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시습,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들다(1)
[칼럼] 김시습,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들다(1)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28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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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은 출가와 환속,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출가했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김시습의 사상이 불교에 경도됐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의 그의 삶은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도사의 모습도 보여줬다. 나아가 김시습의 삶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가지 사상을 넘나드는 모습까지 확인된다. 그 예로 김시습의 많은 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유학자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매월당(梅月堂)으로 일컬어지고, 법호는 설잠(雪岑)이었으며, 도교의 면모를 강조할 때는 청한자(淸寒子)로 일컬어지고 있다.1) 김시습을 부르는 호 속에서도 김시습이 가진 유불도를 넘나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이전 회차에서 김시습의 “시습”이라는 이름이 가진 유학적 의미, 생육신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김시습의 충(忠)의 실천 등이 김시습이 가진 유학자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김시습은 3살 때 그의 외할아버지로부터 글자를 배우고, 한시를 지을 줄 알았다. 5세 때 『소학(小學)』과 같이 기초적인 유학 서적부터 심지어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 사서삼경의 일부까지 배웠다. 그리고 13세에는 『맹자(孟子)』,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비롯해 『주역(周易)』과 『예기(禮記)』까지 배웠다고 한다. 심지어 역사책과 제자백가의 여러 서적은 독학했다고 전해진다.2) 갓 걸음마를 뗀 3살 때부터 글자를 배우고, 말도 제대로 못할 5세 때 유교 경전을 배웠다는 것은 김시습이 얼마나 천재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김시습이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핵심적 경전들을 두루 섭렵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섭렵했던 유교 경전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배워야 되는 역사서까지 읽었다는 것은 김시습이 어린 시절부터 유학자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 31년(1449), 김시습 나이 15세 때 어머니 장씨를 여의었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숙모가 사망했고, 아버지가 맞이한 계모도 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김시습은 혼인을 했으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8세 때 김시습은 송광사에서 출가했다.3) 김시습이 출가를 결심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을 잇따라 여읜 이후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출가 이전에 김시습이 보여줬던 행적이다. 3년의 시묘살이, 혼인, 지극한 효성 등은 김시습의 삶 자체도 굉장히 유학자 집안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시습이 환속했던 시기도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시습이 환속했던 때는 성종 12년(1481)이었는데, 환속해 유학자로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시기 김시습은 서울에 머물면서 조상의 제문을 올려 제사를 지냈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효온을 비롯해 많은 유학자와 교류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결혼도 1년 만에 사별로 끝이 났고, 성종 13년(1482)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이 시기 김시습은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혼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폐비 윤씨의 사사에 반발하는 모습에서는 김시습이 절의(節義)를 지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은 생육신의 모습이다.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한 서슬퍼런 시기에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노량진에 묻어줬다. 이미 천재로 지배층과 백성들 사이에 이름이 유명했던 김시습으로서는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충(忠)을 지키기 위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고, 세조 집권기에 유학자로서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둔했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 경전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소양을 쌓았다. 또한 효, 충, 의 등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유학자의 전형적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다음 편에 계속)


1)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5-316쪽.

2)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8-319쪽.

3)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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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11-28 16:15:23
조선 초기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그리 심하지 않은듯. 양반출신들이 죄를 짓거나 그러면, 현실을 탈피해 승려도 되고 그랬던게 극소수로 나타나는데, 양반 출신은 승려가 되어도 양반 출신 승려라 하여 천민취급은 아니고, 현실에서 스스로 도피한 계층으로 볼수도 있음. 문제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출신성분이 안좋은 계급이 절의 잡일을 하며 중이 되는것인데, 이런 천민승려는 별 수 없음. 부녀자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여승이 되는것도 용인해 주어야 함.

윤진한 2019-11-28 15:47:47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 http://blog.daum.net/macmaca/2575

윤진한 2019-11-28 15:46:47
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

http://blog.daum.net/macmaca/2632

윤진한 2019-11-28 15:45:51
중요한것은 동아시아 유교국가(중국,한국,베트남,몽고. 그리고 2차대전이후의 대만.싱가포르 및 전세계 화교들)에는 하느님(天),계절의 신,산천의 신,조상신,공맹숭배,한문성씨.본관, 한자,삼강오륜,인의예지신,충효,관혼상제,한자,명절이 수천년 체화된것.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

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