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왈종 작가

이왈종 작가는 1974년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23회 국전에서 문화부 장관상을 받으면서 일약 화단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동양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시각과 기법으로 한국화의 가능성을 독창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엄청난 수상의 영예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했고 작업은 치열했다.

1983년 <생활 속에서>라는 연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이왈종은 한국화의 새로운 기수로 평가받았다.

당시 한국화단에서 동양화의 위치는 대중들에게도 버림받고, 컬렉터들도 모두 등을 돌린 절체절명의 고사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많은 미술애호가들은 지지부진한 수묵과 채색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미술계 특히 동양화단을 질타했다.

누군가 이 난국의 한국화단을 헤쳐 나갈 테러리스트가 필요했다. 이때 몇 명의 한국 화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황창배, 박대성 그리고 이왈종 화백 등이었다. 

이러한 당시 이왈종 화백의 작품은 전형적인 한국 전통 산수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이들에게 한국화단에 미래를 맡기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혁신적인 새로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황창배 화백은 황창배 신드롬을 일으키면서도 불행하게도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 후에 박대성 화백은 경주 남산으로 낙향했고, 이왈종 화백은 추계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때 이왈종 작가는 예술가의 갈림길에서 세 가지 선택을 하였다. 하나는 복잡하고 잡사에 서울을 떠나는 것과 두 번째는 대학교수직을 접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정이 있는 화가가 교수직을 포기하는 것은 곧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리고 제주 서귀포로 귀향을 자처했다. 

거기서 그는 또 하나 한국화의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한국화를 넘어서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장지에 아크릴이었다.

먼저 화선지에만 갇혀 있지 않고, 재료도 과감하게 장지에 아크릴을 사용하면서 장르 해체를 시작했다. 답보적이고 지루한 표현의 문맥에서 일탈을 시작한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와 부조 등으로 표현의 한계에 그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때 많은 사람은 그런 작업에 익숙지 않은 작품에 변신에 의아해했고, 교수직을 버린 것을 두고 곧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또한, 제주행을 두고 이왈종이 드디어 돌았다고까지 비웃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재료, 색감으로 용기 있게 평면 형식을 벗어난 입체감의 미술 형식을 종이 부조로 변형하는 데 성공했다. 

점진적으로 화상들은 그의 신작들에 열광했고, 많은 중요한 컬렉터들은 이왈종 화백에게 그들의 거실과 빌딩, 호텔, 골프장의 벽면을 내주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를 재료로 쓰는 부조뿐만 아니라 조각, 도판, 보자기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으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술가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적인 것을 찾아 변신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제주에서, 수년간을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터득했다. 1990년 제주의 낙향은 그에게 엄청난 작품을 할 수에 변혁을 가져다줬다.

먼저 그는 막대한 양의 대형 장지 작업을 해낼 수 있었고, 도조와 도판 작업 등 표현과 재료, 주제에 있어서 도시의 전형적인 생활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공간을 그림 속에서 아우르는 무한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요철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작업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는 서울을 떠나 제주에 닻을 내리면서 예술가가 걸어야 첫 번째 고행의 길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회고했다. “제주에 정착하여 20여 년이 넘게 그동안 나는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란 주제를 가지고 한결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만을 깊게 생각해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생각해 봤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 

사랑과 증오, 탐욕과 미움, 번뇌와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모두가 다 마음에서 비롯됨을 그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그렇게 마음을 비우기는 절대 쉽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내재하는 한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흰머리로 덮여가는 작가의 초상을 본다.

이렇게 작가는 행복과 불행, 자유와 구속, 사랑과 고통의 모든 세계에서 그는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의 세계로, 화면을 거침없는 생략과 단순함으로 이왈종 화백의 제주에서의 30여 년은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이다. 

그가 그의 그림에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중도의 세계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좀 더 나아간 <중도의 세계>로 정착했다. 이 중도의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왈종의 예술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정신적인 배경이자 뿌리이기도 하다. 

지난해 그는 위험에 빠질 정도로 사고가 있었다. 이후, 다시 제주에 꽃이 피었다. 지금 작가는 150호짜리 대형 매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이 드니 밝은 게 더 좋아진다. 빛은 에너지다. 빨강을 보면 힘이 솟는다. 하지만 하늘에 구름이 끼면 괜히 몸도 안 좋다. 그러니 빛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빛 가운데 중도가 있었다.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그는 중도를 이렇게 풀이했다. “중도란? 평등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평상심에서 시작된다. 환경에 따라서 작용하는 인간의 쾌락과 고통, 사랑과 증오, 탐욕과 이기주의, 좋고 나쁜 분별심 등 마음의 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일고 있는 양면성을 융합시켜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주체나 객체가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수없이 되뇌었다고 했다. 마음과 육체가 둘이 아닌 세계,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세계. 그것은 바로 아무런 집착이 없는 무심(無心)의 경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세계가 바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이다. 

실제 그러한 철학적 사고가 그동안 일관해 온 ‘제주 생활의 중도’로 꽃피었다. 그의 작품에 하늘을 나는 물고기·사람보다 아니 집보다 더 큰 꽃등·돌하르방·배·말·자동차 등은 물론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같은 크기로 등장한다. 아니 어느 것은 오히려 사람보다 더 크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은 물고기나 새처럼 하나의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그림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는 화면 속에 보이는 풍경들을 통해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의 그림은 일상의 삶에 뿌리를 내리면서 평범한 제주 풍경을 전통적인 관념의 산수에서 훌쩍 벗어나 새롭게 시각화하고 조형화시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어디에도 필법이나 형식에 묶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주의는 결합하여 사슴이 된다.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여 나르는 물고기가 된다.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함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나의 작품에서 완전한 자유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서울아트쇼 공동감독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
서울아트쇼 공동감독

그는 어쩌면 제주에서 인생이 가져다주는 모든 만다라의 세계를 외로움과 기쁨, 고통과 환희 속에서  자신을 던져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아주 겸손한 몸짓으로 얼마 전 그는 한 신문의 설문 조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추천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겸손해한다. 자기는 생활인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그는 분명 아주 평범한 생활인이 아니고 훌륭한 화가이다. 이미 손수호(전 국민일보 문화부장)는 그의 예술과 삶에 관하여 “추사 김정희가 고독과 설움을 삭였던 그곳에서 작가가 건져 올린 투명한 회화 언어는 눈부시다”라고 극찬했다.

그렇다.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최고의 예술가라는 칭호는 “작가는 외로워야 한다. 내게 외로움은 작업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지닌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찌 외롭지 않고서 가능한 일인가”라고 그가 자신에게 되물었던 그가 애타게 물어왔던 것에 대한 아주 작은 해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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