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의 칼럼에서처럼, 당대의 이단아로 평가받는 허균의 면모는 그의 최후까지도 계속 드러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비정상적인 기득권에 의한 것이었다.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 인정전 문 앞에서 허균 역모사건과 관련된 살벌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허균의 혐의는 역모였다. 그 내용은 이전에 언급한대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기준격(한 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의 상소로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의 안부를 묻고 이어 말하기를 ‘의창(義昌. 영창대군)은 선왕이 아끼던 자식이었으므로 매번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너의 아비의 저지로 옹립할 수가 없었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마 이의(영창대군의 본명)가 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옹립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 신의 아비가 역시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부원군이 나로 하여금 심정세(沈挺世)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윤수겸(尹守謙)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윤수겸이 일찍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에 혼사를 맺고서 큰일을 시행하여 시체 두 구를 끌어내고 대군을 세워서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뼈가 저리고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두 시체는 누구를 말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더니 ‘임금과 동궁이다. 오늘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만나보고 청혼을 했다.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1)
위 상소의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시도했으나, 기준격의 아버지인 기자헌의 방해로 실패했는데, 허균이 윤수겸, 연흥부원군(김제남.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인척 관계를 맺고, 함께 영창대군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국문 과정에서 나온 죄상은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익명서를 만들어서 곧 외침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숭례문에 나붙은 한 장의 격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격문이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드러나면서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허균이 냈다는 이 소문은, 허균이 침을 틈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와 이어져서 결국 허균은 역모의 죄로 죽음을 맞이했다. 흥미로운 것은 모진 고문 끝에 허균의 역적모의를 인정했던 인물이 허균의 첩인 추섬이라는 점이다.2)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운궁의 흉격과 흉서, 남대문의 흉방은 허균이 모두 스스로 한 짓입니다. 흉역스러운 일은 현응민과 함께 모의했고, 방을 붙인 사람은 응민이 항상 왕래하였으니 이 사람이 반드시 하였을 것입니다. 추대하려던 곡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의창군(義昌君)을 사람들이 추대하고자 한다.’라고 매양 말했는데, 현응민과 장응기(張應麒) 등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허균이 역모를 꾸민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밤에 소리를 쳐서 도성 중의 사람들이 다 나가게 한 뒤의 그 계획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터인데 그 모의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승군(僧軍)과 포수(砲手)를 이끌고 8월을 기한으로 삼았으며 거사는 15일로 정했다고 하였습니다.3)
특히 서얼과 승려와 어울린다는 것은 허균의 이전 행적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그 예로 선조32년(1599) 황해도사에서 파직되면서 받은 여러 혐의중 하나가 무뢰배들이나 창기들과 어울린다는 것이었다.4) 그런데 이 무뢰배들 가운데 서얼과 승려가 상당수였고, 이 때문에 이전부터 허균은 역적을 모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일종의 “요시찰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허균을 둘러싼 역모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당시 대북 세력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허균은 국문 끝에 끝내 사망했고, 허균의 정치적 동지이자 허균을 탄핵한 기준격의 아버지인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죄인의 진술만으로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으니, 훗날 반드시 허균의 죽음에 대한 이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5)
허균은 그의 행적으로 인해 기득권 세력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짜뉴스 하나 때문에 반란의 죄를 얻어 참수 당했고, 이로 인해 그의 많은 저술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 능력이 출중하지만 당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침없이 비판을 가하는 인물에게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가하는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1) 『광해군일기[중초본]』 122권, 광해 9년(1617) 12월 24일 을묘 6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2024_006
2) 이이화, 『허균의 생각』, 교유서가, 2014, 59쪽.
3) 『광해군일기[중초본]』 131권, 광해 10년(1618) 8월 24일 경진 11번째 기사.
4) 김풍기, 「허균의 불교적 사유의 형성과 <산구게(山狗偈)>」, 『국문학연구』, 제6호, 국문학회, 2007, 22쪽.
5) 이근호, 「허균-조선중기 사회모순을 비판한 문신 겸 소설가」,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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