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수자의 편에 선 퀴어신학 고상균 목사
개신교, 신도 수 감소 위기 돌파 위해 혐오조장
퀴어신학, 성서에 대한 ‘다른 해석’ 제시하는 것
인권위법 개정안, 성소수자 차별 정당화하려는 시도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최근 자유한국당 기독인회 회장으로 알려진 안상수 의원 등 의원 44명이 국가인권위원회 법상 차별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을 삭제하는 내용의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두고 의원들이 개신교계의 표를 의식해 개악안을 발의했다는 비판이 쏟아진 반면 개신교계에서는 반드시 통과돼야 하는 법이라며 지지에 나섰다.

개신교계의 이 같은 퀴어(Queer, 성소수자) 혐오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해마다 각 지역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때면 개신교계에서는 맞불 집회를 열거나 행진을 방해하는 등 집단행동을 불사하고,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며 가짜뉴스를 퍼뜨리기도 한다.

개신교계의 혐오가 갈수록 심화되는 가운에 최근 성소수자 단체가 주관하는 서울프라이드아카데미에서 ‘퀴어신학’을 강연한 목사가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고상균 목사다. 혐오 일색인 개신교 내에서 퀴어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는 목사가 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혐오를 일삼는 개신교계 내에서 앨라이(Ally, 지지자)로서 강연을 한 고 목사의 존재는 흥미로웠다.

퀴어신학은 주류 신학은 아니지만, 미국의 경우 다양한 배경을 지닌 소수자들이 새로운 성서해석을 고민하게 되면서 퀴어신학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진보적인 교단(敎團, 종교단체)의 신학교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지는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고 목사를 만나 퀴어신학과 개신교계의 혐오가 심화되는 이유, 혐오주의자들의 혐오논리 등에 대해 들어봤다.

고 목사는 성서를 취사선택해 받아들이는 혐오주의자들의 논리를 비판하고 퀴어 당사자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퀴어신학을 말하며 다양한 성서해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 2017년 7월 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개신교인들이 동성애 반대를 외치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2017년 7월 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개신교인들이 동성애 반대를 외치고 있다. ⓒ투데이신문

혐오해도 지탄받지 않는 성소수자 공격대상 삼아

Q. 전국 각지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때마다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혐오세력들이 훼방을 놓고 있다. 개신교가 퀴어혐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소수자 혐오가 주를 이루는 개신교의 행태는 사실 한국의 독특한 특징이다. 전통적인 개신교 국가라고 하는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퀴어 이슈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격론이 벌어진다는 건 교세나 숫자가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 중 진보적인 교단은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금기한다’는 것을 교단 차원에서 채택하기도 하고 보수적인 교단은 이를 거부해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한국은 대부분의 교단이 혐오 일색이다.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단위들은 몇몇의 개인이거나 굉장히 작은 소수의 모임이다. 한국 개신교는 왜 이런가 생각해보면, 한국의 초기 선교를 주도했던 교단의 신학적 배경이 대단히 보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개신교는 성장과정이나 역사를 보면 정권·자본을 옹호하고 그에 편승해 결탁하는 방식으로 소위 선교사업을 펼쳤다. 그러면서 교회는 외적팽창을 ‘성장’이라고 말하며 동경하게 됐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려면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힘 있는 사람, 부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권력이나 돈이 교회에 유입될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적어도 ‘우리는 노동자들 싫어해’라고 말했다가는 큰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여성차별 발언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거나 공론화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맘 놓고 혐오를 해도 크게 지탄을 받지 않는다. 교회로서는 굉장히 편하고 좋은 전략이다. 사실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종교 아닌가.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인기 없는 종교가 개신교다. 그러면서 교세는 급감하고 있다. 앞으로도 교세가 확장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이를 극단적 위기상황이라고 볼 때, 건강한 조직이라면 이 같은 위기를 내적 자성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조직은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결집하는 방법을 취한다. 함부로 비난해도 크게 사회적으로 비판받지 않을 존재들은 적으로 만들기 좋은 대상이다. 그래서 개신교가 혐오발화를 해도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받지 않고 내부결집을 할 수 있는 성소수자 혐오를 선택한 것이다.

Q. 개신교의 퀴어혐오 논리에 대해 설명한다면.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1장 28절에 근거한다. 성소수자들의 성관계는 자녀를 낳을 수 없기에 창조질서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그 밖에 성서의 6~7개 구절을 근거로 들며 성서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성서에서는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남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표현만 등장한다. 그런데도 ‘성소수자들이 불쌍하지만 성서가 금지하는데, 성서를 신앙하는 종교에서 어떻게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서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제국주의·근본주의적 시각으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불행한 시작에서 기인하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중요하다.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주장)에 따라 일점일획(一點一劃)도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성서를 해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무오설이라는 것도 하나의 해석적 관점에 불과하다. 그런데 혐오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덮어놓고 믿으라고 한다.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소수자의 눈을 가진 퀴어신학이 가장 성서적

Q. 퀴어신학의 성서 해석은 퀴어혐오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

퀴어신학은 혐오주의자들이 성서무오설을 근거로 ‘퀴어는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에 대한 다른 해석적 틀을 찾는 것이다. ‘퀴어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비퀴어거나 퀴어를 은닉시키고 싶은 이들이다. 퀴어신학은 이와 반대로 퀴어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방법을 취한다. 이러면 전혀 다른 성서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서 퀴어라고 하면 물론 당사자도 있겠지만 앨라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성서해석을 제공한다. 또 하나, 퀴어는 ‘괴상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괴상하다는 것은 사회적 다수자가 소수자를 향해 붙이는 표현이다. 중세시대에는 남성들이 여성을 괴상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제국주의시대에는 백인들에 의해 특히 흑인들이 괴상한 존재가 돼 짐승 취급을 받고 노예로 죽어갔다. 이런 식으로 다수자들에 의해 괴상한 존재로 낙인찍혔던 이들이 퀴어라고 본다면, 성서 안에서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대제국들이 볼 때 철저한 소수자였고 괴상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시 다수교권이었던 유대교가 볼 때는 괴상한 자였으며,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가 볼 때는 불온한 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사실 성서의 메인테마는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렇게 보자면 다수자의 눈이 아닌 소수자의 눈으로 해석하는 퀴어신학은 성서적이다.

Q. 해석적 차이가 있는 구절을 예로 든다면.

레위기 18장 22절은 남성간의 성행위를 금지(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하고 있다. 혐오주의자들은 이를 갖고 성서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성서는 왜 여성간의 성행위는 금지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하려면 여성과 여성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금지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번째, 레위기는 ‘성결법전’이라고도 불린다(레위기는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종교의식·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기록한 책이다. 기자 주). 여기에는 옷을 만들 때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으면 안 되고, 한 밭에 한 가지 씨앗으로만 파종하라는 규정(레위기 19장 19절)이 있다. 그런데 요즘 개신교인들은 이를 안 지키지 않나. 우리가 입는 옷은 다 혼방이다. 또 한 밭에 여러 가지 작물을 심는 것은 생태주의적 농법으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한 가지 작물만 심었다가 병충해가 퍼지면 농사를 다 망치는 것 아닌가. 성서를 정말 문자적으로 보겠다는 이들은 수염을 깎으면 안 되고, 구레나룻도 밀면 안 된다(레위기 19장 27절). 오징어(레위기 11장 10절)나 돼지고기(레위기 11장 7~8절)도 먹으면 안 되고, 또 교회 안에서 여성은 한 마디도 하면 안 된다(고린도전서 14장 34절). 동성애를 금지하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면 이 구절들도 다 지켜야 한다. 성결법전의 규정을 지금 시대에 지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혐오주의자들은 성서에서 문자주의적으로 지킬 것과 시대에 맞춰 해석할 것을 취사선택하고 있다. 성서를 혐오의 근거로 내세우기 전에 자기모순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절에 근거해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는 생산할 수가 없으니 무의미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성간의 성관계에서 피임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 성소수자의 성관계는 어차피 생산이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생산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피임을 하는 것도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일관성이 있으려면 가톨릭처럼 공식적으로 피임을 금지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당연히 문제가 따른다. 수천년 전 중동에서 쓰인 것을 21세기 한국에서 어떻게 그대로 적용하겠나.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신앙고백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개신교회는 사회적으로 대화가 안 통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Q. 그 같은 규정들이 성서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성서에 그러한 내용이 왜 쓰였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옷감을 한 가지 재료로만 직조하라고 한 것과 한 밭에 한 가지 작물만 파종하라고 한 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성결법전에 적힌 내용들은 이를 강조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럼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자’는 의미를 찾을 문제지, 이를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성결법전이 기록된 당시는 농업사회였고 생산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생산에 유의미한 성행위는 좋은 것이고, 생산에 도움이 안 되는 성행위는 나쁜 것이다. 레위기 18장은 남성 간의 성행위도 금지하지만, 남성과 암컷 짐승의 성관계, 여성과 수컷 짐승의 성관계도 금지한다. 그런데 여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당시에는 정액에 생명이 있다고 여겼다. 지금도 흔히 정액을 씨앗에 비유하지 않나. 성결법전은 생산에 도움이 되는 모든 성관계를 규정하고, 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액을 소비하는 성관계를 모두 금지한다. 하지만 여성과 여성의 성관계는 씨앗이 없는 성관계이기 때문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을 지키려고 했었던 신앙,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지키기 위해 그에 부합되는 성행위만을 긍정적이라고 신의 이름으로 규정한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또 남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한 것은 당시에 남성 간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금지했을 것 아닌가. 사회적으로 소수자로 규정돼 ‘더러운 것들’이 돼 내쫓기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서의 표피가 말하는 의도를 넘어 내피를 들여다봐야 한다. 성서에서 소수자, 즉 퀴어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성서를 바라본다면 성서가 성소수자를 반대·금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Q. 성서가 아닌 HIV/AIDS를 이유로 들며 반대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반박한다면.

그들의 혐오논리가 굉장히 지능적으로 발달해가고 있다. 그들도 나름 노력을 하는 거다.(웃음) 2007년 차별금지법 정국이 시작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동성애는 죄’라며 반대를 했는데, 이는 교회 내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데는 주효했으나 교회 밖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때문에 사회적 인식에서 도움이 되는 논리를 만들어낸 거다. ‘당신이 낸 귀한 세금이 문란한 성소수자들의 에이즈 치료에 쓰이고 있다’는 건 먹히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소위 사회적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경제력도 없고 사회적으로 도움도 안 되는 노인들에게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돈을 줘야 하느냐’라거나, ‘나는 세금 꼬박꼬박 내고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낸 세금으로 공짜로 치료받는다’라는 등 이런 논리는 무수히 많다. 이런 논리는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전제하고 있기에 틀렸다.

또 HIV/AIDS의 근원이 동성애라는 논리로 성소수자를 공격한다. 2018년에 질병관리본부에서 낸 통계를 보면 HIV/AIDS 감염경로는 성접촉이 절대다수인데, 지난해 감염자 766명 중 이성애자가 392명, 동성애자가 374명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수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가짜뉴스다. 그리고 동성애자들도 세금을 낸다.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혜택을 받는 게 왜 문제 되나. 개신교회가 세금이 헛된 곳에 쓰이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교회부터 먼저 반성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 HIV/AIDS의 근원이 동성애자라는 주장은 몰지각하거나 혐오·가짜뉴스에 기반해 만드는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7년 7월 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예수 코스튬을 한 참가자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2017년 7월 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에서 예수 코스튬을 한 참가자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교회 내 앨라이들이 목소리 내야

Q. 개신교회 내에서 퀴어로 살아가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존재부정이다. 분명히 있는데 없는 존재가 되거나 나쁜 존재가 된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목사들이 강단에서 ‘퀴어문화축제에서 동성애자들이 광란의 음란축제를 벌인다’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교회 안에 성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이들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있어도 관심이 없다. 이게 존재부정이고, 이것만큼 큰 폭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분들이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종교를 떠나고, 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거나 스스로를 부정해 삶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종교가 행하는 존재부정을 볼 때마다 마르크스가 말했던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개신교가 없었다면 성소수자가 덜 슬퍼할 수 있었을 텐데, 신앙을 갖고 있어서 교회 내의 혐오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Q. 교회 내에서 아웃팅(본인 동의 없이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공개하는 것)을 당하거나 전환치료를 시도하는 등 성소수자의 안전이 위협받기도 하는데.

내가 5살 때부터 31살까지 다녔던 교회에서 아웃팅이나 전환치료 사례를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거나 혼자 클로짓(closet, 본인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숨긴 채 생활하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슬퍼했을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전환치료가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사례들이 보고되고 증언되는 것을 보면 적지 않은 비율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또 교회의 기본적인 정서가 성소수자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혐오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아웃팅이 되거나 죄인 취급을 당한다. 이런 사례는 실제로 많다.

Q. 교회 내 퀴어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 앨라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교회 안에서 앨라이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성소수자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소수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신앙 양심에 부합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인식하는데 말을 하지 못한다면 신앙적으로 비겁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문을 연 장공 김재준 선생은 “결과는 그리스도께 맡기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교회 안의 혐오표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미 앨라이가 될 준비가 된 분들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고민하던 이가 앨라이들이 말을 듣고 그 날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 이야기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면 그 주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퀴어 당사자가 생길수도 있다.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은 신앙 양심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성소수자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성소수자 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2017년 7월 15일 제18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시청광장 인근에서 개신교의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2017년 7월 15일 제18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시청광장 인근에서 개신교의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투데이신문

인권위법 개정안, 퀴어 존재 부정하는 것

Q.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예장 통합·예장 고신 등 교단이 성소수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거나 옹호하는 목회자들을 이단으로 매도하기도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다른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도 사실 무의미하다. 같은 교단이라면 목사직을 박탈할 수 있으니 유의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교단 목사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그걸 그들도 안다. 그럼에도 왜 이단으로 규정하느냐 하면, 내부결속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단으로 규정해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다. 실제로 예장통합 산하 신학교 학생회에서 이단으로 찍힌 분을 강사로 모시려고 하다가 무산된 일이 있긴 했다. 이 같은 일들이 교계의 반동성에 광풍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개신교는 교세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등 대단한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내부의 문제를 살피지 못하고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다. 내부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집단은 붕괴된다. 쥐도 막다른 곳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교회는 자성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몰리다가 뭐라도 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동성애다. 궁지에 몰린 만큼 개신교의 혐오는 앞으로 더욱 강력해질 거라고 본다. 가장 강력한 ’끝판왕‘이 나오는 것이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생각된다. 가장 강력한 끝판왕이 나왔기 때문에 이 같은 혐오의 광풍은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끝판왕이 나온다는 건 그다음은 없다는 뜻이다.

Q. 최근에는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 등 의원 44명이 ‘성적 지향’을 차별 금지 사유에서 삭제하고 성별을 생물학적 여·남으로 규정하는 인권위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는데, 법안의 문제점에 대해 말한다면.

안 의원은 자유한국당 기독인회 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각 당마다 기독인회가 있고, 당을 초월한 의회선교연합이라는 단체도 있다. 의회선교연합은 2007년 차별금지법이 논의되면서 출범한 단체다. 당시 사학법 때문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엄청 싸울 때였다. 그러던 사람들이 의회선교연합으로 모여앉아 웃으면서 같이 예배드리고 동성애 반대, 성적 지향 삭제 등을 주장하며 ‘우리는 하나입니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었다.(웃음) 지금 안 의원 등이 성적 지향을 삭제하겠다고 하는 데는 이런 역사가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국적, 인종, 종교 등 다른 차별사유는 그대로 두고 성적 지향만 빼자고 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한다는 건 결국 성적 지향으로 차별하자는 주장이 된다. 헌법에 따르면 국민은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겠다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혐오를 법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또 성별을 여성과 남성 두 가지만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은 존재부정이다. 이미 사회구성원으로 존재하는 트랜스젠더, 간성 등 이분법적 성별로 규정되지 않는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국민 중에 이미 존재하는 이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고상균 목사가 지난 1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교회 내 퀴어, 혼자 고민하지 않길

Q. 개신교인이면서 퀴어로 살아갈 수 있는가.

우선 이 인터뷰를 읽는 이들 중 퀴어 당사자가 있다면, 당신은 억압적·혐오적 집단 내에서 부당한 일을 겪는 피해자이지 범죄자가 아니라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해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는 범죄자가 아니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금지하는 교회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 안의 혐오로 인해 마음이 힘들다고 하는 분들은 마음이 힘들 수는 있지만 죄를 지은 것인지,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상처를 받을 필요도 없다.

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좋겠다. 국내에는 유의미한 통계가 없지만, 미국의 통계를 보면 사회 내 동성애자 비율을 적게는 7%, 많게는 18%로 볼 수 있다. 간성,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포함할 경우 그 추산치가 얼마인지 알 수도 없다. 이렇게 볼 때 교회 구성원이 100명이라면,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과연 혼자뿐일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러니 너무 외로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한국 개신교계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교회들이 분명히 있다. 소위 ‘무지개교회’라고 하는 퀴어 당사자 중심의 교회,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본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신앙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길 바란다.

Q.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온다면 퀴어를 향해 어떤 말을 할 것 같은가.

이제 대림절(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 2019년 대림절은 12월 1일부터 24일까지다)이 시작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개신교에 굉장히 유의미한 질문인 것 같다. 이에 대한 답은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이야기에서 예수가 함께 밥을 먹었던 존재는 12명의 제자들로 대표된다. 제자들은 당시 고위층들이 볼 때 소수자로 취급받던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누가복음 7장 34절)’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예수가 함께했던 이들은 집도 없는 존재들, ‘무리’였다. 이들은 당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예수를 스승으로 따랐던 무리들 역시 소수자들이다. 예수가 죽고 남성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을 때, 예수의 곁을 지키며 울었던 이들은 여성이었다. 남성들에게만 인권이 있다고 여겨지던 시절에 여성들은 소수자였다. 예수는 소수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어울리며 친구로 지냈다. 즉 예수도 소수자였다. 그렇게 본다면 답은 명확하다. 이 시대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의 옆에 가서 친구가 돼주거나 이로 인해 죽음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곁에 가서 하루만 더 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비단 성정체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김천의 한국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곁에 함께 앉아계실 것이고, 강남역 앞에서 고공 농성 중인 김용희 님의 곁을 지키실 것이다. 주님은 그러실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주님께서는 스스로도 소수자이셨으니 이 시대의 온갖 소수자 곁으로 오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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