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류자격 필요” 국민청원…총 4만2000여명 동의
“국가 필요에 따라 사람대접…이주인권 개선돼야”

불길 속에 뛰어들어 10여명을 구한 미등록이주노동자 율다세브 알리 압바르(왼쪽)씨가 지난 23일 강원도 양양군 손양초등학교에서 LG 의인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 LG복지재단
불길 속에 뛰어들어 10여명을 구한 미등록이주노동자 율다세브 알리 압바르(왼쪽)씨가 지난 23일 강원도 양양군 손양초등학교에서 LG 의인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 LG복지재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시민들의 생명을 구한 미등록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이주노동자는 강원도 양양군에서 일하는 율다셰브 알리 압바르씨다. 알리씨는 지난 2017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해 체류 기간을 넘어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해 온 미등록이주민(불법체류자)이다.

알리씨는 지난 3월 23일 오후 11시 20분경 귀가하던 중 자신이 살고 있는 3층짜리 원룸 건물 2층에서 불이 난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불이야’라고 외치고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기척만 있을 뿐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고, 알리씨는 건물 밖으로 나가 외벽에 설치된 가스배관과 TV 유선줄을 잡고 올라가 2층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연기가 가득 차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출동한 소방대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목, 등, 손 등에 2~3도의 중증 화상을 입었다.

안타깝게도 해당 건물에 거주하던 주민 1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알리씨의 빠른 대처로 10여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알리씨의 사연이 알려지자 LG복지재단은 지난 23일 그에게 'LG의인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LG복지재단은 “자신의 안전과 불법체류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다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먼저라는 알리씨의 의로운 행동으로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의인상 수여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미등록이주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알리씨는 치료 과정에서 불법체류 사실을 자진신고해 다음달 1일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법무부는 알리씨가 국내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체류자격을 변경해 기타비자를 발급했다. 현재 알리씨는 서울의 한 화상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주노동자 카타빌라 니말(오른쪽)씨가 지난 2018년 12월 18일 대구 동구 검사동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열린 특별공로자 영주증 수여식에서 영주증을 받은 후 아베이와르 당시 주한스리랑카 대리대사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이주노동자 카타빌라 니말(오른쪽)씨가 지난 2018년 12월 18일 대구 동구 검사동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열린 특별공로자 영주증 수여식에서 영주증을 받은 후 아베이와르 당시 주한스리랑카 대리대사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의인’ 미등록이주노동자 영주권 부여 선례 있어

알리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에게 영주권을 부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2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화마 속 10명 구한 불법체류자, 추방이 아닌 영주권이라도 줘야 하지 않나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한국인 10여명을 살리는데 공헌을 했다면 당연히 국가에서 보상을 해야한다”며 “신분조회를 하고 이상이 없다면 영주권이나 취업비자를 늘려주는 정부의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알리씨에게 영주권을 부여해야한다는 청원은 같은 날 2건이 더 게시됐으며, 27일 오후 4시 기준 이들 청원에 동의한 시민 수는 4만2000명을 넘어섰다.

‘의인’이라는 이유로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까.

선례는 있다. 지난 2011년 비전문취업(E-9)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한 카타빌라 니말씨는 2016년 체류기간이 만료된 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아 미등록이주민이 됐다.

2017년 2월 경북 군위군의 한 과수원에서 일을 하던 니말씨는 인근 주택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당시 불길이 거세 누구도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니말씨는 주택 안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듣고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할머니를 구해냈다.

이 과정에서 니말씨는 얼굴과 폐 등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3주간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계속해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니말씨는 미등록이주민임이 알려져 강제출국 위기에 놓였으나 보건복지부는 그를 의사상자로 지정하고 치료를 위해 비자를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2018년 12월 13일 법무부는 ‘외국인 인권보호 및 권인증진협의회’를 열고 니말씨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니말씨가 범죄에 연루된 사실이 없고 정부로부터 의사상자로 지정된 점 등이 고려됐다.

이에 알리씨를 의사상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양양군 주민들은 양양군에 알리씨를 의사상자로 지정해야 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의사상자로 지정될 경우 보상금과 의료급여 등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 니말씨의 사례와 같이 영주권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민주노총, 이주노조, 이주공동행동 등의 주최로 열린 ‘2020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공동행동 기자회견’에 참가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 노동권 보장, 코로나19 인종차별 반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이주노동자들이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민주노총, 이주노조, 이주공동행동 등의 주최로 열린 ‘2020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공동행동 기자회견’에 참가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 노동권 보장, 코로나19 인종차별 반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이주노동자 처우개선 우선” 지적도

일각에서는 알리씨의 사례가 미담으로만 소비되는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차별적 상황을 그대로 둔 채 ‘의인’이라는 이유로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은 적절한 대안이 아니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 사업체에 취업한다. 고용허가제를 통해서는 3년까지 국내 체류가 가능하고, 사업주가 원할 경우 1년 10개월에 한해 체류기간 연장이 가능하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사업주의 허락 없이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비자연장을 위해 사업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결국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의 차별행위에 견디다 못해 사업장을 이탈하거나 비자연장을 하지 못해 미등록이주민으로 한국에 체류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섹알마문 수석부위원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니말씨와 알리씨 사례 모두 국가가 필요성에 따라 영주권을 부여한 것”이라며 “이 같은 사례가 자꾸 반복되면 한국사회에서는 미등록이주민이 목숨을 걸어야만 체류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선행은 정말 대단한 것이고 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한데 대해 반대하지는 않지만, 미등록이주민에 대한 처우개선 없이 이 같은 사례에 대해서만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섹알마문 부위원장은 “‘불법체류자’라며 미등록이주민의 존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지만, 한국 정부는 미등록이주민의 존재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주노동자를 받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없다면 일손 부족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면서 “미등록이주민의 존재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건 그만큼 미등록이주민들이 한국사회,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알리씨의 사례처럼 목숨을 걸어야만 영주권을 부여한다면,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재난상황에서 이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가능성도 있다”며 “사람을 한국사회의 필요에 따라 사람대접하고, 필요 없으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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