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은 여전히 건재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서울 공연이 지난 3월 14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개막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해 공연 진행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지만 유령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극장을 지켰다. 일찍이 한국에서는 이미 많은 공연들이 중단되거나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고, 좀처럼 꺼질 줄 몰랐던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불빛도 지난 3월 13일(미 현지시간 기준)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가 500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이래 기약 없는 셧다운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유령의 무대를 손꼽아 기다렸던 관객들의 마음도 내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은 예정대로 서울에서의 여정에 닻을 올리게 됐다. 철저한 방역과 대비책도 함께였다.

부산 공연을 마친 뒤 잠시 개인적인 휴가 기간을 가졌던 배우들은 심기일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또 한 번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데다 한동안 신종 감염병이 확산세를 거듭하던 시기였기에 어쩌면 다시 한국행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했다. 이번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를 통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크리스틴 역 배우 클레어 라이언은 자신의 SNS에 “한국에서 예정된 공연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에 무척 감사하고 행운이라 여긴다”며, 한국의 방역시스템을 신뢰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유령 역의 조나단 록스머스는 이제 유령 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이 같이 가면(마스크)을 쓰게 된 특별한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서울 공연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프랑스 추리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1910년)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로 제작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흉측한 외모를 가면 뒤에 감춘 채 아름다운 파리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유령과 그가 사랑하는 신예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그리고 연인 크리스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라울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스토리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감성으로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지만, 뒤틀려버린 영혼을 가진 유령은 사랑을 쉬이 허락받지 못한다. 1986년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1988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30년간 계속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국내에서 2001년에 번안 뮤지컬로 첫선을 보였다가 2005년부터는 내한공연의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 작품상, 로런스 올리비에 최우수 인기 작품상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수상 이력과 기네스북 등재 이력 또한 남다르다. 지난 2012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한국을 찾은 후 무려 7년 만인 작년 말 부산에 상륙했고, 2020년 3월 서울에서 남은 여정을 시작했다. “단 하나의 뮤지컬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오페라의 유령’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장 클래식한 뮤지컬이자 대중적인 뮤지컬로 손꼽히며, 이미 영화와 연극으로도 제작된 적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어렵게 만났기에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작품,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이번 칼럼에서는 작품을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배경과 이번 월드투어만이 가진 강점을 소개해 본다.              

원작과 뮤지컬, 어떻게 다른가

‘오페라의 유령’ 작품 배경이 된 프랑스 국립 오페라 극장은 1875년에 개관된 ‘팔레 가르니에’로 흔히 ‘오페라 가르니에’라고도 불리는 극장이다. 이 극장의 지하에는 작은 배 하나가 뜰 만한 크기의 저수조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마치 유령의 은신처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유령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놀랍게도 작품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추락사고(1896년) 역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원작자인 가스통 르루는 이 모든 것에 영감을 받아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탄생시켰고, 이 소설은 다양한 각색을 거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완벽한 작품으로 제작돼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소설 자체만으론 당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감동을 배가시키는 아름다운 음악, 정상급 배우의 열연, 상상의 현실화가 만들어낸 하모니는 뮤지컬계 살아있는 전설로 전해진다.

원작 소설은 유령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추리 소설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뮤지컬은 러브 스토리에 집중했다. 유령의 잔혹함이 드러나는 공간 묘사도 대부분 생략됐다. 따라서 원작을 먼저 읽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게 된 관객이라면 전반적인 느낌이나 커다란 흐름은 비슷해도 두 작품을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 느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뮤지컬은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원작에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추가하고,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요소들은 덜어내서 새롭게 무대용 공연 콘텐츠로 탈바꿈한 것이다.  

등장인물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선 소설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던 마담 지리가 유령의 비밀에 한걸음 가까이 닿아있는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반대로 소설 중후반부에서 맹활약하는 페르시아인은 뮤지컬에 나타나지 않는다. 라울의 형인 필립 백작과 크리스틴의 후견인 발레리우스 부인도 마찬가지다.

또, 인물의 성격이 무척 다르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뮤지컬 속 크리스틴은 원작에서와 달리 유령의 유혹에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수동적으로 이끌린다. 하지만 2막 후반부로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때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과감하게 움직이는 인물이 된다.

여기에다 뮤지컬에서 ‘백마 탄 왕자’처럼 그려지는 라울이 소설에서는 다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한다. 혈기왕성한 어린 자작은 모든 면에 서툴고 급해 보이지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속 라울은 사랑하는 크리스틴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듬직한 신사로 나타나 여심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의 유령은 에릭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뮤지컬에서는 단 한 번도 유령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오페라의 유령’ 혹은 ‘유령’, 그리고 ‘음악의 천사’로 불릴 뿐이다. 유령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내용이나 결말 또한 다르다. 덕분에 뮤지컬 속 오페라 극장의 유령은 잔혹하기보단 좀 더 신비로우면서도 로맨틱하고, 동시에 두려운 존재로 인식된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세 가지의 오페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원작에선 이 같은 설정이 구체화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차이점으로 꼽을 수 있다. 1막 1장의 ‘한니발’과 9장 ‘일 무토’, 2막 4장과 7장 ‘돈 주앙의 승리’는 모두 뮤지컬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음악이 주가 되는 뮤지컬 장르에 맞춰 작품의 흐름과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구성된 오페라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면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싼다.

왼쪽부터 라울 역의 맷 레이시, 크리스틴 역의 클레어 라이언, 유령 역의 조나단 록스머스. ⓒ뉴시스/에스앤코
왼쪽부터 라울 역의 맷 레이시, 크리스틴 역의 클레어 라이언, 유령 역의 조나단 록스머스. ⓒ뉴시스/에스앤코

2019-20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강점은

뮤지컬계 두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주옥같은 음악과 해롤드 프린스의 연출로 완성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해 또 한 번 관객들의 마음을 설렘으로 물들인다. 역대급 규모를 자랑하는 이번 월드투어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작품의 전통은 지키면서 기술적 측면엔 진보를 더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펼치는 마법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다. 고이 잠들었던 샹들리에가 다시 날아오르고, 밝게 빛나던 샹들리에가 위협적으로 흔들릴 때면 극장엔 어느새 긴장감이 감돈다. 샹들리에의 움직임이 감지될 때마다 두근대는 심장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예고하는 듯하다. 공연을 위해 특수 제작된 이 샹들리에에는 6천 개가 넘는 비즈 장식과 LED 조명이 쓰였으며 안쪽 프레임을 알루미늄 소재로 만들어 무게를 줄였다고 한다. 덕분에 작동할 때에도 부담이 덜해져 속도감까지 챙길 수 있게 되었다. 1초에 약 3m정도 속도로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빠르진 않아도 충분히 실감 나게 보인다.

마리아 비욘슨의 화려한 의상 또한 매력적이다. 그는 시대적 감성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느낌까지 더해 작품에 극적인 느낌을 더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감각적인 유산을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 의상은 때론 로맨틱하면서도 강렬하고 눈부시게 ‘오페라의 유령’을 빛낸다.

서울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난 부산 공연에서 먼저 멋진 활약을 선보였던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번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공연에 함께한 배우들은 각자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어울림이 좋아서 더 조화롭다.

유령의 감정은 그새 더 깊어졌다. 영어 프로덕션 기준 ‘역대 최연소 유령’ 조나단 록스머스는 익숙한 유령의 이미지에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보다 특별한 유령을 만들어냈는데 좀 더 섬세하고 애처로운 느낌이 강해졌다. 갖지 못할 사랑에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크리스틴의 손길이 닿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령의 모습을 보다 보면 어느새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이 고인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즈’ 클레어 라이언도 변함없는 감성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노래와 청아한 음색, 여린 듯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움직임이 여전히 돋보였다. 사랑의 감정은 낯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한데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고 세심하게 전달된다.    

온·오프 브로드웨이를 넘나들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온 맷 레이시의 라울은 이상적인 라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가 오디션장에서 직접 선발한 배우로도 알려진 맷 레이시는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음성으로 중심을 지켰다. 한국 월드투어를 앞두고 매일 도전하는 마음과 배워간다는 생각으로 임하겠단 의지를 밝혔던 맷 레이시는 그가 다짐한 대로 자신과의 약속을 확실히 지켜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 최윤영(공연 칼럼니스트/아나운서)
▲ 최윤영(평론가/아나운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고전이 선사하는 특별함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서울 공연은 명작이 가진 고유의 매력에 나날이 특별한 가치를 더해가며 순항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시작되자 힘찬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비록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어느 때보다 뜨거운 환호도 함께였다. 배우들은 쉽지 않았을지 모를 발걸음을 해 준 관객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 배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무대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미소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던 배우들의 눈엔 반짝임이 맺혔다.

전례 없는 위기에 모두가 힘들고 지쳐가는 이때, 어렵게 성사된 약속임을 알기에 더 소중하다. 황홀한 낭만으로 가득한 유령의 마법은 잠시나마 어려운 현실에 따스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서울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과 관객 안전을 위해 다양한 조치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매일 철저한 방역과 소독이 이뤄지며, 사전에 통제되지 않은 모든 출입구에는 열 감지 화상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전 관객을 대상으로 체온 측정 모니터링도 함께 진행됩니다. 극장 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체온 측정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경우에는 출입이 제한되니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또, 모든 관객은 공연 중에도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의무화됩니다. 외부 음식 반입이나 관객과 배우의 만남 역시 철저하게 통제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관람을 위한 노력에 반드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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