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진 작가
권현진 작가

독일의 대표적 미술가인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미술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이자 외관을 근본적으로 불충분한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 점에서 미술은 우리에게 닫혀 있는 것, 즉 우리가 접근 할 수 없는 것에 다가가는 도구이며 방식이다”라고 언급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현실과 표현하는 개념, 그리고 정의는 그 어느 것도 온전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어떤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목적을 가진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미술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각기 상이한 표현방법과 콘셉트에도 불구하고 권현진의 작업은 일상적인 회화에 길들여져 있는 그림에 관한 분위기를 환기 시켜준다는 점에서 리히터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는 그리는 것에 대해 특별한 기법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모든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릴 대상을 개념적으로 이해한 후, 화면 위에 무한대의 형상으로 펼쳐내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고 찾아내는 개념과 대상은 무엇일까? 그는 예고 재학시절부터 줄곧 자신의 존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사유했다. 어쩌면 많은 예술가나 철학자들이 스스로 묻고 답하듯이 그도 그림을 통해 자신을 찾으려 한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이란 존재를 정의하고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원하는 인간의 본능에 포함된다.  

권현진 작가
권현진 작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지속적인 의문을 품듯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매우 유동적이며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즉 어떤 존재도 단 하나의 이미지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조차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유를 거듭하면서 인간 존재의 끝없는 불확실성에 고뇌한 듯 보인다. 

그것은 권현진 회화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끊임없이 물어 나갔고 이것이 그가 추상회화에 접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불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사색하면서 유동적인 혼란의 정체성을 마치 리히터처럼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양식도, 방향도 전제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사유를 넘어 그가 다다른 것이 ‘색채로의 표현이자 기록’인 지금의 언어가 된 것이다. 

Visual Poetry Sculpture Series, Mixed Media on Sainless Steel, 2017<br>
Visual Poetry Sculpture Series, Mixed Media on Sainless Steel, 2017

그의 작품들은 얼핏 보면 한없이 부드럽게 펼쳐진 바닷가의 모래언덕 풍경 같은, 조용히 흐르는 듯한 이미지, 혹은 신비스런 문양들이 자연스럽고 점층적으로 어울린 지도의 풍경과 유사하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그 이미지들을 그는 ‘Visual Poetry(비주얼 포에트리)’ 시리즈라고 명명했다. 추상회화 속에서 내면의 다양한 기억과 감성 또는 체험, 삶의 파편들이 은밀한 관계를 이루면서 화폭에 형성된 풍경으로 구현됐다.

권현진이 만들어내는 이 추상 언어의 대화체는 일견 칸딘스키의 발언처럼 매우 정신적이고 철학적이며 관념적이다. 그는 이 혼란스럽고 유동적인 정체성의 단편들을 가장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색채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작업 중인 권현진 작가
작업 중인 권현진 작가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인 ‘자화상’을 추상의 영역으로 숨기고, 색의 어울림이 주는 물결 속 추상 이미지를 관람객이 소통하고 나누기를 기다린다. 

그에게 있어 ‘색채’란 자신의 인생이 아닐까? 얼핏 보면 사진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분명하지 않은 일련의 비형상 시리즈는 작가의 숨겨진 추상적 발언이며 초상이다.

권현진은 그 신비스런 형태들이 만들어 내는 우연적인 효과에, 붓질보다는 시간의 흐름에서 얻어지는 비구상적 요소를 덧붙이며 풍요로운 이미지의 변주곡으로 전환한다.

이는 그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팝아트나 극사실의 회화 등에 휩쓸리지 않은, 추상표현주의와 공유한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스럽게 이끌고 온 작가 군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68x68cm, 2017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68x68cm, 2017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회화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와 영상미술의 지평으로 미술언어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아우르기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이런 작업태도는 장르라는 고정된 형식이나 틀에 머무르기보다 현대적 감각과 표출방식으로 또 다른 표현을 꿈꾸는 용감한 도전으로 풀이된다.

그의 변화무쌍한 영상들은 사진을 편집한 몽타주(Montage)처럼 보이지만 개인적 경험과 관념에 물들지 않는 독특한 이미지로 변모된 테크놀로지의 현대적 표현에 닿아있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화라는 울타리로 규정되거나 묶여지는 것을 거부하며 개척한다.

자연스럽게, 혹은 우연으로 만들어진 회화란 감각에 조형적인 현실을 부여하는 말없는 언어가 예술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화가란 형태와 색채와 기호로 인간에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이미지를 되돌려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맥락과도 상통한다.

권현진은 물결치는 파도가 만들어 놓은 추상연작에서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을 닮은 무한한 미니멀의 풍경 속에 그가 진정 원하고 있는 마지막 자신의 참다운 이상향을 놓아둔다. 

이를 진행하는 순간마다 그는 깊은 회화의 우연성과 자연적 미에 극적으로 화해하는 시간들을 포착하고 유희한다. 그가 작업과정에서 색채 표현에 예민하게 집중하는 필연성도 그 색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쾌락 때문이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90x90(cm), 2017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90x90cm, 2017

작가는 “색이 생각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바꾸고, 반응을 일으키고, 의사소통에 있어 강력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메시지나 암시가 없다. 아울러 연상되는 어떤 것도 없지만 그는 이 불확실한 것들을 통해 본질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진정한 자화상은 자연스럽게 쌓인 바닷가의 물과 만나 헤어지는 모래풍경 속에 모습을 위장한 채 숨어있다.  ‘Visual Poetry’ 라는 시적 이미지를 가진 항공 풍경의 회화는 침잠되고 평온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클래식처럼 장중하며 동시에 리듬감 있는 발라드풍처럼 달콤하다. 물론 그의 작품에 음악적 리듬은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요소보다 흐름에 장단을 맞춰주는 절제된 감정 속의 단아한 질서에 더 가깝다. 

그는 자연과 예술은 물론 인간이 갖는 리듬에 여전히 예민하다. 선과 색의 조화에서 생동감 넘치는 리듬, 자연스럽지만 우연적 효과가 지배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그 이미지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한 경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관되게 그는 회화주의자들이 보여주는 붓끝의 기교가 아닌 가슴에서 배어나는 내면의 울림으로 추상풍경의 이미지를 도출해 낸다.   

캔버스 천위에 추상적 에스키스를 투사해 그리기 시작해 생생한 색상으로 이뤄진 권현진의 이미지 제작과 형상은 독자적 언어로 정착하고 있다.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68x68(cm), 2017
Visual Poetry Sculpture, Mixed Media on Stainless Steel, 68x68cm, 2017

물질성, 밀도, 질감, 그리고 유동성 등 페인팅의 고유한 특질들을 간직한 채, 엄청난 속도로 이 추상적 회화 공간을 채워가는 이 모든 작업들이 영상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 진보된 이미지의 제작이다. 

그의 영상미디어의 출발은 수작업의 드로잉으로부터 시작해 회화 작품으로 옮겨가면서 회화의 새로운 번안을 통해 미디어라는 테크놀로지와 그리기의 결합에서 전개된다.  

작가는 “회화작업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예술적 개념들을 명확히 하려 노력한 반면, 영상 작품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수많은 프레임들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고 영상으로의 진입 이유를 명백하게 밝힌 바 있다.

움직이는 액체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보이는 색채,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지는 그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작업에 매진할 것이라는 열정을 보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업 중인 권현진 작가
작업 중인 권현진 작가

권현진은 기본적으로 생활 속의 일상성을 제시하면서 메마른 감정으로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정화시키고자 한다.

예술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진실에 도달하려는 목적과 가치다.

이런 진실을 바라보며 함께 공유하려는 시각예술을 향한 발걸음이야말로 권현진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전 작품에서 확인되는 평면과 이미지, 뜨거운 집념과 예술의 새로움을 향한 우직함은 그의 가장 큰 무기다.

그의 평면 작업과 영상예술에 기대를 걸고 관심을 늦추지 않는 필연성, 그것이 그의 작품을 지켜보는 비평가로서의 내 덕목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br>(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br>​​​​​​​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br>​​​​​​​서울아트쇼 공동감독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
서울아트쇼 공동감독

한편 권현진은 2003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뉴욕으로 건너가 2006년 프랫인스티튜트 페인팅(Pratt institute, Fine Art Department, Painting)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어 2012년에는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 석사를, 2016년에는 홍대 대학원 미술학 박사를 취득했다.

2005년 뉴욕 Paula Barr Gallery에서 열린 ‘Progressive’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헝가리, 뉴욕 등지에서 ‘Visual Poetry’ 등을 테마로 한 다수의 전시를 꾸준히 선보였다.

이밖에도 2009년 5월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진 ‘디지로거가 되다’를 시작으로 2009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서울 빛 축제’, 브랜드 ‘DAKS’와의 2015 FW 의상 컬래버레이션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아트뱅크와 홍콩 한국대사관, 국민은행 을지로본사, 서울대학병원, 한국경제신문사 등의 기관에서 권현진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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