ 밖에 없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 <대리사회> 등 저서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균열을 짚어낸 김민섭 작가는 최근 펴낸 <경계인의 시선>을 통해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청년은 미래를 선도하는 주체에서 과거에 견인되는 피주체로 전락했다’고 진단했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김 작가를 만나 ‘경계인’으로서의 청년과 그들이 불공정 문제에 분노하는 이유, 경계인이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김 작가는 “스스로 경계인임을 인식하고 타인을 감각해야 한다”면서 “강력한 연대가 아닌 느슨한 연결”로 사회구조의 균열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진’의 두려움에서 시작된 작가 발굴

Q.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아르바이트’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책을 쓰는 일과 함께 ‘정미소’라는 1인 출판사를 만들어서 출판을 기획하고 책을 만드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요즘엔 대리운전을 많이 하진 못하고, 간헐적으로 하고 있다. 정미소에서는 올해 두 권의 책을 냈고, 또 다른 출판사에서 외부 기획자로 일하면서 좋은 글이 있으면 출판을 제안하는 일을 한다. <회색인간>으로 알려진 김동식 작가를 그렇게 발굴하게 됐다. 김동식 작가를 만나 책을 기획하면서 즐거운 일이라고 느꼈다. 내가 쓴 글로는 <경계인의 시선>까지 총 6권의 단행본을 냈다.

Q. ‘정미소’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모든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글을 쓰는 속도보다 소진되는 속도가 빠르다. 글을 쓸 소재나 삶의 태도가 중복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면 독자들이 ‘이 사람 글은 더 이상 안 읽어도 어차피 똑같은 얘기를 할 거 같아’ 하는 지점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움이 항상 있다.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억지로 글을 쓰기보다는, 소진될 수밖에 없다면 좋은 글을 쓰면서도 지면에 싣기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들의 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정미소를 시작했다. 정미소라는 이름은 정미소에서 도정을 거쳐 흰 쌀이 나오는 것처럼, 작가 개인의 고백이 도정을 거쳐 책으로 나오는 과정을 응원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지방시>를 쓰면서 대학이라는 세계를 벗어난 것처럼, 글을 쓰면서 자신의 세계에서 나올 작가들을 응원한다.

Q. ‘정미소’를 통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데 힘을 쏟는 것 같은데.

사실 유명한 작가들은 출판사들이 번호표 뽑고 기다려서 책을 낸다. 그런데 새로운 젊은 작가는 ‘내가 지금 제안하지 않으면 책을 낼 수 없겠다’ 싶었다. 그런 의미로 젊은 작가들을 위주로 찾아다니고 있다.

ⓒ인물과사상사
ⓒ인물과사상사

‘어정쩡한’ 경계인

Q. 최근 출간한 책 <경계인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경계인’으로 규정했다. 경계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특정한 곳에서 사회적 역할을 하는데, 어느 곳이든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지 않나. 그리고 중심과 주변 사이에 경계가 있다. 물론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경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중심으로 가기도 하겠지만, 경계는 모든 사람이 거치는 길이다. 경계인이란 중심이나 주변에 완벽히 속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내가 스스로를 경계인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건 대학에서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시간강사 연구자로 오랜 시간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으로도, 교수로도, 노동자로도, 사회인으로도 나를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그 시간이 내겐 경계인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중심과 주변, 경계를 둘러싼 구조의 균열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보이지 않고 경계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잘못된 점들. 이를 볼 수 있는 지점을 경계라고 규정했다. 경계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구조적 균열이 있다.

Q. 우리 사회는 경계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사회에서 경계인을 대하는 모습은 ‘어정쩡하다’라는 시선이다. 노동자로서도 경계에 있는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사회적 보장을 받지 못하고, 혹은 사회적 시선에서도 ‘이것이 과연 노동이란 말인가’라는 말을 항상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책에서 ‘반사회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중의적 표현이다. 사회적이지 않다는 반(反)사회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절반만 사회적인 반(半)사회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절반만 사회적인 인간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나. 동시에 고민과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Q. 경계인은 결국 차별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객체가 되기도 하는 것인가.

그렇다. 갑과 을이 있다고 할 때, 갑과 을의 경계에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갑이 되고, 을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직장 내의 중간관리자를 경계인으로 말할 수 있겠다. 부하직원에게는 갑이지만, 상사에게는 을이지 않나. 사실은 모두가 갑을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경계에서 갑과 을의 자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투데이신문-김종현 일러스트레이터
ⓒ투데이신문-김종현 일러스트레이터

‘고난의 서사’로 만들어진 ‘꼰대’

Q. 김 작가도 대학원 조교 시절을 회상하며 후배들에게 ‘젊은 꼰대’였다고 고백했다. 웹툰 <송곳>의 명대사처럼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것’일까.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람은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는 누군가의 부하직원이다가 집에서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 역할에 따라 갑과 을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게 된다. 차별의 객체나 주체는 수행하는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가면)에 따라 달라지는데,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며, 하나의 조직이나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지점이 살짝 다르다고 본다. <송곳>의 그 대사는 나도 좋아하는 대사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발견한 균열을 나중에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미화하거나 추억하는 일들이 많다.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Q. 책에서 ‘지금의 청년세대는 그들이 혐오하는 ’아재‘와 ’꼰대‘가 될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고 말했다. ‘젊은 꼰대’가 만들어지는 구조에 대해 말한다면.

각 세대마다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외환위기(IMF 사태) 등 ‘고난의 서사’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세대는 고난의 서사라고 할 만한 현대사가 없다. 하지만 구조적 경쟁이 심화된 장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청년세대가 겪는 고난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세대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경쟁의 부담을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이 세대는 공정성에 매몰됐다고 규정되고 있다. 각각의 세대들이 자신들의 고난의 서사를 들면서 ‘우리 때는 말이야’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데, 지금의 젊은 세대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가운데 고난을 현재화하고 ‘나 때는 말이야’가 아닌 ‘나는 지금 말이야’ 하는 고난의 서사를 말할 준비가 이미 돼 있다. 꼰대가 될 구조적·사회적 여건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Q. 청년이 미래를 선도하는 주체에서 과거에 견인되는 피주체로 전락했다고 설명했다.

‘영맨(Young man)'이라는 단어가 수입돼 청년으로 번역된 것이 1900년대 초라고 본다면, 100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의 청년은 미래를 선도할 주체로 호명됐다. 젊은 세대가 근대를 선도할 주체로 선택된 거다. 낡은 기성세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근대를 이끌어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청년들도 스스로를 근대인으로, 기성세대를 전근대인으로 인식했다. 말하자면 청년과 기성세대의 헤게모니 경쟁이 가능한 구도였고, 오히려 청년이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세대는 미래를 선도할 주체가 아닌 보살펴야 하는 존재가 된 것 같다. 기성세대가 청년을 ’우리가 잘 보살피지 못해 미안하다‘는 태도로 대한다. 청년세대가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지금만큼 청년이 기성세대에게 완벽히 패배를 고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본다.

Q. 청년 서사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고난의 서사도 지금 청년세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인의 시선>을 쓰기 시작할 때 청년의 시선으로 시작했는데, 그때가 35살이었다. ‘과연 35살이 청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때, 청년들에게 뭔가 좀 미안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도 청년이었고, 그때 이야기를 한다는 건 결국 청년으로서 내 서사를 말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청년의 서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이 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이제는 당사자로서의 청년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당사자성을 갖는 청년을 20대라고 보는데, 37살이 ‘나 청년입니다’라고 하는 건 청년에게서 청년의 이름까지 뺏어오는 일이 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40대들이 ‘영포티’, ‘욜로아재’라고 하면서 청년의 당사자성까지 뺏어오려고 하는데 그럼 모습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9월 1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왼쪽)·성북구 고려대학교(가운데)·서대문구 연세대학교(오른쪽)에서 각 학교 학생들이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의 사퇴와 딸 조 모씨의 입학 취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지난 9월 1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왼쪽)·성북구 고려대학교(가운데)·서대문구 연세대학교(오른쪽)에서 각 학교 학생들이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의 사퇴와 딸 조 모씨의 입학 취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공정성 매몰된 청년’ 만든 기성세대

Q.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불공정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소위 ‘SKY‘ 대학생들이 조 전 장관 딸 문제로 학내 집회를 개최한 데 대해 일각에서는 ‘SKY에 진학하는 학생 대부분이 고소득층 자녀들이며 혜택을 받지 않느냐’며 비판하기도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최서원(개명 전 이름 최순실)·정유라 입학비리 이슈로 인해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유라 때도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가 조국 전 장관으로 옮겨온 거다. 말하자면 공정성이다. 정유라라는 개인이 ‘너희가 부모를 잘못 만났잖아’라는 한마디로 공정성을 다 파괴했다. 거기에 참지 않았던 개인들이 이번엔 ‘법무부 장관의 자녀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해서 목소리를 낸 것인데, 이에 대해 ‘왜 그때는 침묵했느냐’, ‘너희도 특혜를 받지 않았느냐’라는 말로 몰아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보고 공정성에 매몰됐다는 말도 하는데, 공정성에 매몰되도록 경쟁의 구조를 만들어놓은 게 기성세대 아닌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염치가 없다고 본다. 미안해하기는커녕 ‘공정성에 매몰된 세대’, ‘정의롭지 않은 세대’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보인 기성세대는 혼나야하지 않을까.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정권도 마찬가지다.

Q. 발화권력을 가진 ‘꼰대’들이 학내 시위에 대해 ‘마스크를 쓰지 말고 나와라’라면서 청년들의 문제제기 방식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청년들의 두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시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섰을 때 잡혀가지는 않더라도 ‘지금까지 공정성 안에서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보고 특정 성향을 가진 누군가가 내 취업, 미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그건 올바른 투쟁이 아니야’ 하는 것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그들이 왜 마스크를 쓰고 나오게 됐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건 정의로운 방법이 아니야’라고 하는 건 역시나 염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지방시>를 쓰고 나서 대학원생들을 만났을 때, ‘나는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처음엔 ‘그냥 쓰시면 되잖아요’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생각보다 크더라. 어떤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낼 때 얼굴을 드러낸다는 게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Q. 김 작가도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경험했겠지만, 고용형태를 근거로 차별이 이뤄지기도 한다. 또 장애, 성별,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이 같은 차별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현대사회는 구조사회라고 해도 될 만큼 개인이 구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개인이 구조 안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면 바꿀 수 있는 게 많겠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역할보다는 구조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그로 인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개인이 힘을 합쳐야 하겠지만, ‘왜 너는 정의롭게 나서지 않느냐’라고 하기엔 두려움이 너무 크다. 개인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으면 좋겠다. 페이스북에 단어 하나 쓰는 것도 사실 대단히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개인의 몫을 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가혹하다. 개인보다는 구조에 집중하면 좋겠다. 개인을 바꾸는 일은 구조 한 줄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 시간에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화나 제도, 언어 한 줄을 바꾸는데 힘을 쏟는 게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김민섭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김민섭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저마다의 경계에서 ‘느슨한 연결’

Q.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으로 강력한 연대가 아닌 ‘느슨한 연결’을 말했는데.

우리는 연대라는 단어를 마법처럼 생각해왔다. ‘우리 연대해야 돼’라는 한 마디면 사람들이 모이고 뭔가를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사람들은 점점 연대보다는 느슨하게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느슨한 연결마다 세월호참사라든지, 월드컵 같은 이정표가 하나씩 있다. 예를 들면 ‘촛불’이라는 것은 저마다의 경계에서 광장으로 나오게 된 사건이었지만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중요한 것은 때마다 모이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경계에서 느슨하게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만 ‘느슨한 연결’을 문화현상으로는 정의할 순 있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분명한 건 느슨한 연결이 젊은 세대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결국 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Q. 특정 사건을 공유하는 세대별 공감대라고 보면 되는 것일까.

특정 사건을 어떻게 공유하는지도 중요한 것 같다. 세월호참사를 예로 보면, 1990년대생과 1980년대생, 1970년대생의 세월호 감각은 대단히 다르다. 90년대생들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세월호를 바라봤고, 70년대생들은 자녀를 둔 부모로서 바라봤다. 하지만 80년대생들은 당시 대부분 자녀도 없었고, 당사자로서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세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현대사의 모습이 다르다. 그게 느슨한 연결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Q. 스스로 경계인임을 인식하고 타인을 감각하는 태도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는 ‘나는 여기에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표가 생긴다고 믿는다. 나는 시간강사로 오랜 시간 경계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별한 계기를 통해 ‘내가 여기에서 잘 살고 있는 건가’하는 물음을 갖게 됐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자기규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했다.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를 조망하고 규정하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질문을 누구나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도 30대가 넘어서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처음하게 됐다. 그런 질문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자리가 경계라고 생각한다. 그 질문에 답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타인을 감각하게 된다. ‘나는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너는 괜찮은가’, ‘우리는 괜찮은가’, ‘이 사회, 시대는 어떠한가’ 이렇게 건강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경계에 선 사람이 자신을 향한 물음에 답을 하게 된다면 이후에 어떤 삶을 살든지 경계에서 본 균열을 잊지 않고 변화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