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과 승려로서의 모습을 살펴봤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서 충(忠)과 절의(節義), 효(孝)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어릴 때 신동으로 일컬어지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의 유학 경전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읽어야 되는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반면 모친의 사망을 비롯한 각종 경험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감행했다. 특히 김시습의 불교 전문 저술의 제목을 보면, 그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인 천태·화엄의 교학과 조사선(祖師禪)의 세 분야에 대하여 모두 최고 수준의 저술을 남겼다.1)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그의 유학자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매월당(梅月堂)으로 일컬어지고, 법호는 설잠(雪岑)이었으며, 도교의 면모를 강조할 때는 청한자(淸寒子)로 일컬어지고 있다.2) “청한자”라는 호가 있다는 것에서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도교 관련 문헌이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지면을 통해서 자세히 소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추후에 좀 더 보완해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김시습의 삶에서 유학자로서의 면모와 승려로서의 면모는 따로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김시습의 출가의 이유 중 하나가 절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자세한 면모는 다음 기록에서 드러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흥취(興趣)하고 방탕하여 명리를 좋아하지 않고, 생업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청빈으로써 뜻을 지킴이 마음 품은 것이었다. 본디 산수를 방랑하며 절경을 만나면 시를읊고 즐기고자 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 친구들이 지필로써 교류하였으나, 되풀이해 천거됨에 힘쓰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을 맞이했다. 남아가 이 세상을 한다고 일컬어지는데, 도가 가히 행해지면 곧 몸가짐과 어지러운 인륜을 깨끗이 할 수 있는데, 부끄럽다. 가히 행하지 않는다면, 홀로 그 몸을 좋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3)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김시습은 본래 유유자적하는 삶을 동경하고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시를 즐기는 일종의 도인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자답게 과거를 준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감개한 일”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뜻하다. 즉, 의롭지 못한 일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것이다, 이후 김시습은 1458년 봄 동학사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울분을 삭히면서 관서, 관동, 호남을 유람하며 시를 남긴다. 그의 유유자적하는 도인과 같은 삶, 그리고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에서 절의를 지키려는 유학자로서의 면모가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삶이 유학자, 승려, 도인의 겉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불도가 융합된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시습은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고, 20대에는 산천을 유람했으며, 30대에는 잇따른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타락한 현실을 비판하고 행동으로 저항했다가 50대에 초연한 모습으로 다시 유랑을 하다가 59세에 병으로 입적했다. 김시습의 약 58년간의 생애 가운데 35년 정도를 승려의 신분으로 살았다. 김시습에게는 유학과 불교가 대립하던 상황에서도 어느 한 쪽에 구애받지 않고, 유교와 불교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해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심유적불(心儒迹佛), 즉 마음은 유학자고 행적은 승려라고 평가하면서, 백대의 스승이라고 평가했다.4) 특히 김시습은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했지만, 유교에 대해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유불융합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유교, 불교, 도교라는 경계가 김시습의 삶에서는 의미가 없고, 그러한 경계를 뛰어넘는다고 평가될 수 있다.


1)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25-326쪽.

2)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6쪽.

3) 余自少跌宕。不喜名利。不顧生業。唯以淸貧守志爲懷。素欲放浪山水。遇景吟翫。嘗爲擧子。朋友過以紙筆。復勵薦鶚。猶不干懷。一日。忽遇感慨之事。以謂男兒生斯世。道可行則潔身亂倫。恥也。如不可行。獨善其身。可也。김시습, “宕遊關西錄後志”, 「詩」, 『매월당시집』.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69A_0120_010_1460_2003_A013_XML

4)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23-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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