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필자가 실수한 것이 있다. 그 실수는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 편에서 “청한자”라는 호가 있다는 것에서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의 도교와 관련된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만큼 차후에 소개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지면을 통해 그 약속을 조금이나마 이행해보고자 한다.

김시습은 조선 도교의 개조(開祖), 즉 조선 도교의 맥에서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사상사에서 중국의 사상 혹은 종교으로서의 도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 멸망 직전의 막리지(총리)이자 실권자였던 연개소문(?-665)은 과도하게 커진 불교계를 견제하기 위해 도교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그리고 이로 인해 고구려의 승려가 신라로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국 송대(宋代)의 서긍이 고려에 다녀간 후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가 신선의 고장과 가까워서 고려 사람들이 장생불사의 신선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이 개창되면서 성리학의 벽이단(闢異端), 즉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한 사상을 배척하는 태도로 인해 불교와 도교는 일정부분 통제를 받았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지배층이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김시습은 조선 도교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1) 그러나 도교와 비슷한 풍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국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대문장가이자 사상가였던 최치원은 우리의 전통적 사상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에 도교의 경우 소격서(昭格署)와 같은 도교에 관한 국가 기관이 상당 기간 존재하는 등 일정 시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시습에게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사건은 큰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지면을 통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발생한 후 승려가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다른 연구에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도교에 입문했다는 주장이 있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따르면 김시습은 고려 때 중국 원(元)에서 고려로 귀화한 설현(偰賢)으로 알려진 설도인이라는 사람에게 도교의 도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김시습과 설도인의 만남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몇 년 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설도인은 김시습의 수련에 대한 소질을 발견하고 수련을 권유했으나, 당시까지 김시습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속세에 대한 거부감으로 팔도를 떠돌던 김시습이 한계령에서 설도인을 다시 만났고, 이 때 설도인으로부터 도교의 핵심을 전수받았다는 것이다.2)

김시습의 사상은 몇 차례 밝혔지만 유, 불, 도를 넘나들고, 그 안에는 자주적 사상이 있다. 특히 도교에 집중해서 살펴보면, 김시습은 그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취유부벽정기」에서 단군이 신선이 됐다고 설정하고, 단군조선과 중국 은(殷)을 이들을 멸망시킨 위만조선과 주(周)와 대비시키고 있다. 이것은 김시습의 도교적 측면에서 자주성이 드러남이 확인되는 장면이다.3)

또한 김시습의 죽음의 과정도 김시습의 신선의 모습이 나타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쓴 『김시습전』에 따르면, 그의 뜻은 공문도(空門道), 즉 승려임을 밝히면서도 수련, 다른 말로 연연양생술(延延養生術)에 전념할 뜻을 굳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사후 3년이 지난 그의 시신에 대해 ‘안색이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수련도교의 수련의 결과에 의한 시해선(尸解仙), 즉 평범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신선이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4) 죽는 순간 신분이 승려였고, 사후 부도를 조성했다는 것은 김시습이 승려였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김시습이 유언으로 화장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3년이 지나서도 사체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전설(傳說)은 김시습의 신선으로서의 모습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이와 같은 기록이나 주장들은 김시습이 도교의 신선의 삶을 추구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근거가 된다. 아울러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의 순간, 김시습의 죽음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김시습의 신선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김시습이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를 넘나들었던 모습이다.


1) 임채우, 「17세기 조선 교의 탈중화의 이념적 전환-양란 이후 유교 중화주의 세계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도교문화연구』, 제50호, 한국도교문화학회, 2019, 95-96쪽.
2) 정재서,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257쪽.
3) 정재서,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257쪽.
4) 양은용, 「朝鮮時代 修鍊道敎의 生命觀 – 淸寒子 金時習의 『雜著』를 중심으로」, 『도교문화연구』, 제12호, 한국도교문화학회, 1998,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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