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흑백 같은 청년의 삶, 기성 세대 반성 필요”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흑백 같은 청년의 삶, 기성 세대 반성 필요”
  • 김동한 인턴기자
  • 승인 2020.02.08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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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취업‧주거 등 청년들의 빈곤한 현실 조명
공평한 기회 빼앗은 ‘부익부 빈익빈’ 사회
기성세대, 청년의 삶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
‘청년 빈곤’ 방치하지 말고 위기의식 느껴야
영화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동한 인턴기자】 지금의 청년들은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로 연애, 결혼, 인간관계, 꿈 등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들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이들은 극심해져 가는 취업난 속에 낮에는 학원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공부나 취업을 준비하고, 밤이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든다. 집을 떠나 홀로서기라도 하면 매달 수십만원에 달하는 월세에 허덕이고, 제대로 된 끼니조차 챙기기 어렵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궁핍한 청년들에게 그러한 기회는 사치가 돼버렸다.

우리 사회는 청년들의 빈곤한 삶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을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아닌 청년 개개인에게서 찾고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나아지기는커녕 정체되거나 도리어 도태되는 빈곤한 삶에 청년들 점점 희망을 잃고 지쳐가고 있다.

영화 <성혜의 나라>는 이러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암울하고 답답한 청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조명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당면한 취업 문제, 주거 문제, 성차별문제 등을 그대로 복사해놓은 듯한 주인공의 삶을 통해 청년 빈곤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흑백 영상으로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조성해 관객들이 객관적인 위치에서 성혜의 삶과 감정을 관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청년의 삶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하는 결말은 청년들의 삶을 방치하고 그들의 빈곤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언젠가 사회적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던진다.

본지는 지난달 31일 ‘청년 빈곤 문제’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접근한 정형석 감독을 만나 <성혜의 나라>가 사회에 던진 메시지와 청년 빈곤 문제의 근본 원인,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영화 <성혜의 나라> 촬영 현장 <사진제공 = 정형석 감독>

Q. 영화 <성혜의 나라>가 제작 2년 만에 극장가 문을 두드렸다. 소감이 어떤가.

감사하다. 독립 영화는 제작도 어렵지만 영화관 개봉도 쉽지 않다.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Q. <성혜의 나라>는 어떤 영화인가.

지금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고단한 청년들의 얘기다. 극 중 성혜가 처한 상황은 대부분의 청년들도 겪어봤을 보편적인 삶이다. <성혜의 나라>라는 제목에서 ‘나라’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20대 후반 청년들의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청년들의 삶을 방치해두면 미래에 사회적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Q. 20대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는데, 소재는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

‘고시원에서 자살한 청년’에 관한 기사를 보고, ‘아니 젊은 친구가 이렇게 죽을 수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층이나 노숙자에게선 종종 발생하는 일이지만 젊은 세대가 빈곤 때문에 자살하는 상황은 흔치 않아 관심을 갖게 됐다. 공연‧예술계 직업 특성상 젊은 친구들과 작업을 많이 하는데, 그 분야 청년들도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삶에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Q. 주인공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다. 상징하는 바가 있나.

예를 들어 10대에서 20대, 혹은 20대에서 30대로 연령대가 바뀔 때 겁도 나고 걱정도 많아진다. 그 불안감을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표현했다. 특히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특별하다. 20대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채 30대를 맞아야 하는데, 요즘에는 30대에도 확실한 기반이 잡혀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면을 부각하기 위해 성혜의 나이를 20대의 끝자락인 스물아홉으로 설정했다.

Q. 성혜가 여성인 점도 주목받는다. 청년 빈곤을 여성의 관점에서 다룬 이유가 있나.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의도는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등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런 문제를 영화에 표현하려다 보니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게 됐다.

Q.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

성혜가 신문 보급소 소장에게 가불받는 장면에서 조마조마했다고 하더라. 가불을 빌미로 보급소 소장이 성혜에게 수작을 부릴까 봐 그랬다는데 감독으로서 의도했던 장면은 아니라 신기했다. 아마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들이 있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힐링됐다는 관객도 있었다. 힐링 영화는 아닌데 성혜의 힘든 삶이 공감되고, 결국 마지막에 편한 삶을 살기로 한 성혜의 선택에 대리만족을 느꼈나 보다. 이 역시 의도한 건 아니지만 힐링됐다면 그것 또한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 <성혜의 나라> 촬영 현장 <사진제공 = 정형석 감독>

Q.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인데,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나.

성혜의 삶 자체가 흑백이다. 자식에게 의지하는 부모님, 철없는 남자친구까지 성혜가 웃을 만한 일이 없다. 컬러는 정보를 주기 때문에 어두운 성혜의 삶에 오롯이 다가가기 어렵다. 컬러였다면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성혜가 웃을 일 없고 무표정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성혜를 웃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강아지다. 성혜가 강아지를 보고 웃는 장면 마저 없었다면 관객들은 숨 막혔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엔딩이 판타지적으로 보여야 했다. 흑백이 판타지적인 면을 잘 소화할 수 있어 골랐다. 음악을 넣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다.

Q. <82년생 김지영>과도 비교해 평가되기도 하는데.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 인식의 문제라면 <성혜의 나라>는 국가 제도의 문제다. 냉정하게 보면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은 그나마 결혼‧육아 등 기본 생활은 영위하며 산다. 하지만 성혜는 그런 기초적인 생활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성혜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두 작품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

Q.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말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떤 메시지를 담았나.

기성세대가 성혜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파격적인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이러한 판단을 내렸기에 파격적으로 보이는 것 뿐이다. 영화 말미 성혜가 “나 좀 편하게 살래 나 이렇게 살아도 누가 나한테 뭐라고 안 하겠지”라고 말한다. 성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산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만약 모든 청년들이 성혜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아마 이 사회는 힘들어질지 모른다. 농촌을 예로 들면, 농촌이 활력을 잃은 이유는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주하며 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비슥한 맥락에서 청년 세대가 일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농촌과 같은 결말을 맞을 수 있다.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Q. 정 감독의 자전적 사례가 영화에 소재나 대사가 된 것이 있나.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 지하방 살이, 공황장애 등 경험이 영화 소재로 쓰였다. 성혜가 그동안 누적된 스트레스와 임신에 대한 공포로 공황장애를 앓게 되는데, 나도 40살에 공황장애가 왔다. ‘지금까지 나는 뭘 했나’,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등 고민으로 불안감이 생긴 것 같다. 평소 낙천적인 성격인데도 그런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쌓였다. 이러한 경험이 영화에 녹아있다.

영화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투데이신문
영화 <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투데이신문

Q. 정 감독 세대의 청년의 삶, 지금 세대 청년의 삶을 비교한다면.

나도 청년일 적엔 지금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다. 다만 민주화를 경험한 우리 세대와 산업화를 경험한 이전 세대는 개인의 삶보다는 사상과 거시적인 명분을 추구했고,  그 속에서 낭만이나 꿈을 좇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한 경쟁 사회가 되다 보니까 이러한 것들이 없어졌다. 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Q. 청년의 삶이 어쩌다 이렇게 빈곤해지게 됐다고 생각하나.

‘부익부 빈익빈’ 문제가 크다. 자본의 쏠림 현상이 심해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몰리고 서열문화가 만들어져 삭막해졌다. 이로 인해 경제 상황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빈곤해졌다. 사회에서 인간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가난해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최소한 인간적이면 삶 자체가 팍팍하진 않다

Q. 여러 빈곤 문제 중에서도 청년 빈곤은 사회적, 특히 기성세대의 공감을 잘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청년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청년들에게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너희 힘으로 알아서 살아라’라고 말한다. ‘청년 빈곤’이란 말 자체에서 주는 어색함도 있다. 청년 문제는 인식 문제가 아닌 국가 시스템의 문제다. 그대로 놔두면 국가 미래가 어려워진다. 국가의 시스템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을 해봐야 한다. 정치인이나 국가 정책 입안자가 이 영화를 보고 심각한 위기를 느꼈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정치인들을 초대해 영화 관람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어렵게 됐다. 아쉬운 대목이다.

Q. 이 영화를 기성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는지.

청년들을 방치하지 말고 힘 내게끔 도와야 한다. 청년 빈곤 문제가 해결돼야 저출산, 비혼, 등 사회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기성세대인 나조차도 출산과 육아를 고민하는데 청년 세대는 어떻겠나. 기성세대가 청년 빈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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