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고려 말 조선 초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더불어서 유교와 불교가 교체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1)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당연한 것이었을까? 성리학은 승려와 사찰이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서 농장을 확대하고 사치를 부린다는 등의 부패를 지적했다. 이것을 통해 성리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당위와 명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1000년이 넘게 백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됐고,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를 한 번에 위축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학은 고려의 불교를 유지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대표적인 활동이 회암사의 중건과 지공(指空. ?-1363)과 나옹(懶翁, 1320-1376)에 대한 추념 사업이었다. 특히 지공은 인도 출신 승려로 선(禪)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승려로 손꼽히던 사람이고, 나옹은 원(元)의 승려로 우리나라의 불교 법맥 중 하나의 시조(始祖)로 평가받는다. 무학이 배우고 수행한 불교가 당대 최고의 승려로부터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업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 중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무학은 원(元)에서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도를 인가 받고, 서산에서 2년간 나옹과 머물면서 나옹의 계승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특히 무학과 나옹은 원의 임제종 고승인 석옥 청공(石屋 淸珙, 1272-1352. 역시 원[元]의 승려였다.)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는데, 계파가 다른 지공의 선사상도 수용한 것이다. 무학은 나옹과 고려 곳곳을 동행했으나, 보우와 신돈이 고려 불교계를 주도할 때 무학은 곡산 고달사 등을 유력(遊歷)했고, 나옹은 청평사의 주지로 재임했다. 그러던 중 지공이 입적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지공의 유골이 나옹에게 전해졌으며, 나옹이 직접 추념 불사를 주관했다. 그 이후 나옹은 고려 말의 불교계를 주도했고, 지공의 추념 불사부터 나옹의 고려 말 불교 주도에 제자인 무학도 함께 했다. 이후 나옹은 신진사대부 등 반대세력에 의해 추방을 당하고 신륵사 근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이 가운데 나옹이 입적한 과정은 다음 기록에서 추론할 수 있다.

신 등은 또 듣건대, 전조(前朝)의 말기에 중 나옹(懶翁)이 있어서 허무적멸(虛無寂滅)의 가르침으로써 어리석은 무리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를 추대하여 ‘생불(生佛)’ 이라고 지목하여서, 천승(千乘-전쟁이 일어날 때 내놓아야 되는 수레의 수가 천 대라는 뜻으로, 제후를 뜻함. 필자 주.)의 존귀(尊貴)한 몸을 굽혀서 천한 필부(匹夫)에게 절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그 후로 기울어졌고 우리 유교가 점점 쇠퇴하였사온데, 다행히 도(道)가 있는 사람들의 힘을 입어 그 뿌리를 끊어 마침내 스스로 죽게 하였으니, 진실로 쇠퇴한 세상에서 하나의 큰 다행이옵니다.3)

이후 무학은 지공과 나옹의 추념 사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는데, 우왕 9년(1383) 묘향산 안심사의 법회가 절정이었다. 이 영향으로 조선시대까지 불교계는 물론이고, 유림(儒林)들까지도 지공, 나옹, 그리고 무학을 삼화상으로 추앙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무학은 나옹 입적 후 나옹과 지공의 추념 사업에 전념하면서 은둔수행을 이어갔다. 특히 무학이 머물거나 주지로 활동하고, 중건한 사찰이 60여개에 이르렀다.4) 삼화상의 개념이 성립되고, 유림까지도 삼화상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만드는데 무학의 노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암사는 지공이 2년 6개월간 고려에서 머물면서 두루 다닐 때 인도의 날란다 사원5) 과 같은 곳이라고 인정한 사찰이었다. 회암사는 14세기 무렵까지 국제적인 사찰로 명성이 높았으나, 그 후 퇴락해갔다. 그러던 중 우왕 즉위년(1374)부터 2년간 회암사를 대규모로 중창하게 되는데, 이것을 주도한 것이 무학이었다. 이 시기는 무학이 나옹으로부터 의발(衣鉢)을 전수받은 뒤였다. 그 후 무학은 나옹을 도와서 회암사를 중창하고 우왕 2년(1376) 낙성을 맞이했으며, 이를 기념하는 문수회가 성황리에 열렸다.6) 회암사의 중창은 불교의 힘이 갈수록 쇠퇴하는 상황에서 불교를 부활시키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무학은 한양 천도에 도움을 준 풍수도참에 능한 술승(術僧)라는 이미지, 그리고 이성계와 친밀한 권승(權僧)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무학은 그의 스승인 나옹과 지공과 함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불교계를 대표하고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사에서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왕사(王師)였다. 즉 나옹의 적통이자 이성계의 왕사였던 것이다.7) 실제 현대 불교계에서도 무학 자초가 법력이 높은 승려로 평가 받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학의 노력은 스스로 부패하고 이로 인해서 신진세력의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고려 불교를 지탱한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  황인규, 「무학대사의 조선건국 참여와 불교계 수호=제연구성과의 종합 검토와 재론 및 강조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 제25집, 역사교육연구소, 2017, 204쪽.

2)  황인규, 「무학대사의 조선건국 참여와 불교계 수호=제연구성과의 종합 검토와 재론 및 강조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 제25집, 역사교육연구소, 2017, 206-210쪽.

3)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1439) 4월 18일 을미 4번째 기사.

4)  황인규, 「무학대사의 조선건국 참여와 불교계 수호=제연구성과의 종합 검토와 재론 및 강조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 제25집, 역사교육연구소, 2017, 211-212쪽.

5)  날란다 사원은 인도에서 승려를 양성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이 있었던 불교의 성지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 명맥을 이으면서 불교의 존속에 기여했던 사찰이었다.

6)  황인규, 「무학대사의 조선건국 참여와 불교계 수호=제연구성과의 종합 검토와 재론 및 강조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 제25집, 역사교육연구소, 2017, 206-209쪽.

7)  황인규, 「무학대사의 조선건국 참여와 불교계 수호=제연구성과의 종합 검토와 재론 및 강조를 중심으로」, 『역사와 교육』, 제25집, 역사교육연구소, 2017,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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