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4월 16일이 다가오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는 대부분 수학여행길에 오른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세월호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와 수많은 일반인 승객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이도, 벼랑 끝에서 생존한 이도 있었다. <투데이신문>은 세월호 6주기를 맞아 생존자와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의 참사 이후의 삶과 끝나지 않은 국가와의 싸움, 지지부진한 진상규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사진 제공 = 황용운씨>
<사진 제공 = 황용운씨>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잠시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제주주민들도 탑승해 있었다. 끔찍했던 그날, 아비규환 속에서 24명의 제주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들은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보다도, 나 혼자 살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정부도, 사회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육지에서 너무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고, 어쨌거나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제주 생존자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제주에서 기억공간을 운영하며 제주 생존자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제주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이하 제생지)’ 운영자 황용운씨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주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 황용운씨 <사진 제공 = 황용운씨><br>
‘제주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 황용운씨 <사진 제공 = 황용운씨>

아름다운 가게에서 일했던 황씨는 2014년 12월 31일을 끝으로 퇴사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제주에 내려와 퇴직금으로 세월호 기억공간을 열었다. 그러던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를 알게 됐고 제주 세월호 생존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세월호가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배이기 때문에 제주에도 당연히 생존자가 있겠구나 생각은 했죠. 근데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피해가 워낙 크다보니 참사 직후에는 여론이 희생자분들에게 관심이 몰렸고 저도 그랬어요. 그러다 제주에 내려와 파란바지 의인 김동수씨를 알게 되며 제주 생존자에 대한 관심을 같게 됐어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사 6년 후, 24명의 제주 생존자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월호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제주 생존자는 대부분 화물기사 일을 하시던 분들이에요. 참사를 겪고 난 후에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생계를 위해 다시 화물기사 일에 뛰어든 분도 계시고요, 제주지역 내에서만 용달이나 운송업, 대리운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애써 잊고 살아가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 반면 그때의 충격으로 집에서 못 나오시는 분도 있어요. 가정이 유지가 안 돼 이혼하신 분들도 좀 있고요.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굉장히 사각지대에 몰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주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 황용운씨 <사진 제공 = 황용운씨>

제주 생존자들은 상대적으로 정부와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황씨는 제주 생존자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조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주 생존자분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감이 있죠. 안산 단원고 피해가 워낙 컸고, 때문에 그 중심으로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죠. 당연한 건데, 정부가 눈높이를 맞췄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죠. 생존자를 위한 지원 정책 등도 목소리를 낸 사람과 안 낸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던 걸로 알고 있어요. 형평성에 어긋난 거죠. 국가가 피해자를 방치하고,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도록 하고, 결국 피해자와 피해자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어요. 국가가 정말 악랄한 거죠.”

“생존자 중에 참사 이후 아예 연락하지 말라고 하신 분들도 3~4명 정도 계시대요. 그중 한분은 아예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분들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파악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고민이 필요한데 그런 게 없어요. 자기들 필요에 따라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들춰내놓고는 수습은 안 하고 방치만 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세월호 참사 얘기에 막연하게 거부감부터 느끼시는 거 같아요.”

그나마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묵묵히 바라봐 주고 지지해 주는 제주 주민들이다.

“세월호가 예정대로 제주에 도착했다면 제주의 오현고등학교 학생들이 세월호를 타고 인천으로 가기로 돼있었어요. 자칫 제주에서 피해가 발생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늘 지지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예를 들어 게스트 하우스나 카페에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눔도 하고 그걸 또 받아 주기도 하고요. 특히 제주는 4·3이라는 국가 학살을 겪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더욱 공감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주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 <사진 제공 = 황용운씨>

같은 맥락으로 황씨는 제주 생존자를 지지하는 모임 ‘제생지’를 지난 2월 말 본격적으로 열었다. 제생지에는 17명의 제주 생존자가 함께 한다. 황씨는 세월호 참사로 바뀌어버린 생존자들의 삶을 바꿔 줄 순 없지만 상처를 위로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자주 만나고 밥도 먹는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요. 제주 생존자분들께는 제생지라는 모임이 결성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동안 굉장히 소외됐다는 마음이 들었을 텐데 기댈 곳이 생긴 거니까요.”

황씨는 향후 제생지를 통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는 한편 구술채록을 만들어 세월호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지금 제주도 조례를 근거로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상담이나 도자기 치료, 미술 치료 등이 이뤄지고 있어요. 근데 전혀 피해자 중심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시스템이에요. 상담소는 오전 9시에 열어서 6시에 닫아요. 정말 피해자를 위한 거라면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갈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간이 마련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생존자분들의 목소리를 담은 구슬채록을 발간할 거예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참사 당사자인 생존자들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생존자분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해요.”

더불어 국가의 정책적 지원도 당연히 요구된다고 황씨는 말한다.

“지금 생존자분들에게 절실한 지원은 정부 차원의 공적인 배상과 보상입니다. 충분히 배려 받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이분들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 거예요. 생존자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국가가 책임져야죠. 한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놓은 건데요. 앞서도 말했지만 피해자 중심적인 행정이 돌아갈 수 있길 바라요. 무엇보다 그게 제일 중요하고요.”

세월호, 특히 제주 생존자 지지자로서 황씨가 향후 계획하는 삶은 무엇일까.

“생존자분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해요. 기댈 곳이 돼주고 싶어요. 일정 보상금을 받으신 분들은 어쨌거나 받은 게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당신의 잘못이 아닌 국가의 잘못이고, 때문에 국가는 당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이 길을 잘 닦아놔야 혹시나 나중에 비슷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세월호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들이 그 주인공이라는 것도요.”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