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대상포진에 걸렸던 적이 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일이다. 

나는 전공이 도예였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방학엔 학교에서 졸업전시회 준비를 하느라 집에 가지 않고 지냈다. 선배가 차린 회사에 취업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방학 때 미리 바짝 작업을 해 두면 가을엔 취업계를 내고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마지막 학기엔 돈을 벌면서 학비 외에 드는 하숙비나 생활비 등을 아낄 심산이었다. 

내가 살던 하숙집은 원래 학기 중에만 학생을 받고 방학 땐 하숙을 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나갔는데 양해를 구하고 홀로 남은 입장이라 방학 동안 방 값만 내고 식사는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주방기구는 전기 주전자가 유일했다. 처음 며칠은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지만, 이내 돈도 아낄 겸 식사를 부실하게 하다가 결국 하루 두 끼를 모두 컵라면으로만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젊음을 방패삼아 먹는 걸 대충 넘긴 탓도 있다. 그러나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에 부모님께 손 내밀기 뭐해서 주머니가 얄팍한 이유가 가장 컸다. 식당에서 한끼 식사에 지불할 돈이면 인스턴트 라면으로는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 물론 부모님께는 잘 먹고 잘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자 몸이 시름시름 안 좋아졌다. 심한 몸살 감기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데 막상 기침은 안 나왔다. 대상포진이었다. 대상포진은 어렸을 때 들어온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 속에 남아있다가 훗날 몸이 약해지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다시 활동하는 병이다. 신경계를 따라 몸 여기저기에서 작은 수포 알갱이가 띄엄띄엄 줄을 지어 올라왔다. 다행히 초기라 치료받고 약을 먹어서 금세 회복했다.

몸이 건강하면 대상포진에 잘 걸리지 않는다. 돈 아끼려다가 몸만 상하고 계획에 없던 약값을 들인 셈인데, 나는 그나마 뭘 사 먹을 돈이라도 있었으니 그 정도에 그친 것 같다. 돈이 부족하다곤 해도 내 경우엔 정 상황이 안 좋으면 도움을 요청할 가족이 있었다. 생존이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하숙집 주인에게 그저 숟가락 하나만 더 놓아주시면 안되겠냐고 간청하지 않아도 됐다.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않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나보다 더 가난했던 친구,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과 학생들은 전공이 도예이니 늘 흙과 씨름을 하느라 육체노동 상태에 있었고, 작업의 특성상 들이는 시간도 일정치 않아 들쭉날쭉 했다. 그런데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면 아르바이트업무와 전공작업 가운데 잠시 제쳐 두어야 할 것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

삶이 빈한하면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인다. 그럴 땐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일부 중에 포기할 것이 생긴다. 당사자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족 중 누군가가 대신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환경조차 뚫고 나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의지와 능력을 가진 건 아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자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확진자가 생겨나자 여러 소란이 일었다. 그 중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배달직종 노조가 중국인 밀집 지역에 배달업무를 금해 주거나 위험수당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을 향한 여론의 반응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배달노조에게 비판적이었다.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바탕에 있는 것 아니냐는 쓴 소리들이 빗발쳤다. 해당 노조의 상급 조직에서도 반대성명을 냈다. 

당연히 혐오와 차별을 타파하자는 건 백번 해도 모자람이 없는 옳은 소리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잠복해 있던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피부 위로 수포를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의 신체든 사람이 모인 사회든 건강할 땐 병증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든 건강을 잃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가장 허약한 부위부터 증세가 발현된다. 그곳은 대개 그 증세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던 곳이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배달업이 정보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달업 일선 종사자들이 다른 직군들에 비해 안정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감정도 비용으로 불리는 시대에 사람들의 귀찮음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직종에서 일한다는 건 자기감정의 충족을 제쳐 두는 일이다. 상시적인 생존위협으로부터 받는 불안감을 자신의 정서적 충족감과 맞바꿔 수익을 얻는 것이다.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사회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평소 이런 감정을 묻어두고들 산다. 그건 내부든 외부든 위험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언제든 위험이 현실화되면 불안과 직면해 있는 가장 허약한 계통을 따라 증세가 올라온다. 신경계를 따라 올라온 대상포진 수포처럼.

배달노조의 요구는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잠재해 있던 혐오 정서의 일부분을 보여준 게 맞다. 그러나 그 요구는 생존의 전장에선 언제나 적대적인 환경을 상징하는 대상을 찾으려는 감정이 웅크리고 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수면 위로 올려냈을 뿐이다. 대중의 감정은 잠복해 있다가 허약할 때 수포를 밀어 올린다. 그럴 때 사회는 유무형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누군가는 직접 몸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개 사람들이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건 몸으로 견딜 수 있는 저지선까지다. 물질적 손해를 몸으로 대신 때우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심리적인 방어선이다. 그 즈음에 닿으면 견디는 게 아니라 생존의 갈급함과 비교해 덜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건 두려움과 삶의 일부를 맞교환 해가며 버티는 것이지 자의적인 선택으로 하는 도전이 아니다. 이미 패배한 상황에 시나브로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런 삶이 지속되면 포기의 체화는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올바름을 위해 그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럼에도 올바름의 대가를 다는 저울의 추는 왜 늘 쫄리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기울어져야 하는지, 그 질문마저 올바름을 이유로 묻어두는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인지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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