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뮤지컬 ‘레베카’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뮤지컬 ‘레베카’
  • 최윤영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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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아,박지연 ⓒEMK Musical Company 

맨덜리 저택의 문이 다시 열렸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매력, 바로 ‘레베카’의 귀환이다. 

뮤지컬 ‘레베카’가 2년 만에 반가운 개막 소식을 알렸다. 지난 11월 16일 시즌 첫 공연을 시작으로 내년 3월 15일까지 이어지는 일정이다. 게다가 카이, 신성록, 알리 등이 새롭게 합류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서스펜스의 여제’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소설(1938년 작)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레베카’는 오스카상 수상작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대작 영화 ‘레베카(1940년 작)’와 유사한 흐름을 갖는다. ‘스릴러의 거장’ 히치콕 감독은 원작소설가인 대프니 듀 모리에를 마치 뮤즈처럼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영화는 80년 전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감각과 함께 돋보이는 영상미를 자랑한다. 

작품 특유의 세세한 장면 묘사와 깊숙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개는 뮤지컬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뮤지컬 ‘레베카’는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세계적인 뮤지컬 명콤비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의 손을 거쳐 또 한 번 새로운 명작으로 탄생했다. 2006년 오스트리아 첫 공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이끌며 스테디셀러 뮤지컬로서 단단히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는 2013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개막인데, 잘 갖춰진 작품에 한국적인 정서가 더해지면서 더욱 완벽한 모습을 갖췄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완벽 그 이상을 선보이는 뮤지컬 ‘레베카’는 가히 신드롬이라 할만하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무대 중앙 상단부였다. 자신감 넘치게 휘갈겨 쓰인 ‘R’은 살아생전 레베카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마치 불에 타오르듯 선명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영문 철자 하나는 관객들마저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려는 레베카의 강력한 의중이 담겼다. 

레베카의 흔적이 남겨진 공간에서 시작된 나(I)의 스케치는 앞으로 170분 동안 펼쳐질 꿈같은 과거의 예고편이다. 불의의 선박 사고로 아내 레베카를 잃은 막심 드 윈터(이하 막심)는 고통스러운 나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났던 몬테카를로 여행에서 우연히 나(I)를 만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반 호퍼 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된 채 살아가던 나(I)는 매력적인 신사 막심에게 자연스레 끌리게 되고, 막심 역시 새로운 감정을 선사하는 나(I)에게 사랑을 느껴 청혼한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 자격으로 꿈의 저택 맨덜리에 입성하게 되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남다른 위엄을 자랑하는 대저택에서는 여전히 레베카의 숨결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드 윈터 부인’으로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나(I)를 완벽하게 아름답던 레베카와 늘 비교하고, 집사인 댄버스 부인은 조금도 곁을 주지 않는다. 나(I)를 옥죄는 감정들은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결국 막심과의 결혼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마는데, 작품은 이 같은 과정을 수려한 넘버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 생생한 호흡으로 풀어내며 무대를 장악한다.  

류정한ⓒEMK Musical Company
류정한ⓒEMK Musical Company

이번 시즌 ‘레베카’에서 먼저 만나본 공연은 바로 류정한과 이지혜, 알리의 무대였다. ‘막심 장인’ 류정한은 이번에도 지우지 못할 과거의 상처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부유한 신사, 막심 드 윈터 역을 맡았다. 때론 너무나 예민해서 거침없이 화를 내기도 하지만 따뜻할 땐 한없이 따뜻해 그저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뮤지컬 ‘레베카’와의 오랜 인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연한 연기, 울림 깊은 목소리,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정과 세심한 감정 표현으로 깊이 있으면서도 멋스러운 막심을 선보였다. 특히 ‘놀라운 평범함’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두려움과 동시에 새로운 설렘을 꿈꾸는 한 남자의 진심이 가슴 뛰게 느껴져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에게 늘 명불허전이란 수식어가 따르는 이유를 확실히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지혜,류수화,최병광 ⓒEMK Musical Company
이지혜,류수화,최병광 ⓒEMK Musical Company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 이지혜도 나(I) 역을 맡아 아름다운 무대를 선보였다. 모든 것을 사랑의 힘으로 감내하며, 쉴새 없이 몰아치는 운명의 폭풍을 이겨내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나(I)의 모습은 한없이 여리면서도 강인하다.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기만 했던 나(l)의 성장은 이지혜의 열연으로 더욱 돋보였다. 처음에는 막심의 보호가 필요했던 그녀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는 모습이 배우의 연기와 노래로 실감나게 담겼다.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위태로움 속에서도 희망을 그린다. 새롭게 펼쳐질 운명을 앞둔 설렘과 불안을 담아 부르는 듀엣 넘버 ‘하루 또 하루’나 ‘행복을 병 속에 담는 법’은 꼭 집중해서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레베카役 알리
알리 ⓒEMK Musical Company 

새로운 댄버스로 캐스팅된 알리의 무대 역시 매우 인상 깊었다. 알리의 댄버스는 소름 끼치는 공포심을 자극하기보단 지극히 차가워서 넘버를 소화할 때 느껴지는 감정변화의 폭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직접 보고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한 발성, 작은 체구에서 뿜어나오는 허스키한 명품 보이스는 폭발적인 고음에서 더욱 빛난다. ‘영원한 생명’을 부르며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고 레베카를 그리던 그녀가 회전 발코니에서 참았던 감정을 모두 터트릴 때 관객들은 그칠 줄 모르는 박수로 환호했다. ‘뮤지컬 배우’ 알리의 다음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이 밖에도 반 호퍼 부인 역의 최혁주가 유쾌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톡톡 튀는 애드리브는 반 호퍼 부인을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었다. 또한, 막심의 든든한 친구이자 조력자 프랭크 크롤리 역 홍경수도 단단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작품의 중심을 잡으며 맹활약했다.  

실체 없는 대상이 선사하는 심리적 압박과 그로부터 받는 고통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다. 뮤지컬 ‘레베카’만의 특별한 매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레베카’가 주는 극도의 긴장감,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된 불안과 고통,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그려낸 데서 찾을 수 있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도 스릴 넘치는 파워 게임의 한복판으로 초대돼 내내 ‘레베카’에 압도된다. 여기에 탄탄한 원작,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마지막까지 거듭되는 반전,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킬링 넘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조명과 의상까지 더해지며 더욱 강력한 힘을 갖췄다. 
 
때로는 화려한 호텔의 모습이었다가도 한순간에 파도치는 바닷가로, 또 어느새 비밀스러운 저택 맨덜리로 빠르게 전환되는 무대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히 2막에서 선보여지는 회전 발코니 장면은 뮤지컬 ‘레베카’의 백미다. 불안과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댄버스 부인에 손에 이끌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종용받는 나(I)의 모습은 마치 칠흙 같은 어둠 속에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앞에 맞선 한 줄기 여린 꽃처럼 보인다. 

하지만 뮤지컬 ‘레베카’는 원작이나 영화에서 그리는 것보다 나(I)라는 캐릭터에 좀 더 확실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비록 여전히 마지막까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성장해가는 나(I)는 점차 새로운 드 윈터 부인으로서 주체성을 찾게 되고, 때에 따라선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도 보인다. 오로지 막심만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그에게 무작정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르 전환을 거치면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스토리를 좀 더 확실하게 살리기 위한 캐릭터 설정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론 덕분에 막심과 나(I) 사이의 감정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가져왔다. 커다란 위기의 순간을 함께 한 연인은 덕분에 더 큰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응원을 건네게 된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과연 그녀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쩌면 ‘레베카’는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각기 다른 이유와 형태, 그리고 기억으로 남겨진 채 말이다. 매력적인 ‘레베카’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기도 하고, 평안했던 마음을 한순간에 불안으로 잠식해버린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공감해 볼 수 있는 감정이기에 더 끌리고 마는 매혹적인 뮤지컬 ‘레베카’.  어디에나 있는 그녀의 흔적들이 여전히 짙게 남아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이번 겨울, 맨덜리 저택을 반드시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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