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은 출가와 환속,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출가했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김시습의 사상이 불교에 경도됐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의 그의 삶은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도사의 모습도 보여줬다. 나아가 김시습의 삶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가지 사상을 넘나드는 모습까지 확인된다. 그 예로 김시습의 많은 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유학자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매월당(梅月堂)으로 일컬어지고, 법호는 설잠(雪岑)이었으며, 도교의 면모를 강조할 때는 청한자(淸寒子)로 일컬어지고 있다.1) 김시습을 부르는 호 속에서도 김시습이 가진 유불도를 넘나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이전 회차에서 김시습의 “시습”이라는 이름이 가진 유학적 의미, 생육신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김시습의 충(忠)의 실천 등이 김시습이 가진 유학자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김시습은 3살 때 그의 외할아버지로부터 글자를 배우고, 한시를 지을 줄 알았다. 5세 때 『소학(小學)』과 같이 기초적인 유학 서적부터 심지어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 사서삼경의 일부까지 배웠다. 그리고 13세에는 『맹자(孟子)』,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비롯해 『주역(周易)』과 『예기(禮記)』까지 배웠다고 한다. 심지어 역사책과 제자백가의 여러 서적은 독학했다고 전해진다.2) 갓 걸음마를 뗀 3살 때부터 글자를 배우고, 말도 제대로 못할 5세 때 유교 경전을 배웠다는 것은 김시습이 얼마나 천재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김시습이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핵심적 경전들을 두루 섭렵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섭렵했던 유교 경전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배워야 되는 역사서까지 읽었다는 것은 김시습이 어린 시절부터 유학자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종 31년(1449), 김시습 나이 15세 때 어머니 장씨를 여의었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숙모가 사망했고, 아버지가 맞이한 계모도 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김시습은 혼인을 했으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8세 때 김시습은 송광사에서 출가했다.3) 김시습이 출가를 결심한 것은 가까운 사람들을 잇따라 여읜 이후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출가 이전에 김시습이 보여줬던 행적이다. 3년의 시묘살이, 혼인, 지극한 효성 등은 김시습의 삶 자체도 굉장히 유학자 집안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시습이 환속했던 시기도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시습이 환속했던 때는 성종 12년(1481)이었는데, 환속해 유학자로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시기 김시습은 서울에 머물면서 조상의 제문을 올려 제사를 지냈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효온을 비롯해 많은 유학자와 교류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결혼도 1년 만에 사별로 끝이 났고, 성종 13년(1482)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이 시기 김시습은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혼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폐비 윤씨의 사사에 반발하는 모습에서는 김시습이 절의(節義)를 지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은 생육신의 모습이다.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한 서슬퍼런 시기에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노량진에 묻어줬다. 이미 천재로 지배층과 백성들 사이에 이름이 유명했던 김시습으로서는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충(忠)을 지키기 위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고, 세조 집권기에 유학자로서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둔했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 경전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소양을 쌓았다. 또한 효, 충, 의 등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유학자의 전형적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다음 편에 계속)


1)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5-316쪽.

2)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8-319쪽.

3)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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