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UN Women
역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성별. 총 453명 중 여성 감독은 5명으로 1.1%에 그쳤다. <사진출처 = UN Women>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지난 9일(현지시각)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올랐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생충>의 수상 소식에 주목했지만, 이번 시상식에서 또 다른 이슈로 주목을 받은 이가 있습니다. 바로 <우먼 인 할리우드>에 출연한 배우 나탈리 포트만입니다.

시상식에 참석한 나탈리 포트만은 검정 망토를 두르고 레드카펫을 밟았습니다. 그의 검정 망토에는 <작은 아씨들>의 감독 그레타 거윅, <허슬러>의 로렌 스카파리아, <더 페어웰>의 룰루 왕 등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여성 감독들의 이름이 금색 자수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특히 <작은 아씨들>은 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음악상, 의상상, 분장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그레타 거윅 감독은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번 시상식의 감독상 후보는 <아이리시맨>의 마틴 스콜세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쿠엔틴 타란티노, <조커>의 토드 필립스, <1917>의 샘 멘데스, <기생충>의 봉준호 등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나탈리 포트만은 LA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망토에 대해 “훌륭한 작업을 해냈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을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나탈리 포트만은 지난 2018년 1월 7일 열린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감독상 부문 후보를 소개하면서 “전부 남성 후보들이네요(And here are the all-male nominees)”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1929년부터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번 시상식까지 총 92회 진행됐습니다. 감독상 후보에는 총 453명이 올랐는데, 이 중 여성 후보는 단 5명(1.1%)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성 감독이 처음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것은 지난 1977년으로, <세븐 뷰티스>의 리나 베르트뮐러 감독이 최초입니다. 이후 1994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2004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습니다.

지난 2010년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며 아카데미의 유리천장에 균열이 나는 듯 했지만, 이후 여성 감독이 후보에 오른 것은 2018년 <밤과 주말>의 그레타 거윅 감독뿐이었습니다.

유엔 여성기구(UN Women)도 지난 1월 16일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며 “올해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 후보에 여성은 오르지 못했다”며 “역사상 5명의 여성만이 이 상의 후보에 올랐다”고 밝혔습니다.

감독상 후보에 오른 남성 감독들도 분명 뛰어난 감독들입니다. 하지만 92회가 진행되도록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이 5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최근 수년간 이른바 ‘화이트 오스카(White Oscar)’ 논란을 겪어왔습니다. 지난 2015년 여성과 남성 주연·조연상 후보 배우 20명에 모두 백인이 오르면서 백인 중심의 시상식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이죠.

이를 의식해서인지 지난해 2월 24일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멕시코 이민자 출신인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감독상을 받고, 이집트 이민자 가족 출신인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말렉이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의 이름을 ‘국제영화상’으로 바꾸고, 봉준호 감독이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작품상을 받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리천장은 아직도 견고한 듯 보입니다. 인종 이슈를 넘어선 아카데미, 이제는 유리천장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만큼 유리천장이 타파되고 성별을 넘어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시상식이 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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