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5·18 ‘문화선전대’ 홍성담 화백
광주 정신은 저항, 저항은 민주주의 기초
함께 했기에 내일 죽어도 원이 없다 느껴
슬픔·좌절 이겨내야 한국 민주화운동 살아나
5월 정신으로 동아시아 문제 해결 이끌 것

ⓒ홍성담 화백
홍성담 화백 ⓒ투데이신문 한관우 인턴기자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총성과 함께 핏물로 물들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유신독재 체제를 그렸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럴수록 더욱 격렬하게 신군부에 맞서 그들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촉구했던 광주 시민들의 국가를 향한 10일간의 울부짖음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의 역사에, 국민들의 마음과 정신에 기억되고 있다.

홍성담(65) 화백은 ‘문화선전대’로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다. 이제는 민중화가의 입장에서 5·18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5월 화가’, ‘5월 아들’로 불리는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5·18은 어떨까.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과 시민들의 분노 <사진 출처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공개 영상 촬영>

광주 시민들 못지않게 5·18을 잘 알고 있다는 홍 화백은 당시 광주에 ‘농촌공동체’ 의식 잔영이 깊게 남아 계엄군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문화선전대로서 5·18의 전 과정을 도청 한가운데서 지켜봤죠. 당시에 12·12 쿠데타로 모든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었죠. 이전에 있던 부마민주항쟁에서 계엄군이 폭력으로 시민 진압에 성공했다 보니 광주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겠죠. 근데 당시 광주 사회는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광주는 농촌공동체 의식의 잔영이 깊게 남아 있었어요. 부산이나 마산 등은 팔도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였고 산업화가 상당히 많이 진행돼있었죠.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많이 허물어져있었어요. 옆 공장에 누가 다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밤새 공장에서 일만 하는 거예요. 근데 알려졌다시피 광주는 산업화 혜택을 못 받은 지역이잖아요. 농업경제가 주축을 이룬 도시죠. 그래서 당시 다른 지역에는 없던 농촌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맞아 죽어가는 학생들을 보고 ‘우리 자식들 다 죽겠다’, ‘나이 먹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라고 했어요. ‘우리’, 이것이 5·18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0년간 주축이 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끌어온 ‘광주 정신’을 홍 화백은 ‘저항의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광주 정신을 두고 여러가지 얘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잘못된 권력과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민주주의는 명사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어야 하기 때문에 동사여야만 해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는 저항이에요. 저항하지 않으면 절대 민주주의를 동사화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광주 정신을 인권과 평화라고 정의하지만, 저는 인권과 평화 이전에 권력과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정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5·18은 홍 화백에게 민중예술가로서의 삶의 시작점이 됐다. ‘왜 하필 5·18이었나’라는 의문에 그는 5·18은 근대정신을 자각하게 한다고 답을 내렸다.

“5·18을 통해 숱한 죽음을 목격했죠. 신군부가 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학살의 총책임자인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됐어요. 이런 상황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전후로 문명적으로는 탈봉건을 했으나, 해방이 주체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보니 근대적 인간 형성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19라는 엄청난 혁명이 일어났지만 박정희 군부 쿠데타가 들어서는 등 과거 봉건적 잠재력이 끊임없이 이월됐습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의 국가주의라고 봅니다. 이 국가주의가 지속되면 근대적인 인간정신을 찾을 수도, 구현할 수도 없어요. 근대적 인간정신이 구현돼야만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수 있어요. 국민들이 5·18, 6월 민주항쟁, 몇 년 전 촛불항쟁 등을 거치며 근대정신을 몸에 담게 됐어요. 그럼에도 아직도 태극기, 성조기, 일장기를 흔드는 봉건적 의식체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우리나라를 국가주의 함정에 빠뜨릴 수 있고, 나아가 대량학살을 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인 5·18을 끊임없이 읽어내고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또 5·18이 주는 사상적 맥락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것을 예술적으로 상징성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중미술 세대들이 5·18 이후로 근대정신을 자각하게 됐다고 봅니다.”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 중 ‘혈루’ <사진 출처 = 홍성담 화백>

5·18을 소재로 한 홍 화백의 작품은 대부분 판화 기법이 사용됐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홍 화백은 어쩌다 판화를 하게 됐을까.

“5·18 진상규명을 위해 국내외에 돕는 시민사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5·18을 알려야 하는데 사진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제가 아주 얇은 종이에 보고 들었던 것을 담채화 비슷하게 연필로 그리고 물감을 옅게 칠해서 줬어요. 가지고 가다가 걸릴 수도 있으니까 노루지 같은 데 그린 그림을 아주 얇게 말아서 속옷에 들어가는 고무줄을 빼고 그것을 넣었지요. 속옷 2장에 그림 10장 정도를 넣을 수 있어요. 그걸 무사히 가지고 가면 그분들은 예배나 미사 시간에 앞에다 걸어두고 5·18을 알린 겁니다. 당시에 그림을 원하던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이 굉장히 많았어요. 매일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얼마나 지겨워요. 그러던 어느 날 수배 중에 한 선배 집에 숨게 됐는데 거기서 초등학교 4학년 표준전과를 보게 됐어요. 미술 과목 부분을 보는데 판화 관련 내용이 있더라고요. 제가 대학에서 판화 수업을 듣긴 했는데 당시에는 절실하지 않았어서 인지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근데 상황이 필요를 만든다고, 보자마자 ‘왜 여태 판화를 생각 못 했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고무 판화랑 조각도를 구매해서 판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1987~1988년 사이에 250점을 제작했어요.”

홍 화백은 5·18 판화들을 작품이 아닌 세계에 광주를 알리는 데 이용한 ‘도구’라고 표현했다.

“판화를 미학이라든가, 예술적으로 완성해야겠다는 욕심은 전혀 없었어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했죠. 제 오월 판화는 예술 이전에 미디어로써 (세계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역할을 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그의 오월 판화에는 계엄군에게 학살되는 비탄한 모습도 담겨 있지만 이와 반대로 환희에 차있는 민중들의 모습이 많다. 홍 화백은 5·18에 참여한 시민들의 실제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방을 벌일 때, 죽음과 삶 사이의 찰나의 순간에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낙관적이었습니다. 밖에서 광주를 볼 때는 분노에 가득한 장면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현장은 대단히 재밌었습니다. 죽음의 전선에 우리들끼리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10일 동안의 광주 항쟁의 기억만으로 내일 죽어도 원이 없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얘기했으니까요. 5·18 전사들은 광주의 전 한반도화, 한반도의 5월화를 맹세했고 이를 위해서는 광주가 슬픔과 좌절, 패배, 허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야만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 중 ‘대동세상’ <사진 출처 = 홍성담 화백><br>
홍성담 화백의 오월 판화 중 ‘대동세상’ <사진 출처 = 홍성담 화백>

홍 화백의 오월 판화에는 광주 시민들만큼이나 밥그릇이 많이 등장한다. 밥그릇에는 잊을 수 없는 어느 5·18 기억과 ‘밥상공동체’에 대한 그의 철학이 내재돼 있다.

“첫 발포가 있던 날이죠. (계엄군을 철수시킬 테니 질서를 지켜달라는 말을 믿고)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무장도 안 한채 계엄군하고 대치하고 있었어요.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나왔고 감격에 겨워 다 같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그랬죠. 그런데 1절이 딱 끝나고 맨 앞에 막고 있던 군인들이 뒤로 빠지더니 사격을 준비 중이던 다른 군인들이 발포를 시작했어요. 수많은 시민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골목에 숨어 있었는데 몇 미터 앞에 한 학생이 쓰러져 꿈틀대더라고요. 그래서 그 애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는데 배가 갈라져 창자가 쏟아져 나왔더라고요. 그 창자에 하얀 밥알이 붙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길바닥에 끌려 왔으니까 오물이 묻은 걸텐데 말이죠. 당시에는 ‘광주의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아침에 가난한 청년이 보리밥 한 그릇 먹고 나왔는데 그게 아직도 소화가 덜 된 상태에서 창자가 터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밥에 집착하게 된 거 같아요. 밥을 먹는 행위가 무엇인가, 우리 몸에 밥 한그릇 바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생각 때문에요.”

“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은 서로가 가진 모든 걸 내왔어요. 시민군 차에 밥, 과자, 빵부스러기까지 다 주면 그걸 또 빈민가나 동네 아이들에게 나눴어요. 서로 둘러앉아 나눠먹기도 하는 대동세상이 이뤄졌어요. 광주시 전체가 밥상공동체가 된 거죠. 밥상공동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의 마지막 밥상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밥과 피를 나눈 형제가 돼 광주와 서로를 지키겠다고 결의했죠. 그런데 요즘은 개인 간의 거리가 단절되고 있죠. 이를 극복하려면 공동체가 필요해요. 공동체 커뮤니케이션이 없으면 국가주의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밥상공동체 발현을 위해서 밥그릇을 그리는 것도 있어요.”

홍 화백은 특정 인물에 대한 풍자 작품으로 매우 저명하다. 그러나 정작 5·18 가해자 전두환, 노태우 등을 소재로 한 풍자 작품은 알려진 게 없다.

“내 개인 작품으로는 안 남기고 걸개 그림이라던가 깃발, 만장 그림을 통해 많이 그렸죠. 근데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현장에서 다 사라졌어요. 전두환 등 5·18 가해자 관련 작품은 저 말고도 많은 광주 작가들이 작업해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현실의 문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이 시대 또 다른 5월을 천착하려고 합니다.”

홍성담 화백의 어린이 그림 동화책 ‘운동화와 비행기’ <사진 출처 = 홍성담 화백>

홍 화백은 5·18을 소재로 어린이 그림 동화책을 선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된 어린 소년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담겼다.

“5·18로 어린 소년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죠. 故 전재수님과 故 박광범님인데, 두 사람을 위로하는 그림을 꼭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고 <운동화와 비행기>라는 동화책을 그렸죠. 주인공이 두 사람을 섞어 놓은 거예요. 사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도 5·18에 관한 그림 동화책을 여러권 출간하긴 했습니다. 다만 주변부 이야기를 다뤘을 뿐 금남로, 도청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그림은 없었어요. 아이들에게 총 맞아 죽는 얘기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운동화와 비행기>는 반드시 5·18 중심을 돌파하는 내용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린 작품입니다.”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그림이다 보니 다른 홍 화백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5·18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어린이 동화책이기 때문에 밝게 그려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사실 5월 상황이 당시 아이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즐거웠어요. 일상에서 일탈한 거잖아요. 학교도 안 가고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괜히 즐겁고 들뜨는 거예요. 어리숙한 동네 형이 총을 메고 동네를 지킨다고 하니 얼마나 늠름해 보였겠어요. 그런 아이들의 시선으로 5월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성담 화백 ⓒ투데이신문 한관우 인턴기자

홍 화백은 5·18을 문화예술로서 재해석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진정한 재해석을 위해서는 경계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5월은 지금의 현실에 상징적 언어로 항상 재창조 돼야 합니다. 오늘의 입장이라는 창틀을 통해 ‘5월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과 진실을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요즘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첫 번째로 공공 문화기관의 프로젝트 도움을 받는 지점이에요. 일정 부분 돈을 받고 작업을 하면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럼 예술적 자기 테마를 잃게 됩니다. 작가 스스로 자기검열하게 되는데, 작가는 자기검열할 때 가장 누추하고, 천박하고, 졸렬해져요. 두 번째로 시늉만 해서는 5월의 진실을 절대 오늘의 창으로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5월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 주제도 시늉의 미학으로 들여다보다 진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작가들이 시늉 이상의 자기 열정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5월 화가’, ‘5월 아들’로서 홍 화백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까.

“아시아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광주는 아시아의 여러 인권단체와 각국의 시민사회로부터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졌어요.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광주는 활동가를 지원하고 교육하는 등의 역할을 해왔죠. 저 또한 그 일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현재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문제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선 활동들과 같은 맥락에서 예술가 그룹에서는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평화예술 네트워크를 구축했어요. 지난해에는 첫 전시회를 열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할 계획입니다. 저에게는 5월 정신이 동아시아 평화예술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 지점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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