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4월 16일이 다가오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는 대부분 수학여행길에 오른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세월호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와 수많은 일반인 승객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이도, 벼랑 끝에서 생존한 이도 있었다. <투데이신문>은 세월호 6주기를 맞아 생존자와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의 참사 이후의 삶과 끝나지 않은 국가와의 싸움, 지지부진한 진상규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故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투데이신문
故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거리의 벚꽃나무들이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리던 3월의 마지막 날 4호선 고잔역에서 단원고등학교 故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 김성욱(62)씨를 만났다.

기자와 김씨는 역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단원고 기억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내내 김씨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기자에게 초원씨의 자랑을 늘어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순식간에 기억교실 앞에 다다랐다.

김씨와 기자는 2학년 교무실의 초원씨 책상과 의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딸의 책상 위를 더듬거리던 김씨의 얼굴에선 웃음기는 사라지고 씁쓸함만 묻어났다. 힘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하시라는 당부 후 조심스럽게 2014년 그날로 기억을 더듬어봤다.

초원씨는 당시 단원고 2학년 3반 담임이었다. 학생들과 처음으로 떠나는 수학여행에 정신없이 바빴다고 한다.

“초원이가 선생님 되고서는 처음 떠나는 수학여행이었죠. 그 무렵에 굉장히 바빴어요. 바쁜 와중에도 설레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것이 딸의 마지막 모습일 거라고는 김씨는 상상도 못했다.

2014년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는 제주도를 향해 항해했다. 당시 세월호에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초원씨 등 단원고 교사와 학생 475명이 탑승해 있었다. 모두에게 즐겁기만 했던 수학여행길이 악몽이 돼버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세월호는 전남 진도 해상에서 서서히 침몰했고, 초원씨는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초원이는 5층에 있었어요. 5층은 비교적 탈출이 쉬웠다고 했는데 4층에 학생들 구하러 내려간거죠. 그리고 못 나온거에요. 선생님들 시신은 거의 다 일찍 올라왔어요. 구명조끼를 안입었기 때문에. 초원이는 그달 18일 새벽 2시에 물 위로 올라왔어요. 꼭 자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고 난 날이 초원이 생일이었어요. 학생들 몇 명이 돈을 모아서 파티 해주고 귀걸이랑 목걸이를 선물했다던데, 시신을 보니 선물을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故 김초원 교사 ⓒ투데이신문​
​故 김초원 교사 ⓒ투데이신문​

초원씨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김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초원이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있다가 25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어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술이랑 담배는 모르고 살았는데 술 없이는 잠들 수 없는 지경까지 됐어요. 눈만 감으면 생각나고, 밤새 뒹굴다 보면 아침이 와요. 한동안은 매일같이 술을 3병씩 마셨어요. 그렇게 1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 아픈 곳이 없었어요. 눈도 안 보이고, 치아도 흔들리고요. 원래 몸무게가 65kg 정도 나갔는데 57kg까지 빠졌어요.”

김씨는 딸이 떠난 이후 안산을 떠나 고향인 경남 거창에 터를 잡았다. 딸과의 추억이 깃든 집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죠. 우리가 고잔역 근처 아파트에 10여년을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이 많죠.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지금도 이해 안 가는 게 사람들이 보상금 얘기를 물었어요. 굉장히 불쾌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안 되지만 ‘당신 자식이 물에 빠져 죽으면 알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이런 상황들이 싫어서 2016년쯤 고향으로 내려간 건데, 거기서도 산속에 살았어요. 염소랑 닭, 개 키우면서요. 산속에는 아무도 안 찾아오니까 마음이 좀 나았죠. 동물들 돌보다 보면 하루도 빠르게 가고요.”

사랑하는 딸이 곁을 떠난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김씨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교사 중 11명이 희생됐고, 이들은 순직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초원씨와 이지혜씨는 예외였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에서다. 초원씨는 기간제 교사라서 정교사보다 다른 일을 하거나, 일을 덜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고 아이들을 사랑했다.

“초원이는 학생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다정다감했어요. 주말에도 쉬질 않았습니다. 학생들 불러내서 고기도 사주고, 빵도 사주고, 영화도 같이 보고 그랬다니까요. 그런데 기간제 교사라서 순직이 안 된다니... 아빠가 못나서 이러나 자책도 했어요. 나중에 초원이 다시 만나면 무슨 낯으로 보나 싶었죠. 순직이 되고 안 되고는 굉장히 큰 의미예요. 의로운 죽음이냐, 억울한 죽음이냐의 차이니까요. 그렇게 떠나보낸 것도 마음이 아픈데 순직마저 안 된다고 하니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김씨는 딸의 순직을 인정받기 위해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꺼려 하던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체투지까지 불살랐다. 그의 마음이 빛을 발한 듯 2017년 7월 14일 초원씨가 떠난 지 3년 3개월 만에 비로소 순직이 인정됐다.

“2017년 대선 앞두고 당시 문재인 후보하고 안철수 후보가 순직을 약속했었어요. 이후에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이 됐고 순직 인정에 대한 기대가 커졌죠. 이후에 어느 날 초원이가 갑자기 꿈에 나타났어요. 5월 15일 스승의 날에. 떠나고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상하다 싶었죠. 그날 누나네 과수원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어떤 기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다짜고짜 축하한대요. 알고 보니 청와대에서 순직 인정 기자회견을 열었더라고요. 전화를 받고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날 오후에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어요. 그러고 얼마 안 돼서 순직 인정이 돼 초원이가 현충원에 안장됐죠. 사실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어요. 한편으론 대통령 한마디면 되는 걸 그게 안됐던 건가 싶기도 하고요.”

故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뉴시스
故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뉴시스

순직만 인정되면 그간의 시름을 다 덜어낼 줄만 알았다. 그러나 초원씨는 또다시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다.

경기도교육청은 교사들을 위해 공무원의 질병·상해·사망 등에 관한 단체보험과 건강관리, 자기계발 등을 지원하는 맞춤형 복지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초원씨는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에 대상이 아니었고, 당연히 사망보험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에 김씨는 2017년 4월 김씨는 경기도교육감을 상대로 25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학생들은 수학여행 가기 전에 여행자 보험을 들었어요. 선생님들도 복지포인트로 들어준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초원이 같은 기간제 교사는 예외였어요. 2013년까지만 해도 기간제 교사도 보험을 들어줬는데 감사에서 걸렸다나, 그래서 2014년부터는 안 들어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별인 거죠. 그래서 소송을 한 겁니다.”

김씨는 1·2심에서 패소하고 대법원 판결만 앞두고 있다.

“어떤 기자분들은 ‘항간에는 돈 때문에 소송을 한다는 얘기가 있다’고 질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승소하면 우리 딸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고 했어요. 절대 돈 때문이 아니에요. 1·2심에서는 기간제 교사를 공무원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없다는 이유로 패소한 상황이에요. 이번에 바뀐 대법관이 교육 분야에 연관도 깊고 진보적인 분이라고 해 판결이 뒤집힐 수 있길 기대하고 있어요.”

故 김초원 교사 아버지 김성욱씨 ⓒ투데이신문

김씨가 길고 긴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초원씨의 명예와,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기간제 교사들이 더는 차별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초원이가 떠난 지 6년이 됐어요. 그런데 아직도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 간 차별이 남아있어요. 차별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금 소송도 포기하지 못하는 거예요. 임용 시험 합격만 못했을 뿐 똑같은 교사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꼭 대법에서 그런 판결이 나왔으면 하고요.”

김씨는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하고 있다. 그가 초원씨의 아버지로서 계획하는 앞으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4월이 다가오면 굉장히 힘들어요.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나고 자꾸 눈물이 흐릅니다. 저한테 16일은 초원이 생일이라는 게 더 크게 다가와요. 하루에도 수십번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러네요. 순직 인정 못 받았으면 초원이 볼 낯이 없었을 텐데 다행이죠. 이번 재판 마치고 나면 건강하게 우리 초원이 그리워하면서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릴 거예요. 부녀지간의 인연이 너무 짧았어요.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잘 있다가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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