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성 작가

예술가들에게 있어 문자는 어떤 의미와 가치 그리고 역할이 있을까?

동서고금의 많은 예술가들이 글씨 또는 문자로 그들의 깊은 예술세계와 정신적 메시지를 드러내 왔다는 사실은 이 물음에 답을 명확하게 해준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그러했고, 왕희지의 초서가 그러했고 현대에는 설치작가 로버트 인디아나(R.Indiana)가 그랬다.

여기 두 작가의 각각 다른 메시지가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을 기록하고 동시에 정의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과정, 바로 이것이 평생 내가 계획하고 본질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이탈리아의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1931-) 이다.

“시를 쓰던 내게 한글은 매우 익숙한 소재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한글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자음과 모음의 형태에서 고유한 추상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한글을 디자인적 서체, 예술적 서체, 손 글씨 등으로 변화시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지만, 회화 자체의 소재로 사용하는 작가는 없었다. 한글 자체의 조형미를 그림으로 표현해 한글을 문화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다.” 인용한 금보성의 글은 마치 1940년대 후반의 프랑스 문학운동으로 말의 뜻보다 문자가 모여서 내는 소리 효과를 중시한 문자주의, 레트리즘 (letterism)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문자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문화는 동서양에 경계가 없다. 그 이유를 인용해보면 “하나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뜻과 의미를 높이기 위함이고 문자에는 내용이 담긴다. 그중에서도 시대나 가치를 대표하는 내용을 쓴 문자는 그 자체로 신성함을 얻었다. 신을 부르는 말이나 이름, 경전, 나라, 왕이나 성인의 이름 따위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둘째는 문자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문자가 추상화되어 있는 반면, 그림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형상을 가진다. 이러한 형상의 조합을 활용하여 문자의 내용을 쉽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메트로 폴리탄 설치작품

 

이런 시각에서 금보성의 작품은 그에게나 우리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한글을 다양한 형식과 모양으로 언어 메시지 전달을 시도하는 독특하고 별난 작가로 불릴 만하다. 

그의 작업들은 단순한 미적 표현에 그치기보다 설치 및 글쓰기로 문학적 의미와 미술이 결합된 미술 형태로의 가치를 지닌 소통언어이다. 

그래서 금보성의 회화는 때로 문자와 디자인 방식이 결합한 훌륭한 조형적 가치를 지닌 독창적 언어로 평가된다. 

모리스 드니가 ”회화는 색채로 뒤 덮인 하나의 평면”이라고 했지만, 금보성에게 <문자>란 하나의 의미이자 설치이며, 상징이며 평면인 것이다. 

흥미롭고 신기한 것은 원래 그가 미술학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라 3대째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전형적인 모태 신앙인으로 신학 전공자인데 뒤늦게 홍익대에서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그렇게 15년 동안 선교사 신분으로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등에서 청년 사역을 감당했고, 그러다 뜻하지 않게 “시를 좋아해서 평소 시를 쓰는 게 취미였는데 하나님이 글 쓰는 재능을 주었고 시집을 내기 위해 시를 쓰던 어느 날, 시에 색깔을 입히니 색다르게 보여 기역에 파랑색, 니은에 검정색, 디귿에 빨강색…. 문득 ‘한글에 색깔을 입히면 이것이 그림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이 그때부터 한글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그의 예술가 인생은 평면 회화의 차원을 넘어 입체 조형의 장르로 확장하면서 ‘한글 회화의 원조’란 별칭을 얻게 됐다. 

금보성 작가는 어느 날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순간적으로 우리글인 한글도 사라질 수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한글이 사라진다는 것은 5000년 넘게 꽃피운 우리 문화도 사라질 수 있기에 나는 그것을 증명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심했다.

그것도 단순한 형태에 그치지 않게 분명하고 구체적인 문자언어로 의미를 전하는 행위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한글 윷놀이 시리즈 1.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2020
한글 윷놀이 시리즈 1.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2020

특징적인 것은 그의 작품들이 모두 이름을 모티브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명한 그림이 명화(名畫)이면서 동시에 말 그대로의 이름 명·그림 화 ‘이름 그림’이 된 것이다.

그는 이 한글 이름의 작업을 35년째 계속하고 있다. 시간과 존재에 대한 개념을 인생과 맞바꾸어 작품으로 정의해 놓은 로만 오팔카의 작품 <프로젝트>와는 다르게 금보성은 이 작업으로 한글이란 언어 존재에 대한 개념을 예술가적 개념으로 환기시키는 특별성을 획득했다.

그의 작품은 삶의 목표성과 당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시간 속에서 우리의 뿌리를 찾고 잊지 않으려는 한국인의 당위성과 철학을 부여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처럼 언어도 문자 체계를 넘어 예술 자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임무이다. 마치 서체가 곧 선비의 인격과 학문의 깊이를 드러내는 척도이기에 많은 사대부나 선비들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문자 예술인 서예는 글자의 모양이나 간격, 크기, 붓질 따위를 통해 타인과 차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시대 민화나 궁중회화에서 이러한 사례는 훌륭하게 구현됐다. 문자로 장식하는 문자도가 그러하고 특히 궁궐을 장식했던 궁중회화 중에 “수복(壽福) 등의 문자가 조선시대의 핵심사상을 담은 글자로 수(壽)는 사회적 생명을 뜻하고, 복(福)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정신적, 물질적 가치”를 의미하는 형식이 그러하다.

금보성의 회화작품에는 이런 현대판 문자도의 의미와 가치를 극한적으로 높이기 위한 예술적 성과가 녹아있다. 주목할 것은 자음과 모음의 예술적 결합과 조형적 해석과 오방색의 조합과 대비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금보성만의 미적 형식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가 만드는 과정을 보면 스티로폼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후 →한글이름 스케치 후 커팅→직화(直火) 가열로 형태잡기→전체에 젯소 2~3겹 칠하기→황토나 돌가루로 초벌→유화물감 칠하기→마무리’를 거치면서 이름의 입체적 작업이 완결된다. 

한글을 이처럼 회화적 조형 작업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는 창조적인 오브제로 성공한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러브)나 “H0PE” 작품의 성공 사례에서 확인된다. 

중요한 것은 금보성이 이 위대한 한글을 본인만의 회화적 입체적 시각과 관점으로 풀어내 미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남관이나 이응노 등이 한글 언어로 회화작업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문자 회화로 발전시키는 데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한, 한글을 디자인적 서체, 예술적 서체, 손 글씨 등으로 바꾸려는 일련의 시도는 있었지만 회화나 입체 작업의 소재로 사용하는 작가는 없었다. 

한글 윷놀이 시리즈 2.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2020
한글 윷놀이 시리즈 2.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2020

금보성은 한글 자체의 조형미를 평면과 입체로 표현해 문화유산으로 남기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남다른 것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 형태에서 고유한 추상적 아름다움을 발견한 그의 작가적 시선이다. 

그 작업도 2차원적인 평면 회화에 머물지 않고, 조형과 디자인 및 디지털 영상을 통한 미디어 영역까지 확장하고 있다. 평면에서 진행되었던 작업을 질감과 입체감이 강조된 3차원의 입체로 전환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보성은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가장 한국적인 언어로 세계와 통할 수 있다는 한국의 인디애나로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표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듯 보인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여기저기로 이합집산하면서 다양한 이미지 창조가 가능하고, 작업은 평면과 입체, 영상 미디어로 경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제 그는 이러한 문자언어에 전통 색채인 오방색을 사용해 상생과 그림을 통한 치유가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고양국제 플라워 아트 비엔날레 감독서울아트쇼 공동감독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본인 이름으로 이뤄진 작품을 보는 사람은 이제 작가의 예술과 동행하는 이른바 ‘이름의 추상미(抽象美)’를 발견하게 되고, 그 이름의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특별하게 경험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정통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화가였다면, 이러한 무모해 보이는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하거나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그가 평면 작업에서 시작해 입체적으로 건너오는 그 엄청난 작업과 열정과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실험작업이 가능했음을 발견한다.

나는 금보성 작가의 방대한 작업량과 치열함의 진짜 매력을 여기서 발견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금보성의 한글을 통한 회화와 설치작업은 그를 한국판 인디애나로 탄생시키는데 결코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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