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타오른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나일강 변에서 피어난 불멸의 사랑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AIDA)’가 아쉬운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토니상 4관왕에 그래미상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 수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뮤지컬로, 2019년 11월부터 시작된 이번 한국 공연은 2005년 8월 LG아트센터 초연 이후 다섯 번째 무대다. 브로드웨이 무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생생함과 더불어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도전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공연이 이어질 때마다 변함없이 꾸준한 사랑을 받은 작품이지만 오리지널 프로덕션인 디즈니 씨어트리컬이 브로드웨이 버전 공연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모두에게 끝인사를 전하게 되었다. 디즈니가 최초로 제작한 성인 대상 뮤지컬로, 전쟁의 한복판에 선 주인공들이 자연스레 이끌린 감정에 혼란을 겪으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모습은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겼다.
뮤지컬 ‘아이다’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 오페라 ‘아이다(1871)’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오페라 ‘아이다’ 역시 전 세대를 아우르며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명작으로 방대한 규모와 화려한 무대, 뚜렷한 선율과 극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음악을 담고 있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해 작곡된 이 가극은 힘찬 트럼펫 소리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전하는 ‘개선 행진곡(Triumphal March)’으로도 익숙하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사건의 중심이 된 상황 전개와 인물 구도는 두 작품 모두 유사하다. 다만 등장인물의 비중과 갈등 요소에 큰 차이를 가진다. 뮤지컬로 제작되면서 조세르, 메렙 등 주변 인물을 더하고 현대적 감각을 확실하게 가미한 덕분에 음악은 물론 구조적인 측면부터 극의 분위기까지 모두 새롭다. 우선 오페라에서는 아이다의 조국이 에티오피아로 설정돼 있지만 뮤지컬은 누비아다. 시작부터 암네리스와 아이다, 라다메스의 관계가 이미 명확하게 나타난 원작과 달리 뮤지컬에서는 그들이 운명처럼 엮이게 된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준다. 또, 아이다가 상당히 호기심 많고 당찬 인물로 그려지면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탄생했다. 그는 더 이상 라다메스를 설득해 이집트 군사 기밀을 알아내라는 아버지의 말에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아이다가 아니다. 암네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다소 철없는 모습을 보였던 한 나라의 공주가 파라오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를 이끌 여왕으로 점차 성장하게 되는 모습은 작품의 결말에도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도록 한다. 실제로 뮤지컬 ‘아이다’ 창작진 역시 원작 오페라를 연상시키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뮤지컬은 이렇게 비슷한 듯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디즈니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뮤지컬만을 위해 만든 작품은 ‘아이다’가 처음이다. 초호화 크리에이티브 팀은 상상 이상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여기에는 디즈니 대표작 ‘라이온 킹(The Lion King)’을 세계적인 성공신화로 이끈 듀오, 팝의 거장 엘튼 존과 뮤지컬 음악의 대가 팀 라이스의 협력도 뒷받침됐다.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록, 가스펠, 발라드 등 장르를 넘나든 넘버는 현대 뮤지컬이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됨의 극치다. 덕분에 뮤지컬 ‘아이다’를 보면 이 작품만이 가진 특별한 힘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EVERY STORY IS A LOVE STORY’로 전설처럼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한 관객은 ‘ANOTHER PYRAMID’를 만나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름다운 암네리스가 ‘MY SRONGEST SUIT’를 부르며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은 드레스로 화려한 패션쇼를 펼치는 모습 역시 경쾌하고 눈부시다. 이후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ELABORATE LIVES’를 노래할 땐 잠시나마 아찔한 느낌이 든다. 이집트 포로로 끌려온 누비아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THE GODS LOVE NUBIA’는 아이다의 당찬 외침과 함께 강렬하게 각인된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눈치챈 암네리스가 ‘I KNOW THE TRUTH’를 부르는 장면에선 안타까운 마음에 작은 탄식마저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힘이 넘치면서도 절도있는 안무 또한 뮤지컬 ‘아이다’를 더욱 화려하게 빛내는 요소다. 박자에 맞춰 손끝 하나까지 정확하게 표현된 인물의 심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특히 앙상블의 군무는 예술 그 자체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대중성을 가미한 춤에 스타일리시한 감각이 어우러지며 작품의 모든 것을 더 돋보이게 했다. 실제로 뮤지컬 ‘아이다’ 앙상블은 쟁쟁한 후보들을 누르고 지난 1월 20일에 열린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앙상블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빛과 색채의 조화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눈부시게 화려한 색감은 무대 위에 생동하는 에너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림자의 활용도 돋보인다. ‘아이다’를 보다 보면 필요에 따라 무대 세트를 최소화해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연출한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이는 놀랍게도 무대가 비었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오히려 인물들의 움직임을 더 크고 돋보이게 만든다.
지극히 현대화된 의상은 선과 색이 확실하다. 뮤지컬 ‘아이다’에 등장한 모든 의상 디자인을 보면 특정 시대나 국가를 떠올리게 하기보다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무려 18벌이나 갈아입는 암네리스의 드레스는 흔히 생각할 법한 이집트 공주나 여왕의 의상이 아니라 굉장히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의상들로 준비됐다. 특히 화려함의 정점을 찍는 초반 드레스룸 신 의상들은 피라미드나 뱀, 투탕카멘 등 각각 이집트를 떠올릴 만한 요소를 담은 데다 독특한 소재와 와이어를 활용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의상들로 제작됐다. 비록 노예로 붙잡혀 왔지만 누비아의 공주로서 늘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아이다 의상의 경우 눈에 띄게 선명한 색감의 실크 저지 원단을 사용해 품위를 살렸다. 이 밖에도 인도 네루 스타일의 각진 롱코트나 린넨 소재로 제작된 의상들도 인상적이다. 이 모든 것의 어울림은 상상의 세계를 환상적인 무대로 구현한 최고의 무대 디자이너, 밥 크로울리의 노력 덕분에 완성될 수 있었다.
뮤지컬 ‘아이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집트관에서 만난 세 주인공이 그들의 인연이 시작됐던 과거로 돌아가 본격적인 스토리를 펼치는 형식을 취한다. 암네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묘하게 자꾸만 스치는 두 남녀의 시선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이끈다.
이집트와 이웃한 누비아는 끊임없는 전쟁 속에 위협받으며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던 중 누비아 공주 아이다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오게 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의 노예가 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다른 이미지로 각인된 아이다는 어느새 라다메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고, 아이다 역시 적국의 장군이지만 매력적인 라다메스에게 점차 마음을 빼앗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암네리스는 약혼자인 라다메스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파라오의 왕좌를 노리며 야심을 키우던 라다메스의 아버지 조세르도 라다메스의 결혼을 종용하지만 그에겐 오직 아이다 뿐이다. 커져만 가는 마음을 거부하지 못한 아이다도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만, 조국인 누비아를 저버리지 못한다. 한 나라의 장군과 각국을 대표하는 공주이기에 앞서 그들 역시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중대한 선택의 길에 놓인 인물들은 혼란스러운 가운데 가장 자신다운 선택을 하게 된다.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인 뮤지컬 ‘아이다’는 내일 23일 서울 공연을 마무리하고 4월 19일 부산 공연을 끝으로 그간의 길었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전 세계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를 한국에서 하게 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돌이켜보면 뮤지컬 ‘아이다’는 여러 면에서 선진적인 작품이었다. 칼럼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아이다의 당찬 외침이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기분이 든다. 운명적 사랑에 기반을 둔 그의 의지는 강건히 뿌리를 내려 세대를 관통하는 삶의 중대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쯤 더 생각해보게 만든다. 아이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현실에 맞춰 변모하는 것 또한 더없이 매력적이다. 모든 인물이 ‘성장’에 중점을 두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기보다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은 마치 앞으로 새로이 제작될 뮤지컬의 중심 가치가 어디에 중점을 두게 될지를 예견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지도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긴 아이다와 라다메스, 점차 알을 깨고 나와 당당히 홀로 선 파라오 암네리스의 성장은 오래도록 잔잔한 파동을 남긴다.
뮤지컬 ‘아이다’가 한국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은 이유에는 정서적 공감대의 형성 역시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이집트에 침략당한 누비아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역사가 겹쳐지며 더 마음이 간다. 끝까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은 아이다와 누비아인들의 굳센 의지는 과거 우리 민족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결국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따스한 끝인사를 전하는 뮤지컬 ‘아이다’. 오래도록 준비한 작별이지만 여전한 아쉬움에 차마 안녕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복잡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아이다’는 항상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기억되리라 믿는다.
오는 3월 20일부터 4월 19일까지 예정돼 있던 뮤지컬 <아이다> 부산 공연은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 대책에 따라 2월 25일부로 전면 취소됐습니다.
관련기사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기대감으로 가득한 동행의 시작…2020 판타스틱 뮤지컬 콘서트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장르 전환으로 재탄생한 고전, 행복의 가치를 외치다...뮤지컬 ‘웃는 남자’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함께 할까요?” 무대와 객석의 극적인 만남...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진실한 사랑의 가치...첫사랑은 영원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뮤지컬 ‘레베카’
- [최윤영의 인터뷰(Inter:view)] 매회 역대급 공연을 예고한 뮤지컬 ‘아이다’, 그랜드 파이널 시즌에 걸맞은 위엄 선봬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핏빛 복수극...불협화음이 주는 특별한 매력, 뮤지컬 ‘스위니토드’
- [최윤영의 인터뷰(Inter:view)] 7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마법같은 공연 펼쳐질 것”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같은 이니셜(M.A), 완전히 다른 삶...화려함 뒤에 감춰진 찬란한 슬픔의 노래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신이 주신 운명에 맞서는 벤허의 고뇌와 희생, 대작으로 거듭난 명작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세상에서 가장 소름 돋는 고백, “난 당신의 No.1”...연극 ‘미저리’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그녀가 바란 것은 단지 행복, 그뿐이었습니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모든 청춘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새롭게 태어난 뮤지컬 ‘그리스’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낯설지만 강력한 매력, 전설에 스타일을 더하다...뮤지컬 ‘킹아더’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삶의 경계에서 사랑을 말하다…연극 ‘자기 앞의 생’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경이로운 세상으로의 초대, 뮤지컬 ‘라이온 킹’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기대 이상의 감동, 신화는 계속 된다…뮤지컬 ‘지킬앤하이드’
-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오랜 기다림, ‘그댄 내 삶의 이유’...뮤지컬 ‘드라큘라’
- [최윤영의 딥 리뷰(Deep Re:view)] 불멸의 명작, 클래식은 영원하다...뮤지컬 ‘오페라의 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