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동한 인턴 기자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3)

【투데이신문 김동한 인턴기자】 대한민국은 ‘꼰대 공화국’이라고 불린다. 몇 년 전부터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꼰대는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됐다. 자가 꼰대 점검표, 갑질 꼰대 퇴치법 등도 등장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엔 영국 BBC에서 꼰대를 소개하기도 했다. 수출까지 이뤄낸 셈이다.

최근엔 ‘젊은 꼰대’도 등장했다. 젊은 꼰대는 권위적인 대학 선배나 직장 상사를 비꼴 때 쓰이는데 기성 꼰대보다 더하다는 평가도 있다. 대학생인 기자는 젊은 꼰대를 익명을 사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주로 발견한다. 이곳에서 후배들은 “우리 동아리 꼰대 많아요”, “알바하는 곳 사장님 젊은데도 꼰대인 듯” 등 포착된 꼰대를 제보하고 댓글을 주고받으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하지만 기성 꼰대와 달리 젊은 꼰대는 인식 여부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성 꼰대는 자신 스스로 꼰대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다 그렇진 않지만 젊은 꼰대 중에선 자신 스스로 꼰대임을 인식하고 자처하는 부류도 있다. 이들은 커뮤니티에 “나 때는 말이야”, “꼰대 같겠지만”, “이거 불편해도 상관없지?” 등 접두사를 붙이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댓글 반응이 좋을 리가 없다.

자신의 불편함만 호소하는 쪽도 있지만 ‘꼰대 놀이’를 즐기는 젊은 꼰대들도 있다. 이들은 유튜브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너넨 이거 모르지”라며 양준일 등 핫했던 옛날 가수를 소환하거나, 인스타그램에 ‘00년생까지만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글을 게시해 자신들의 추억을 공유한다. 일종의 ‘추억 팔이’인데, 이는 어린 세대에게도 반응이 좋은 편이다. 어린 세대에게 동떨어진 ‘무용담’이 아닌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읽힌 덕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꼰대를 콘텐츠로 활용하는 사례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광고나 예능, 드라마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데, ‘나 때는 말이야’를 ‘라떼 이즈 홀스(Latte is horse)’로 바꿔 표현한다거나 방송에서 꼰대 짓을 하는 선배에게 후배가 대놓고 “아 꼰대네”라며 지적한다는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삭막하고 딱딱했던 꼰대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꼰대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펭수’와 ‘뚝딱이’ 신드롬도 마찬가지다. 두 캐릭터는 각각 오늘날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세대에게 인기가 있다. 펭수는 권위적인 꼰대와 갑질 문화에 대해 사이다 발언을 던진다. 평소 젊은이들이 직장 상사와 대학 선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대변해줌으로써 젊은이들은 펭수에게 환호했다. 뿐만 아니라 펭수의 인기는 기성세대까지 뻗어 나갔고 펭수는 ‘국민 스타’가 됐다. 이에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주의 문화에 대한 문제 인식이 싹텄다. 근래엔 정치권에서도 ‘펭수 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반면 뚝딱이는 과거에 ‘EBS 개국공신’으로서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 이런 뚝딱이 앞에 나타난 건 국민 스타 펭수였다. 뚝딱이는 펭수에게 “나 때는 말이야” 등을 언급하며 조언해주려 하지만 펭수는 이를 괴롭힌다고 느낀다. 세대 간 갈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뚝딱이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운동도 하고 전단지도 돌려보지만 체력과 능력의 한계에 부딪힌다. 펭수를 통해 오랜만에 뚝딱이를 접한 젊은이들은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뚝딱이’라고 부르며 연민을 느낀다. 또한 기성세대들은 위에서는 쪼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 처한 뚝딱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두 세대가 하나의 캐릭터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순간이다.

두 캐릭터는 세대 간 쌍방향적인 소통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젊은 꼰대의 꼰대 놀이와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적이 아닌 콘텐츠로서 세대 간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의 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꼰대의 꼰대 놀이에 펭수, 뚝딱이의 역할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통해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찐(‘진짜’의 줄임말) 꼰대에겐 이 역할을 기대할 수 없지만 말이다.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세대는 각자 다른 길로 나아간다. 세대 간 갈등의 심화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오히려 세대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틀에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젊은 꼰대의 탄생이 세대 간 분화에서 세대 내 분화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젊은 꼰대의 꼰대 놀이를 그렇게만 바라볼 수 있을까. 오히려 젊은 꼰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그들이 던진 꼰대 놀이에서 때론 펭수가 되고 때론 뚝딱이가 돼보면 어떨까. 꼰대 공화국의 새로운 길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젊은 꼰대에 이 역할을 기대해본다. 후일 젊은 꼰대의 탄생이 꼰대 공화국 역사의 변곡점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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