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의 추적으로 공개된 전두환의 근황은 국민들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노쇠한데다 알츠하이머까지 앓고 있어 재판에 출석할 수 없다던 그는 지인들과 함께 여유로이 필드를 누비며 골프를 즐겼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발포 명령에 대한 질문에는 골프채까지 휘두르는 건재함을 보였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미납 추징금 1030억원을 낼 수 없다고 버티던 전두환은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에서 1인당 20만원 상당에 달하는 식사를 즐겼다. 5·18 피해자와 유족들은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끔찍한 시민 학살의 총책임자인 전두환은 사과나 반성은커녕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전두환의 뒤를 따르던 측근들은 광주 시민들의 용서가 있어야 사과가 있을 수 있다는 망언을 일삼기도 했다.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이 기억하는 5·18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이리도 광주를 부정하는 걸까. 5·18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란 숙제가 남아 있다. 이를 풀고자 다시 한번 광주의 아픈 역사를 꺼내 되뇌어본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과 시민들의 분노, 항쟁이 끝난 뒤 광주 모습이 담긴 영상 <사진 출처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공개 영상 촬영>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1980년 5월 18일, 광주 일대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대학생들이 불미스러운 신군부 집권을 규탄하며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했고, 미리 주둔해있던 계엄군은 강력 대응으로 맞섰다.

계엄군의 강력 진압에 사상자가 속출했고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신군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이 주도해 이끌어왔던 시위는 남녀노소 관계없이 시민 전체로 확산됐고,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한 획을 그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이 시작됐다.

광주 시민들은 당시 계엄군의 폭력 수준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인간적이었다고 기억한다. ‘광주에 파견된 군인은 며칠 굶기고 약을 먹였다’, ‘술만 먹여서 사람을 개나 짐승으로 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돌아다닐 만큼 무자비했다.

살육에 가까웠던 계엄군의 진압은 한 사람에 의해 진두지휘됐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그가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두환씨 ⓒ뉴시스
전두환씨 ⓒ뉴시스

전두환 시대의 서막 ‘12·12 군사반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경남 마산 일대를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 ‘부마항쟁’이 발생했다.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은 부마항쟁을 강경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시위를 직접 목격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소규모 학생 집단이 아닌 다수 시민이 참여한 시위임을 깨닫고 대책을 마련하자는 온건적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강경 진압을 택했다. 이로써 시위는 일단락됐지만 대응 방식을 놓고 이견을 보였던 집권층 내에서는 갈등을 빚었다.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한 데 불만을 느낀 김재규는 1979년 1월 26일 박정희를 암살했다.

박정희 암살 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 청장 정승화가, 암살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에는 전두환이 임명됐다.

두 사람은 사건 수사 및 군인사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전두환을 수장으로 육군 내에 비밀리에 활동해오던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를 끌어내리고 군부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계획을 모의했다.

이들은 정승화가 박정희 살해를 방조하고 이 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그해 12월 12일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병력을 투입해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불법 강제 연행했다.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군부 장악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언론, 국가정보기관까지도 포섭하며 실세로 거듭났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사망한 김완봉(당시 15세) 군의 관과 오열하는 어머니 ⓒ뉴시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사망한 김완봉(당시 15세) 군의 관과 오열하는 어머니 ⓒ뉴시스

피로 물든 광주의 악몽

1980년 봄, 개강을 맞은 대학가에서는 군사반란까지 일으키며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를 꾀하던 전두환 및 신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령 철폐를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는 민주화운동 물결을 만들었고 그해 5월 절정을 맞았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5월 초,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열리며 신군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시위가 계속됐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장 서리(현 부총리)를 겸직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전두환은 기세를 몰아 정국을 주도하고자 했다. 시국 수습을 명분 삼아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기 위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등을 기획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24시를 기준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에 선포됐으며,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보위 설치 등 조치가 행해졌다. 더불어 영장도 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 수천명을 강제로 구금하기도 했다.

다음 날인 18일,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신군부 행보에 분노한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거세게 항의했다. 미리 주둔해있던 계엄군은 물러서지 않고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라’,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해 타격 및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강경 대응을 펼쳤다.

그렇게 5·18의 악몽이 시작됐다. 대학생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며 규모가 커졌고 19일에는 최소 3000명 이상, 20일에는 20만명 이상 참여했다.

시위가 격화될수록 계엄군의 진압도 더욱 거칠게 변해갔다. 진압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할 뿐만 아니라 대검으로 여기저기 찌르기도 서슴지 않았다. 20일에는 광주역 앞에서 최초 집단 발포까지 이뤄졌다. 이후 발포 및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다음날 또다시 집단발포가 자행됐다. 빌딩, 호텔, 수협 등 건물에 올라 조준사격까지 벌였고 이 과정에서 수천명의 시민이 희생됐다.

전두환은 왜 하필 광주였을까.

역사학자 이종우 박사는 “우선 극동의 모스크바라 불린 TK 지역의 엘리트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박정희 정권 때 정리됐다. 영남지방이나 TK는 부마항쟁을 겪으며 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의 존재가 아무래도 거슬렸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울러 그 시기에 상대적으로 호남지방의 발달을 덜 시킨 부분이 분명 있어 전파 등이 느렸기 때문에 TK보다는 광주가 통제도 쉽고 안전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지난해 3월 11일 전두환씨의 재판이 열린 광주지방법원을 찾은 5·18 유가족 ⓒ뉴시스

피해자 동의 없는 용서

1980년 5월의 광주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계엄군은 물불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칼을 겨눴고, 시민들은 피를 쏟으며 거리 위에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2009년 광주광역시에 따르면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5189명의 시민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에 대한 군부의 학살이었다.

광주 시민 학살 중심에는 전두환이 있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 진압도, 발포도 모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모자라 전두환은 5·18에 참여한 시민들을 폭도, 불온 선동을 일삼는 민족반역자로 몰아가기까지 했다.

그렇게 잡은 권력으로 전두환은 11·12대 대통령을 지내며 10년 넘게 대한민국의 실세로 거듭났다.

그러던 중 1995년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의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12.12 군사반란 및 5·18 진압의 주범으로 전두환을 검찰 소환했다. 탄탄대로였던 전두환 인생에 찾아온 한차례 위기였다.

위기 속에서도 전두환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재판장에 서서도 5·18에 대한 사과없이 모든 책임을 부인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2년 후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 대해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했다. 비로소 책임자 처벌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들의 동의 없는 용서가 이뤄졌다. 같은 해 12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전두환은 특별사면됐고 8개월의 짧은 수감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난 2018년 5월 17일 제38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5·18민중항쟁 전야제 행사 ⓒ뉴시스<br>
지난 2018년 5월 17일 제38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5·18민중항쟁 전야제 행사 ⓒ뉴시스

역사가 기억하는 전두환

5·18 이후 수십년이 흐른 지금, 역사 속 전두환은 어떻게 평가될까.

교육을 명목으로 편찬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 역사 기록물인 교과서를 토대로 전두환에 대한 평가를 분석해보면, 국가에서 발행한 국정교과서에서 관련 사건 서술 방식을 통해 그에 대한 평가를 유추할 수 있다.

2015년 안민석 의원(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이 공개한 역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5·16 군사정변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명칭과 기술이 정권에 따라 유리한 내용만 확대 기술되는 편향성을 띠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에서는 5·16 군사정변이 혁명으로 기술됐으며, 장기집권 발판을 마련하고자 헌정을 중단한 유신시대는 민주주의 시련기로 평가했다.

특히 5·18과 관련해서는 ‘5월 혁명의 성격은 어떠한가?’라는 편향된 질문을 연구과제로 삽입했다. 민주주의 열망에 대한 국민들의 시위가 확산된데 대해서는 “자유를 그릇되게 이용한 사람들로 인해 혼란이 가중됐다”는 내용과 함께 ‘사회혼란’이라는 삽화를 첨부해 시위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군부의 집권이 끝난 이후에 발행된 국정교과서에서는 5·18을 혁명, 민주화운동 등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점차 관련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늘었다. 그리고 새롭게 편찬돼 올해 3월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 검인정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검인정교과서에는 전두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전보다는 두드러지게 기술돼 있을 것으로 예고됐다.

출판사 해냄에듀의 고등학교 한국사 검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전국역사교사모임 소속 중등교사 차경호씨는 그동안 밝혀진 5·18 진상을 토대로 전두환에 대한 평가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추세라고 했다.

차씨는 “현대사 교과서에서 전두환씨는 가장 부정적으로 서술돼 있는 대통령”이라며 “해냄에듀 한국사 검정교과서에는 5·18에 대해 ‘신군부 폭력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고 기술돼 있고, 전두환 집권을 군부독재라고 명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억누르기 위해 금강산 댐 사건, 간첩당 사건 등을 조작해 남북간 긴장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내용도 있고 박종철, 이한열 고문치사에 대한 내용도 자세히 나와 있다. 영화 <1987>을 주제로 군부독재와 싸운 시민들의 용기를 강조한 내용의 칼럼도 실렸다”고 부연했다.

차씨는 “정부에서 편찬한 국정교과서는 전두환의 군부독재나 폭력성 등 표현을 지양했다. 관련자들이 아직 생존해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더 건조하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와 달리 촛불혁명 이후 통과된 검인정교과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전했다.

5·18과 관련된 정황과 증거는 전두환을 가해자로 가리키고 있다. 더불어 역사는 진실을 토대로 그의 과오를 인정하려는 노력을 토대로 새롭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과 한번 없이 너무나 쉽게 죗값을 치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전두환은 여전히 사과 한마디조차 없다. 도리어 광주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부인하며 피해자들의 상처를 또다시 후벼 파고 있다.

40년 전 시작된 전두환의 후안무치한 만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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