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언제나 특별하다. 무엇에든 서툴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다.

풋풋했던 감정들은 갖가지 빛깔로 마음속 어딘가에 깊숙이 남았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그 순간 직감한다. 이런 느낌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며, 늘 반복되리란 사실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익숙한 감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바로 그런 첫사랑을 닮았다.

시선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경매장을 향한다. 무대 위에선 과거의 기억을 굳게 봉인한 채 잠들었던 물건들이 다시금 세상과 마주할 순간을 앞두고 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무겁게 드리워진 장막이 걷히자, 곧바로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샹들리에에 환한 불이 켜지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과거로 거슬러 간다. ‘오페라의 유령’이 펼칠 마법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지난 12월 13일, 유령의 샹들리에가 부산에서 먼저 빛났다. 부산 공연은 최초, 한국 공연은 무려 7년 만이다. 2012년 25주년 기념 내한공연 이후 꽤 오랜만에 찾아온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소식에 작품을 기다리던 관객들의 마음은 한껏 설렜다. 관련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쏟아진 관심 또한 연이은 티켓 매진 행렬로 확실하게 증명됐다. 특히 이번 오리지널 팀의 월드투어 내한공연은 역대 최대 규모로 화려해진 무대를 자랑하며 여러 면에서 완벽함을 더했다고 전해져 기대감을 더욱 높인 바 있다. 부산에서 역사적인 첫 무대를 올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이후 2020년 3월 서울에 이어 7월 대구 공연까지 이어가며 한국 관객들을 사로잡을 채비를 단단히 마쳤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런던, 1988년 뉴욕에서 초연된 이래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은 명작이다. ‘오페라의 유령’이 가진 각종 수상 이력과 관련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남다르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30년 이상 연속으로 공연되고 있는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이 유일하며, 브로드웨이에서는 ‘최장기공연’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토니상·로런스 올리비에상을 포함, 세계 주요 어워드 70여 개 수상에 빛나는 이력 역시 ‘오페라의 유령’의 차지다. 총 41개국 183개 도시, 약 1억4000만 명의 관객을 사로잡은 작품은 오랫동안 관객들의 마음속에 전설로 남아,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 초연됐으며 한국 뮤지컬 시장의 개척과 동시에 본격적인 뮤지컬 산업화 시대를 여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로선 한국 공연 역사상 처음으로 최대 규모의 자금이 투입됐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둬 수익성 측면에서도 청신호를 켰다. 그만큼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 뮤지컬을 처음 접하는 관객이 많았던 데다, 작품 역시 누구나 좋아할 만큼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프랑스 추리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대표작이기도 한 동명 원작소설(1910년 작)을 기반으로 한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오페라 하우스 아래, 타고난 불행으로 인해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가야만 했던 에릭의 이야기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속 유령의 모습과 닮았다. 소설에서는 유령의 이야기가 좀 더 자세하게 펼쳐지지만, 뮤지컬은 인물의 배경을 설명하기 보다 사건을 객관의 세계에 놓아두는 데 집중했다.

천재적인 예술가, 하지만 흉측한 외모를 가진 유령이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를 남몰래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의 경쟁자인 라울 드 샤니와 긴장감 넘치는 구도를 형성한다. 유령은 ‘음악의 천사’임을 자처하며 크리스틴의 모든 것을 가지려 하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유령의 끊임없는 집착은 그를 잔혹한 악마로 변화시켜 결국 모두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사랑하는 크리스틴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종용하게 만든다. 작품은 이처럼 흡입력 있는 스토리를 무대 위에 빈틈없이 펼쳐내며 150분 간의 마법을 선사한다.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인 원작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뮤지컬 제작자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장르로 탄생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사라 브라이트만을 위해 이 뮤지컬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작품 속 넘버를 살펴보면 그의 맑고 고운 목소리를 부각하기 적합하게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듣자마자 확실하게 각인되는 불멸의 넘버는 수록된 모든 음악이 킬링 넘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페라의 유령’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기괴하면서도 익숙한 선율,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넘버는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아름답다. 새로운 프리마돈나의 데뷔를 알리는 ‘Think of Me’나 대표 넘버인 ‘The Phantom of the Opera’, 라울과 크리스틴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부르는 ‘All I Ask of You’ 외에 유령의 솔로 넘버 ‘The Music of the Night’, 2막 1장의 문을 여는 ‘Masquerade’도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본능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The Point of No Return’ 역시 위기의 순간에 욕망으로 뒤엉킨 마음을 잘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려버리고 마는 감정을 아찔하게 잘 표현했다.

뮤지컬 속 오페라를 만나는 재미도 상당하다. ‘오페라의 유령’에는 유령이 작곡한 오페라 3가지가 등장하는데, 이처럼 독특한 구성은 흔치 않다. 여기에 오리지널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의 예술적 감각이 더해지면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완벽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 7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거장의 섬세한 연출은 작품 속에 영원히 남았다.

유령이 지배하는 어둠의 공간과 눈부시게 화려한 오페라 극장은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극의 긴장감을 더욱 높인다. 관객들도 어느새 작품 속에 깊이 빠져들어 실제로 사건이 벌어지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유령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둘러싸며 곳곳에 울려 퍼질 땐 마치 그가 실제로 공연장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장면들은 계속해서 펼쳐진다. 1막에서 유령이 크리스틴과 배를 타고 안갯속 호수를 건너는 장면은 ‘The Phantom of the Opera’와 한데 어우러지며 완벽하게 각인된다. 수많은 촛불이 길을 밝힌 가운데 미지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크리스틴, 그리고 천상의 목소리로 그를 유혹하는 유령의 모습은 놀랍게도 실제 물 위에서 펼쳐지는 느낌을 들게 한다.

낙하하는 샹들리에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다. 알리스터 킬비 기술감독에 의하면 무게부담을 줄이기 위해 특수한 소재로 제작된 이 샹들리에는 기술적 변화를 주어 무게를 약 3분의 1로 줄이고, 기존 속도보다 무려 1.5배 정도 빠르게 낙하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객석 1열에서부터 샹들리에가 위치한 높이까지는 약 12.5m 정도로, 이는 초당 3m로 설계된 낙하속도에 맞춰 무대를 향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6000개의 비즈, 화려한 LED 조명으로 밝혀진 거대 샹들리에가 객석으로 추락하는 장면을 더욱 실감나게 마주할 수 있다. 이 밖에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등장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 곳곳에서 눈에 띄는 신비한 무대 장치 등도 유심히 살펴보면 훨씬 재미있다.  

이토록 대단한 작품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배우들의 역할도 상당했다.

영어 프로덕션 기준 최연소 팬텀으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조나단 록스머스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유령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극적인 선율에 맞춰 감정을 끌어올리는 모습과 섬세한 손짓은 가면 뒤편에 숨겨진 그의 모습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힘이 넘치면서도 품격있는 중저음 또한 극장 전체를 가득 울리며 관객들을 감동의 물결로 적셨다. 크리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라이너 프리드 협력 연출은 한국 공연을 앞둔 조나단 록스머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라”고 주문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의 말대로 조나단 록스머스의 유령은 굉장히 감정에 솔직하고 진실한 느낌이다. 웨버의 작품만 무려 6가지를, 그것도 모두 타이틀 롤을 맡아온 주역다운 모습이었다.

유령과 라울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 역은 클레어 라이언이 맡았다. 지난 25주년 기념 공연 이후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클레어 라이언은 더욱더 깊어진 모습으로 반갑게 무대 위에 올랐다. 아름다운 외모와 맑은 음색 역시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크리스틴 그 자체였다. 극심한 두려움에 떨다가도 금세 사랑으로 가득 차오르는 감정은 그의 깊은 눈에서 더 빛을 발한다. 유령을 향해 연민의 손길을 건네는 순간, 따뜻한 목소리로 표현된 갖가지 감정들은 관객들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이야기할 때 클레어 라이언의 크리스틴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그는 최고의 크리스틴이다.  

어린 시절 친구에서 연인으로 이어진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라울 드 샤니 역 맷 레이시의 무대도 매우 인상 깊었다. 그는 오리지널 연출가인 해롤드 프린스가 오디션장에서 직접 선택한 배우로 알려졌는데, 맷 레이시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해롤드 프린스는 “저 사람이 라울이다”라고 외치며 그가 가진 재능을 무척 높이 샀다고 한다. 자상하면서도 용기 있는 모습과 잘생긴 외모, 따뜻한 음성은 언젠가 상상 속에 그려본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다.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복잡하다. 때로는 너무나 가엽다가도, 또 때로는 그저 차갑게만 보인다. 참 신기한 일이다.

빗나간 사랑과 집착은 결국 유령이 범죄까지 저지르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세상에 버림받은 그가 욕심냈던 것은 오직 단 하나, ‘크리스틴의 마음’이었기에 더 애달프다. 시작은 더없이 순수했을 것이다. 크리스틴의 음악적 성장을 지켜본 기쁨, 세상에 하나쯤은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이성적 설렘과 감춰야만 했던 욕망까지. 결국 그 사랑에게조차 악몽을 선사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일찍이 ‘사랑받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이 모든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크리스틴도 그의 진심을 알았기에 마지막 입맞춤으로 영원한 안녕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작품 전반에 깔린 진실된 사랑과 희생에 담긴 가치는 오래도록 빛을 낸다. 가상의 오페라 극장에 한해서만큼은 유령의 마음을 꼭 감싸 안아주고 싶은 이유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공연장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잠시나마 잊고 있던 설렘이 느껴졌다.

2005년, 낯설지만 기분 좋은 두근거림. 그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작품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뮤직박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때론 순간이 영원을 약속하듯, 그렇게 뮤지컬과의 첫사랑이 시작됐다. 그 때문일까. ‘오페라의 유령’은 언제나 특별했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끝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작품, 서툴지만 좀 더 완벽하게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던 그때를 추억하게 만드는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전주를 듣는 순간부터 마구 두근대기 시작한 심장은 지금도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유령이 선사하는 환상의 세계와 마주할 기회는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상상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직접 느껴보기를. 당신에게도 이 작품이 오래도록 남다른 설렘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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