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아킬레스는 달리기가 무척 빨랐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니 평범한 인간의 속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아킬레스도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유명한 역설이 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 보다 10배 빠르다고 가정하자. 거북이는 느리니까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도록 해준다. 경기가 시작되고 아킬레스가 100미터를 달려가는 사이 거북이는 10미터 전진해 있다. 아킬레스가 10미터를 더 달리면 다시 1미터 앞에, 1미터 더 달리면 0.1미터 앞에 거북이가 있다. 이러면 둘의 거리는 무한하게 좁혀질 뿐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이 주장한 역설이다. 우리는 당연히 아킬레스가 어느 순간 거북이를 추월하리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수학공식을 이용하면 추월 지점과 시간까지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밝히는 일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많은 학자들을 괴롭혔다. 이 문제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천재수학자 칸토어의 무한집합론으로 풀렸다.

물론 증명에만 2500년이 걸린 골치 아픈 수학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떠올린 건 코로나19 방역 때문이다. 전염병과 싸워 온 인류의 역사는 마치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의 달리기처럼 보인다. 방역 아킬레스는 늘 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데 전염병 거북이는 너무 빠르게 달린다.

인류는 그간 속도 경쟁 대신 경주가 벌어지는 지역을 봉쇄해서 거북이가 달리지 못하도록 해 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특징인 도시화와 교류량의 증가는 전통적인 지역봉쇄를 어렵게 만든다. 한국이 취한 방법은 아킬레스의 달리기 속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하긴 봉쇄해야 할 것은 인간이 사는 지역이 아니라 거북이가 실제로 달리는 주로다. 더 빨리 달려서 앞을 막으면 될 일이다.

사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속도는 인간의 이동속도와 같다. 이 바이러스는 감염자를 태운 인간의 이동수단에 실려 인간의 교통망을 통해 퍼진다. 단지 인간은 누가 언제 감염되는지 알아차리지 못해 늘 뒤쳐져왔다. 즉 관건은 정보전달의 속도에 달려있었다. 방역당국은 감염자의 동선과 접촉자의 감염여부를 최대한 빠르게 많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거북이를 추격했는데, 아마 우리에게 고속인터넷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추격속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식 방역엔 수많은 의료진과 국가단위 행정능력 못지않게 정보기술(IT)이 큰 역할을 했다. 인터넷망을 달리는 전기 신호의 속도는 현존하는 그 어떤 이동수단 보다 빠르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속도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전기의 이동속도로 맞선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킬레스에게 전자신발을 신겨주었다.

다른나라들도 나름 IT를 활용하는데 우리의 전자신발이 성과를 낸 건 정부가 수집한 주민등록 정보, CCTV, 신용카드 사용내역, GPS 좌표 등 시민의 개인정보를 주재료로 삼았기 때문이다. 방역에는 도움이 됐으나 이는 국가가 정보를 비대칭적으로 독점해 권력비대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비록 정부가 정보를 투명하게 사용했다지만, 한국인 대부분이 국가권력의 개인정보 열람 및 감시와 통제에 긍정적으로 대하는 장면은 상당히 이채롭다. 물론 바탕엔 역사적인 경험의 공유와 관련법의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정보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전폭적인 믿음 때문으로 보인다.

코로나19를 맞이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사재기가 드문 이유를 우리의 발전된 전자 상거래 시스템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자긍심 넘치는 그런 해석은 거꾸로 정보기술의 효능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물론 우리나라 온라인 서비스 업체들이 수준 높은 시스템을 구축한 건 맞지만, 그건 IT산업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믿음을 기업들이 충족시켜준 측면이 크다.

한국인은 사재기를 할 거라면 온라인으로 한다. 정보기술은 빠르고 정확하며 원하는 건 다 가능하다는 믿음이 성공적인 방역을 위해 국가가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것을 용인하는 바탕이 됐다. 한국사회는 ‘너와 내가 정보기술을 믿는 것이 서로를 이롭게 한다’는 전제에 합의한 상태다.

그러나 정보기술에 대한 무한한 믿음의 종착지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에선 국가기관이 억울하게 예비 범죄자로 몰린 주인공을 좇지만, 미래의 방역에선 예비 감염자를 찾는 일에 국가가 나설 수 있다. 아킬레스의 전자신발이 속도를 더 내다보면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 미리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이미 IT분야는 빅데이터, 딥러닝, AI, 생체정보 센서 등 다양한 관련 기술들을 확보한 상태다. 정보기술을 전폭적으로 믿는 사회는 국가가 개인정보를 수집해 시민을 예비위험군으로 몰아 통제하는 것도 용인한다. 그건 우리가 전자신발을 신고 빠르게 달리는 불의와 싸워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최근 n번방, 박사방 등에서 벌어진 디지털 성범죄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을 떠올린 두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정보기술이 빠르고 정확하며 원하는 건 다 가능케 한다는 우리사회의 믿음은 이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작동했다. 피해자에겐 무시무시한 공포가 됐고 가해자에겐 극악한 상상을 현실화하는 수단이 됐다.

전염병은 인간의 속도로 이동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전자신발을 신었다. 아킬레스의 전자신발은 똑같이 전자신발을 신은 상대를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날로 발전하는 성범죄를 막지 못하는 이 상황은 혹시 제논의 역설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칸토어는 제논의 역설이 전제부터 잘못됐다는 걸 밝혔다. 1, 2, 3과 같은 자연수는 숫자가 끝없이 무한하게 이어져도 하나 하나 자연수 번호를 붙여가며 셀 수 있다. 셀 수 있다는 건 수와 수 사이에 끊어진 경계가 있고 최소단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서로 다른 수 사이의 비례를 찾을 수 있다. 거북이가 아킬레스 보다 항상 1/10 앞서 있다는 이야기처럼.

그러나 무한대로 이어진 실수는 아무리 세어도 셀 수 없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칸토어는 실수에 자연수로 하나씩 번호를 붙여가며 세어도 그 번호들에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는 다른 수들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자연수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존재하니 셀 수가 없다. 아킬레스가 달리는 경로 즉 선분은 셀 수 없는 실수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따라서 애당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숫자들을 가지고 1/10 같은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은 너무나 많은 양상들이 혼재해 있어서 셀 수 없는 무한대다.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낸 행위나 문화도 셀 수 없는 양상들이 무한히 존재한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법은 그런 양상들 중에 공공이 판가름해야 할 것들을 단위별로 쪼개 규정한 것이다. 즉 법전이 무한히 두꺼워지더라도 법 조항은 셀 수 있지만, 인간의 다양한 범죄 양상은 셀 수 없는 무한대다. 법 조항 하나하나에 붙은 자연수들을 보면 법과 인간 양상의 관계는 자연수와 실수의 관계와 흡사하다.

셀 수 없는 무한대인 인간의 양상에 셀 수 있는 법 조항을 일 대 일로 대응해 범죄에 대처한다는 것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영원히 추월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날로 새로운 방법이 등장하는 디지털 성범죄도 따라잡을 수 없다.

한국의 방역은 어쩌면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일 수 있다. 우리가 아킬레스의 전자신발을 만들어낸 건 단순히 정보기술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다.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이라면 약간의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근본에 있다. 우리 사회가 합의한 건 그러니까 인명의 소중함이다. 그래서 국가의 개인정보 수집이 민주주의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 사회의 기본적인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지털 성범죄를 막는 것에도 같은 원리가 필요하다. 남성들의 성장을 둘러싼 사회환경이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고 괴롭혀도 별 탈이 없기 때문에 성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가해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빗발치는 건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다. 성범죄 피해자를 양산하는 부조리하고 불균형한 사회환경부터 바로잡으라는 요구다.

방역의 최우선이 사람 목숨이었던 것처럼 인권에 대한 엄정한 규범이 먼저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 법 조항 하나, 판결 하나는 실수에 속한 자연수처럼 이 규범의 하위에서 기능한다. 지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우리의 전자신발은 우리를 언제나 n번방으로 이끌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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