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의 종교지형을 한 마디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단(異端)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했고, 사찰의 수를 인위적으로 줄였으며, 조선 중·후기에는 가정의 의례까지 대 성리학자인 주희(朱熹)가 쓴 책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의례를 보급했으니 이 말이 맞게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모습 이면을 조금 자세히 보면 조선조에 불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일부는 현대 학계에서 불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또한 왕실은 효(孝)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사찰을 건립하고 지원했다. 아울러 불교계도 그들이 가진 특유의 조직력과 재력, 그리고 민중의 지원을 바탕으로 조선 지배층의 불교정책을 중국에 건의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을 구원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심지어 조선의 크고 작은 반란에 승려들이 참여한 모습도 많이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왕조 개창 이전까지 약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교가 국가의 사상적 배경이자, 백성들의 주요 신앙이 됐으니, 왕조가 바뀌었다고 한 번에 불교를 멸절시킬 순 없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조선조 종교지형을 “내유외불(內儒外佛)”, 즉 겉으로는 유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지만, 실상은 불교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규정짓는다.

이러한 조선의 종교지형을 전제로 했을 때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는 매우 재미있는 인물이다. 우리는 무학 자초에 대해 많은 내용을 배워왔다. 고려에 태어난 승려로서 이성계와 인연을 맺어서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등극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고, 조선의 도읍인 한양의 터를 잡았으며, 이성계가 죽기 전까지 이성계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는 것이 대략적인 내용이다.

학창시절에 위와 같은 내용을 배울 때, 우리는 어쩌면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외우기 급급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조선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 세력과 정도전 등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신진사대부가 연대해 세워진 왕조이다. 또한 조선이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쿠데타를 통해 세워진 왕조다보니, 과거의 왕조를 무너뜨릴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왕조 개창 초 부족한 국가 재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불교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필요했다. 불교의 타락과 부정부패를 부각시켜서 불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했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했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던 사찰을 없애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것을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려인 무학 자초가 활동한 것이다. 조선의 기틀을 만든 사람 중 하나가, 그리고 조선왕조 첫 왕의 최측근이 승려라는 것은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 삼았고, 불교를 적폐로 규정한 조선 왕조에서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까? 실제로 이러한 아이러니로 인해서 무학 자초는 조선 개창 초 유신(儒臣)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불교계 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들에 대해서는 향후 지면을 통해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무학 자초의 존재가 주는 아이러니를 통해 교육의 현주소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초중등 교육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외우고, 얼마나 많이 외웠는지에 따라 대학 진학이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쉴 틈 없는 암기 속에서 우리의 호기심은 봉인되고,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는 탐구의 기회는 제거된다. 그리고 봉인된 호기심으로 인해 이의를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침묵하고 복종하는 것에 더 익숙해진다. 교육이 바뀌는 것이 대입제도를 개선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우리의 인식을 모두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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