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시장 공간에 100호를 넘나드는 대형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것은 색채 중심이다. 빨강, 파랑, 혹은 검은 색 바탕위에 다양한 컬러의 물감 색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좌우로 끊임없이 흐른다.

혹 감상자들은 이게 뭐지?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할까? 왜 위에서 아래로 물감들을 흘려 보낼까? 

권기자의 작품 앞에서 그런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고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1950년대 프랑스의 미술운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élix Fénéon)은 기존의 아카데미즘 화풍에서 탈피,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추구한 일련의 인상파 화가들을 얼룩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의 <Tacheist. 타시스트>라고 명명했다.

20세기 초 화면에 등장하는 얼룩진 물감들의 작품을 통틀어 표현주의적 요소인 “Tache 얼룩이란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1953년에는 비평가 피에르 게강(Pierre Guéguen)이 샤를르 에스티엔(Charles Estienne)이 기획한 전시회에 대해 야유와 조롱 섞인 뜻으로 이 단어를 쓰면서 마치 앵포르멜 개념처럼 통용됐다.

이 미술운동에 가담한 대표적인 작가가 장 미셀 아틀랑(Jean-Michel Atlan), 조르주 마티유(Georges Mathieu), 앙리 미쇼(Henri Michaux),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 등이다.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심한 반발로 엄격한 화면 구성을 거부하고, 작가의 창조적인 직관에 따른 자유분방한 붓놀림을 진정한 미술의 특징으로 삼은 것이다.

권기자에게도 이러한 평면 회화의 개념에 대한 화면구성을 거부하는 저항적 시선이 작품 전체에서 일관되게 전형적으로 발견된다.

자연을 주제로 하지만, 그 자연을 한정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좀 더 폭넓은 의미로 확장, 해석하면서 자연을 예술의욕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물감을 흘려 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면을 휩쓸듯이 그리기도,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흘러내리며 장엄한 화폭을 연출하는 타시즘(Tachism) 미술에 권기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합류한 것이다.

이제 권기자의 화폭에 등장하는 물감 흘리기의 출발과 원형이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 충실하게 규명됐다.

앵포르멜의 선구자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처럼 권기자의 작업 스타일은 종종 튜브에서 직접 짠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올려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떤 물체를 묘사하거나 그리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물감과 오일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려 흘리는 과정을 동일한 행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런 선이 만들어지고, 이 선들이 쌓여 두툼한 줄긋기의 평면이 형성되고, 결국에는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한다. 

권기자의 화폭에 이 물감의 흘러내리기는 최소한의 규칙과 자연스레 맡겨진 형태로 창조되는 순수한 과정을 완전하게 거친다.

다분히 서정적 추상화풍을 떠올리는 우연한 효과, 구름과 같은 이미지들을 화폭 속에 담는 우주의 생성과 순환, 그리고 빛 등을 지속적으로 분명하게 구축하고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권기자의 작품은 화면 가득하게 드러내는 미국형 전면회화(all over painting)에 훨씬 근접한 듯 보인다. 이것들은 90년대 초 그가 추구해온 흘러내리기의 자연(nature) 시리즈도 이런 타시즘의 스타일을 아우르는 스펙트럼형 작가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의도적 행위는 물감의 우연한 속성과 어울리며 생생한 리듬감 넘치는 형상에서 또 다른 자연속 지층의 단면을 상상하게 한다.

화폭에 불규칙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어진 선들은 마치 직조된 반복 무늬의 타피스트리를 떠올리는 의외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선들이 한 줄씩 모여 생생한 리듬 층으로 퇴적암처럼 또 다른 내면의 숨결을 보는 듯한 낯선 즐거움이다.

이미 오래전 작가는 작업의 초기부터 끊임없이 모든 생성과 순환, 흐름을 자연의 질서에 두고 그 질서 속에 숨겨진 생명력과 에너지를 드러내겠다는 의지를 밝힌바 있다.

그가 캔버스 안에 생명과 에너지, 존재와 자연의 운동이 공존하는 이 모든 시리즈를 `자연`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모두 타시즘에만 의존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바탕색을 칠한 후 다양한 빛의 아크릴 물감을 붓끝으로 캔버스에 조심스럽게 떨어뜨리는 치밀함과 이성적인 감각을 병행한다.

그 “떨어진 물감들이 서서히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다가 흐르면서 덧붙여지고 겹쳐지면서” 아름다운 선들이 절묘한 느낌으로 탄생한다. 이들이 함께 모여 만든 선들이 거대한 파노라마의 리듬감으로 또 장엄함이 연출되는 것이 바로 권기자 작품의 본질이자 현장이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색감도, 다양한 재질감, 우연의 효과가 집합해 추상적 형상이 창조된다.

이미 권기자 작가는 “바이털리즘, 우주에서 자연으로 무한 순환하는 강렬한 색채로 필연성과 우연성을 동시에 담아내면서 현대성”이 잘 담겨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의도적인 흘러내리기의 필력과 거친 붓 터치, 붓에서 뚝뚝 떨어져 생긴 물감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변혁을 시도하여 변혁의 찬사를 받고 있다.

즉 오일을 떨어뜨리는 작업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아래로 떨어진 것들을 모아 칼로 자르는 절개의 기법으로 변신을 단행했다.

동일한 흐름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이 방식은 작가로서는 매우 도전적이고 개혁적인 용기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

권기자의 타시즘적 화면에서 이제는 떨어져 쌓인 물감을 횡으로 과감하게 절단하는 형식에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한다.

작가의 치열한 이 표현에의 변신을 매우 인상적인 아방가르드 행위로 해석하고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서울아트쇼 공동감독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
서울아트쇼 공동감독

그 흘러내림의 형식에서 진보된 집적의 물감에 대한 절단은 그만큼의 참신함과 시각적인 형식이 내재한다.

변화 자체만으로도 어려운데 무엇보다 그 변화가 인상적이며 흥미 있는 <표출>이란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조각가 아르망 (Arman)이 시계나 악기를 집적하는 작업패턴에서 사선 형식으로 자르는 과감한 방법에 비견할 만 하다.

권기자의 흘러내리기에서 절개하는 그 모든 절차의 시각적 효과가 너무나 아름답고 신선함에 나는 거듭 찬사를 표하고 싶다. 만족하지 않고, 거침없는 용기로 채찍질해서 태어난 그 절개의 신작들을 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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