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KMusical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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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평생 웃어야만 했던 남자는 별을 품에 안고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다. 

한국 창작 뮤지컬 ‘웃는 남자’가 재연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2018년 초연에 이어 2년 만이다. 제작 기간 총 5년, 175억원 대의 초대형 제작비 투입으로 일찍이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마지막 공연까지 누적 관객 총 24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작이기도 하다. 당시 ‘제7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6관왕,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 3관왕, ‘제6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뮤지컬 부문 최우수상, ‘제14회 골든티켓어워즈’ 대상 및 뮤지컬 최우수상 수상 등 한국 뮤지컬 최초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호평받은 작품이지만, 실제 관객들의 평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가운데 다소 엇갈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재연으로 돌아온 ‘웃는 남자’는 더욱더 탄탄해진 전개와 강한 흡입력으로 ‘웃는 남자’의 진면목을 발휘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도 분명하고, 메인 넘버의 반복 활용을 통해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하나로 아우른 느낌이다. 물론 환상적인 무대 연출도 빼놓을 수 없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웃는 남자(L’Homme qui rit, 1869)>를 원작으로 한다. 빅토르 위고가 생전 “나는 이 이상의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자평한 작품이기도 하다.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빈부격차와 신분 차별이 만연했던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사회 비판적 시각이 극중 인물들의 외침을 통해 전달된다. 희대의 악당 캐릭터 ‘조커’의 탄생 역시 ‘웃는 남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첫 장면은 아이들을 납치해 흉측한 기형으로 만들어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팔아온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로부터 어린 그윈플렌이 버림받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양옆으로 길게 찢긴 입을 가진 그윈플렌은 정처 없이 떠돌다 얼어붙은 채 죽어있던 여인의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발견한다. 그들은 우연히 만난 약장수 우르수스에게 구제받게 되고, 앞을 못 보는 아기의 이름을 데아라 짓는다. 두 사람의 기구한 사연을 바탕으로 꾸린 유랑극단은 생계 수단이자 삶이고, 정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기이한 외모로 유명해진 그윈플렌은 소문을 듣고 공연을 보러 온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아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는데, 조시아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유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윈플렌의 순수했던 마음은 처음 겪게 된 강렬한 자극에 흔들리게 되고 어쩌면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될지 모른다는 열망으로 바뀐다. 이를 바라보는 우르수스와 데아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윈플렌이 갑작스럽게 고문소로 끌려가게 되며 모두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오는데, 순식간에 휘몰아친 운명의 소용돌이는 예상치 못한 방향을 향한다. 

드라마적 요소가 가득한 스토리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무대 위로 압축시켜 놓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1막 후반부에서 드러날 반전은 소재만 놓고 본다면 조금 진부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각 장면에 적절히 어울리는 넘버가 계속해서 감정을 동하게 한다. 초연과 달리 2막 일부 장면 순서 변화가 이뤄졌으며, 각 캐릭터가 갖는 성격은 좀 더 명확해졌다. 덕분에 개연성도 훨씬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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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인 티가 역력한 무대 연출 역시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웃는 남자’의 상징이기도 한 아치형 구조물이나 소품 등은 미소 띤 그윈플렌의 입가를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나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상원 의회, 여인들의 춤이 펼쳐지는 템즈 강가 연출은 무대가 아니라 실제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무대 위로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들도 티 없이 순수한 주인공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장치로 쓰였다. 여기에 바이올리니스트의 감미로운 연주가 더해지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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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윈플렌役 수호 ⓒEMK Musical Company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초연에 이어 이번에도 ‘웃는 남자’ 그윈플렌을 연기하게 된 수호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공연장을 누볐다. 행복할 권리를 외치는 그의 모습에서 희망을 꿈꾸는 청년의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기괴한 미소 아래 감춰진 고뇌와 진심은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표현으로 깔끔하게 전달됐다.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귀족사회에 환멸을 느낀 그윈플렌이 ‘그 눈을 떠(OPEN YOUR EYES)’와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를 부를 때에는 새삼 통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워낙 몸의 표현력이 좋은 배우여서 그런지 움직임도 가볍고, 춤을 추는 장면에선 수호의 매력이 더 극대화된다. 

또, 조시아나 역의 신영숙은 뛰어난 가창력과 요염하면서도 매력적인 연기로 무대를 압도했다. 조시아나는 체면을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기에 바쁜 귀족들과 달리 자신의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고전을 기반으로 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현대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상을 가지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상위 1%의 귀족인 그가 작품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그윈플렌에게 영향을 받아 새로이 변모하는 모습은 달라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보게 한다.  2막 후반 ‘내 삶을 살아가(LIFE MOVES ON)’를 부르는 장면에선 신영숙의 폭발적인 고음이 공연장 전체를 감싸며 관객 모두를 감동의 도가니로 이끈다. 넘버가 끝나자마자 뜨겁게 쏟아지는 박수갈채가 이를 증명한다.

그윈플렌의 순수한 마음을 지탱하게 만든 힘이자 운명과도 같은 인연인 데아 역 강혜인도 인상적인 연기와 노래로 무대를 빛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나긋나긋한 움직임에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맑고 밝은 음성은 마치 ‘별’처럼 반짝이며 인물의 성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중에서도 그윈플렌과 데아의 듀엣 넘버 ‘나무 위의 천사(ANGELS IN THE TREES)’는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달라져 더 뭉클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된 그들은 서로에게 눈과 거울이 되어주며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겉으론 투박하지만 누구보다 정겹고, 묵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성으로 신뢰감을 주는 우르수스 역의 민영기와 욕망에 사로잡혀 앞만 보고 달리다 모든 것을 잃고 마는 데이빗 더리모어 경 역의 최성원, 권력의 정점에 서서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앤 여왕 역의 한유란도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뮤지컬 ‘웃는 남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평등과 행복을 외치며 커다란 변화를 꿈꿨던 그윈플렌이 결국 현실의 높은 벽을 부수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과 같은 데아를 품에 안으며 돌아선 뒷모습은 오래도록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그 행복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고 행복할 권리를 법으로 보장받았다. 하지만 가끔씩 그토록 어렵게 쟁취한 가치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갈 때도 있다.

이 작품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언제나 반드시 지켜야만 할 가치임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의를 외치며 거침없이 질타를 날리는 그윈플렌의 모습은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울림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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