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공간에서 살아남기 1편

【투데이신문 김주원 칼럼니스트】 필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담임 선생님은 숙제로 일기를 써오라고 했다. 매 주마다 선생님은 반장이 걷어온 일기장을 꼼꼼히 읽으면서 문제가 있는 부분에 빨간 펜으로 첨삭을 해주셨다. 가끔씩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도 찍어주셨다. 일기를 써오지 못했던 친구들은 방과후에 남아서 청소로 대신했다. 기나긴 겨울방학이 거의 다 지나고 개학이 코앞이면 밀린 일기를 쓰는 것은 정말 큰일이었다. 그때 날씨가 좋았는지, 눈이 내렸는지, 추웠는지를 일일이 떠올렸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일기라는 것이 그날그날의 일상적인 이야기보다는 특별한 일을 적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 어린 시절 동네 골목에서 사방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던 우리들에게는 별로 새로운 일이 없었으니,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고역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일기를 쓰면서 글씨체를 가다듬을 수 있었고, 창의성과 논리적 사고 능력이 높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들 알다시피 내실 있는 일기를 쓰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겪어야만 가능하다.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거나, 남들이 안 하는 색다른 취미생활을 해야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글빨’이 나오는 것이고, 주옥같은 문장이 써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일기는 자신만의 소중한 추억을 담기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남들에게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작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일기를 쓰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일단 일기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뇌와 번민을 어느 정도 담아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호텔에 묵는 등 큰돈을 들인 여행을 하고, 자신의 반려견과 매일 노는 이야기나 써내려간다면 이건 일기라기보다는 자기 자랑이지 않겠는가. 어떤 일을 하면서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왜 그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적는 것이야말로 일기 쓰기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기를 나의 아이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읽게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교훈도 줄 수 있을 《열하일기》 같은 일기를 써야 할 것이다. 

약간의 감동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쓰고도 나중에 읽었을 때 손가락이 오글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릴 내용만 적을 수는 없다. ‘그땐 그랬었지’ 하는 여운과, 그 추억에 빠져 옛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일기는 솔직 담백하게 써야 한다. 혼자만의 생각만 적기보다는 남들과의 생각과 비교해본 것도 적어보고, 현 시점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직접 겪은 사건·사고를 중심으로 기록해야 한다. 자신이 겪어보지도 않은 걸 쓴 것은 소설일 뿐이다. 

시의성도 있어야 한다. 일기를 쓰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하고 반성해야 한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미화하거나 자기 합리적 수식어를 넣기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써야 한다. 그래야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일기를 꺼내 들었을 때, 그때 저질렀던 잘못을 깨닫고 반성을 통해 한 보 더 전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분량이 어느 정도 채워지면 한 번쯤 다시 정리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의 일상을 꾸준히 써내려가는 것이 아닌, 시작점과 끝점을 지정해두고서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과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좋다. 이왕이면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철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빠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일기는 자서전과는 다르다. 자서전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공개를 원하지 않는 내용은 통째로 뺄 수도 있다. 하지만 일기는 지속적이고 연관성이 있다. 어느 한 부분을 없애거나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다. 거의 매일 일정 주기로 작성되다보니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창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누가 일기를 쓰겠냐고 하겠지만,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는 방법과 방식이 많이 달라졌기에 그렇지, 사실 지금 세대는 앞서 세대보다 더 열심히 일기를 쓰고 있다. 종이와 연필을 대신하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같은 SNS에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가감 없이 올리고 있다. 심지어 사진이나 동영상을 첨부하는 것은 물론 온라인 방송까지 하고 있다. 

이렇듯 요즘 세대는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 수첩에 손글씨로 일기를 쓰고, 그걸 남이 볼까봐 작은 열쇠로 잠그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사이버공간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올린다. 오늘은 몇 걸음 걸었고, 점심은 무엇을 먹었으며, 저녁에는 어느 학원을 가는지를 마치 업무일지라도 쓰듯이 나의 온라인 다이어리에 일목요연하게 적는다. 아니 구글과 스마트폰이 알아서 바탕을 깔아준다.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SNS 계정에 무엇인가를 계속 집어넣고 있다. 그 일이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든 없든 사이버공간에 적어 올린다. 마치 ‘나는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런가 싶을 정도다. “뭐 이런 것까지 올리느냐?”라고 댓글을 남기면, ‘꼰대(기성세대)의 규제와 통제’라고 하면서 “창의성을 제한하지 말라!”고까지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글이 잘 읽히기를 바라기에 남이 적어준 댓글에 열광하고 ‘좋아요’의 수에 집착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필자는 역시나 ‘꼰대’가 다 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더라도 책상 속 깊숙이 숨겨져야 할 일기의 내용이 사이버공간에서 버젓이 공개돼 모든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은 역시나 매우 낯설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은 이러한 SNS에 실린 일기가 일시적으론 유행을 탈 수는 있지만, 오랫동안 모든 이들이 읽는 글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어차피 SNS 시스템의 지난 10여 년간 추이를 보면 긴 글을 사진·동영상과 함께 올리는 블로그가 지고 글자수가 제한된 단문을 올리는 트위터가 흥하더니, 그 다음에는 좀 더 긴 글을 쓸 수 있는 페이스북이, 또 그 뒤에는 사진이 중심인 인스타그램이, 최근에는 유튜브에 개인 방송을 올리는 것이 유행이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듯 유행에 따라 흥하거나 지기를 반복하는 ‘사이버공간에 공개하는 일기’는 타인들의 악플(악성 댓글)에 신경 쓰게 만드는 애물단지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고전 일기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였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정조 임금 때인 1780년에 중국을 다녀온 경험을 담은 일기 형식의 기행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본 베이징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라, 청나라 황제의 별장이 있는 열하(熱河, 현재의 허베이 성 청더)를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조선 문필가들의 관심을 모을 만했다. 아마도 연암이 영국이나 인도를 다녀왔더라도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이보다 더 많이 자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열하일기》의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는 점이다. 규격화된 벽돌을 구워 만들어 성은 물론 일반 가정집도 짓고, 수많은 수레들이 조선과 달리 길거리를 자유롭게 오가며 대량의 상품을 운반한다. 그 덕에 조선과 달리 생산지에서는 생산물을 팔지 못하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고, 타지에서도 그 생산물을 값싸게 구매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기계들과, 그들이 서양인들과 접촉하여 받아들인 신기하고 편리한 문물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연암이 조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선진적인 기술을 입수했지만, 그의 앞을 너무 높은 장벽이 가로막았다. 그것은 만리장성과 같은 물리적 장벽이 아니었다. 바로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이 가진 ‘편견’과 ‘차별’이었다. 조선 사신 일행은 청나라 황제의 칠순잔치를 축하해주기 위해 몇 달을 걸었고, 황제가 베이징이 아닌 열하에서 머문다는 소식에 6일 밤낮을 달려갔다. 이렇듯 대단한 사절단 일행이 연암과 함께 보고 경험한 것들을 귀국 후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사용했더라면 아마도 우리의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연암을 제외한 사절단의 엘리트들은 애당초 그러한 마음가짐이 부족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연암은 새로운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연암과 같은 실학자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조선이 가지고 있던 틀을 깨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비뚤어진 민족의식과 ‘자기보다 못하다 싶은 이들을 깔보는 의식’이었다. 당시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했기에 열하에서 만난 티베트 불교계의 2인자인 판첸 라마와의 만남을 꺼려 황제로부터 미움을 받기까지 했다. 청나라 황제의 칠순잔치를 축하해주기 위해 그런 고생을 하면서 가놓고도, 정작 황제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사절들의 마음속에 ‘청나라 것들(만주족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민족의식과 깔보는 의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가 선진적 기술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고 하기는 커녕 숫제 거저 줬더라도, 이를 국가적으로 써먹는 것이 불가능했으리라.

스테가노그래피, DMZ 등 6권
김주원 작가 겸 칼럼니스트
-스테가노그래피, DMZ 등 6권

자신이 보고 깨우친 것을 조선에 어떻게 널리 알릴까 고민하던 연암과 달리, 사절단의 주요 쟁점사항은 ‘라마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와 같은 의전 문제가 더 중요했고, 황제가 준 불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귀국보고서 작성보다 더 심각했다. 더욱이 정조는 연암이 작성한  《열하일기》가 성리학에서 쓰인 것과 같은 문체를 사용하지 않아 천박하다며 노여워하기까지 했다. 이런 이유로 박지원은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사용할 수 있는 높은 자리에 발탁되기는커녕, 평생 지방관리직을 전전하며 살았다. 더 어이가 없게 만드는 사실은, 박지원이 죽고 난 후 100년이 지난, 더군다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에야 《열하일기》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당시 조선 사회는 밥을 떠서 입에 대주어도 먹지를 않는,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 비정상적인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연암 박지원이 남긴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당시 조선 사회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역시 나라를 부강하기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육성하고 보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고방식, 이데올로기, 정서가 순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홍보와 인식 향상을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후손들이 우리의 현재 상황을 똑같이 일기를 통해 접했을 때 “당시 지도자들은 참으로 잘한 결정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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