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큰 꿈을 가지라는 주장이 곁들여진 대부분의 일화에는 ‘크고 좋은 걸 갖는 게 무조건 옳은 거야’ 따위의 독선이 비대한 결핍들과 함께 녹여져 있었다.

가령 소소하게 카페를 차리겠다는 청년을 두고 꿈이 작다며 투덜거리는 식이었다. 당시 청년들 사이에선 전후 살아남는 게 목표였던 부모세대와 달리 평온한 삶에 대한 동경이 막 바람을 타고 있었다.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김 전 회장은 산업화 세대답게 새로운 세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안됐지만 그는 새 시대로 건너갈 수 있는 감각이 없었다. 훗날 IMF 구제금융 사태로 나라의 경제시스템에 메스를 들이대는 과정에서 대우그룹의 41조짜리 분식회계가 드러났다. 그 전까지는 분식회계를 저질러도 아무 탈이 없었던 모양인지, 김 전 회장은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권의 의도를 탓하며 해외로 도피했다.

분식회계는 부실한 사업을 건강한 사업처럼 둔갑시켜 금융권이나 정부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으려는 속임수다. 본질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에 맡긴 돈과 나라에 내놓은 세금을 부실사업자가 가로채는 범죄행위다. 대우그룹이 분식회계를 통해 사업을 꾀했다는 건, 개인의 돈들이 주인 동의없이 일개 기업가의 영달을 위해 범죄에 유용됐다는 걸 뜻한다. 

따라서 꿈을 향해 도전하라는 김 전 회장의 글들과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를 일렬로 놓으면 의미는 단 하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것도 도적질하라.'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 것을 가로채 주인 행세를 하는 것조차 불사하라는 주장이다.

지금의 눈으로는 부당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에 내려오던 불문율이었다. 세상에 무언들 주인이 따로 있나. 차지하는 게 임자다. 이런 인식이 사회 곳곳에 팽배해 있었다. 반칙과 범법은 임기응변이라는 이름을 달고 노력과 능력에 버금가는 의미로 통했다. 

생존이 경각에 달렸던 시대의 허술한 기준이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성취에 밑거름이 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국가도산과 구제금융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한 때 모두의 피해로 돌아왔다. 산업화 세대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김우중은 그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시대전환의 실패는 과거 세대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권리행사에 취약한 다른 이들을 제치고 주인 행세를 하는 데에 익숙하다. 근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가 개봉됐을 때 일부 성인관람자들이 ‘노키즈존’을 원했다. 이 영화가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됐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노키즈존 요구는 특이한 현상이다. 아니, 정확히는 특이한 작명이다. 노키즈존은 철저하게 어른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시각에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주된 소비자인 어린이들이 없다면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이라는 공급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이 이들 주 소비자들 특유의 관람문화가 싫다면 ‘성인전용관’이라는 이름의 상영관을 요구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티켓을 구매한 주 소비자의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동등하게 한 장의 티켓을 구매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자신만이 주인이라고 생각할 때 ‘노00존’처럼 타자를 거부하는 언어가 떠올려지는 법이다. 과거 미국에 흑인의 입장을 막는 식당이 존재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같은 현상은 ‘민식이법’이라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둘러싼 반응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스쿨존에서의 안전을 위한 이 법안이 운전자에게 주행안전 의무를 과도하게 강제하고 처벌한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비판은 학교주변 도로의 주인이 운전자인 성인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학교와 그 주변의 기간시설들 대부분은 주로 어린이들을 위해 쓰인다. 사용자 관점에서 보면 스쿨존의 주인은 보행안전에 서투른 어린이들이다. 

공공질서 교육과는 별개인 권리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는 어린이를 대신해 영화티켓을 구매해 주거나 안전을 위해 함께 등하교 한다. 또한 도로나 차량 등 각종 관련시설의 운용을 위해 어린이 대신 나라에 세금을 낸다. 이는 부모가 어린이의 문화적 기호나 심리적 안정에 관한 권리행사 요구를 대리해 주는 일이다. 

이들의 요구를 사회가 들어주는 것은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다. 훗날 어린이들이 성장해 세금을 내고 공동체에 여러모로 기여할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어른들이 운영하는 여러 유무형의 자산을 어린이들의 요구특성과 조정해 사용하는 것이 세대 간 거래의 관점에서 합당하다. 즉 특정한 장소에서 어린이들의 미숙한 행태가 존재하더라도 그들이 그 공간의 공동주인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 최약체인 어린이들의 권리를 위해 어른들이 기호, 경험, 시간, 환경 등 자신들이 노련하게 획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일정한 제약을 감수하는 건, 그렇지 못한 우리사회 공동주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다. 확장하자면 최약체 어린이들의 권리요구를 동료시민의 권리요구로 여기는 것이 그 밖의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누구나 자신의 약자적 입장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사회의 규약을 든든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단 어린이를 위한 민식이법 뿐 아니라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김용균법 그리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자는 목소리들은 모두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 지금 한창 이야기가 많은 선거제 개편안도 마찬가지다. 모두 나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못 박기 위한 과정이다. 

주인이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는 민식이법을 정치적 흥정 대상으로 삼았던 일부야당의 몽니가 잘 보여주었다. 주인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우리 스스로 느슨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세상은 대우그룹의 41조 분식회계처럼 권리의 보호에 취약한 누군가가 주인의 자리를 빼앗겨야 유지된다.

겨울왕국2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기술과 무력에서 우위에 있던 문명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숲속 부족이 숲에서 누렸던 권리를 빼앗으려 댐을 쌓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 후대에 위험이 닥치자 주인공들이 그 댐을 무너뜨리고 모두가 행복해진다. 이런 영화를 보고도 누군가의 주인 된 권리 앞에서 유일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라면, 아직 우리에게 겨울왕국은 넓고 무너뜨릴 것은 많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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