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1994년에 상영됐다. 이 영화는 안정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명길은 그저 그런 영화 조감독. 그의 친구 병석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의 장면들과 대사를 통째로 외우던 영화광이다. 어느 날 명길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병석으로부터 평생의 집념이 담긴 시나리오 한 편을 건네받는다.

명길은 병석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탄복하고 연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영화를 찍으면서 그 시나리오가 헐리우드 영화들을 온통 짜깁기했음을 눈치 챈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영화를 완성하고, 병석은 평단의 극찬 속에 영화제에서 시나리오상을 받는다.

화가 난 명길은 병석에게 표절 원본들을 보여주며 따져 묻는다. 하지만 병석은 도리어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도 자신의 시나리오가 자신만의 창작품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석은 자신이 자신을 속였노라며 울부짖는다.

영화는 고도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이 찌운 속살의 성분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서구 문화의 꽃인 헐리우드 영화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아시아 개발도상국가의 국민 병석. 그는 서방 선진국을 욕망하는 것이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당시 한국사회의 내면을 상징한다. 명길과 병석은 저만치 앞서 있는 나라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한국인의 양가적 표정이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상영된 지 26년이 흐른 올해 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봉 감독은 수상 무대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했다. 내게 그 장면은 안정효 세대가 자학하듯 뱉은 질문에 봉준호 세대가 내놓은 답안지처럼 보였다. 숙명 같던 서구 추종의 시대상에 좌절한 앞세대의 고뇌는 자식세대에 이르러 스스로를 당당히 여기는 것으로써 풀렸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극복이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선전에 많은 국내 언론은 ‘세계가 인정했다’는 말을 쏟아냈지만, 우리를 인정했다는 그 ‘세계’는 전지구적 세계가 아니다. 다른 대륙의 가난한 나라 영화제에서 상을 타면 언론은 세계라는 낱말을 그토록 반복적으로 붙이지 않는다.

미국 주류 음악계에서 성공한 BTS나,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에 보내는 북미와 유럽 국가들의 찬사를 다루는 기사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세계가 인정했다는 제목의 기사들은 ‘서방 선진국이라는 세계’의 인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한국인들이 여전히 선진국 질서의 외곽에 있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통계적으로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지대의 바깥에 있을까봐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한국인의 긴장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한 무력대치 상황을 연이어 겪으면서 지속된 적대적 환경에 대한 불안감이 빚은 결과다. 상시적 불안은 혹시나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이 없는지 주변을 예의주시하게 만든다.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내부의 누가 공동체의 안위를 해칠지 끊임없이 경계하도록 한다. 한국사회는 고도 긴장 사회다.

우리의 긴장감은 그간 정치 체제에 대한 예민함으로 치환돼 왔다. 반민주 정권의 억압통치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촛불혁명 모두, 국가공동체의 안위에 가장 이롭다고 여기는 것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주류세력의 긴장감을 뿌리로 삼는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이념이나 진영이 아니라 긴장의 방향성이 만들어낸다. 그 맥락을 벗어나면 어떤 정치인이든 무거운 심판을 받아왔다.

이는 다른 사람의 행위에 촘촘하게 반응하는 문화적 경향성으로 우리 삶에 고착됐다. 생존, 부강, 공정성, 민주주의 등 당대의 기준에 균열을 내는 사람을 민감하게 살펴서 시시비비를 강하게 따지고 무겁게 심판한다. 긴장을 유지하는 다른 시민들 눈에 벗어나는 행위는 사회적 처형감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도덕이나 시민의식은 긴장의 다른 말이 된다. 덕분에 카페에서 물건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누가 훔쳐가지 않는다. 택배물을 현관 앞에 장시간 두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수십만명이 집회에 몰려도 대규모 폭력사태로 번지지 않는다. 풍요가 늘어난 만큼 그에 맞는 긴장도를 높게 유지해서 공동체의 불안을 키우지 말라는 서로의 압력이 강화된 결과다. 체면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관습과 지난 100년간의 긴장은 우리만의 시민의식으로 토착화됐다.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확진자의 실수나 무지는 모두의 안위에 긴급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여론의 매서운 비판대에 오른다. 마스크 미착용도 마찬가지다. 너 하나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위험에 빠질 수 없다는 불안한 시선이 언제나 번뜩인다. '민폐조심'에 대한 긴장이야말로 한국인만의 시민의식이다.

이러한 시선은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현대사에선 집권세력이 독재를 하든 민주주의를 꽃피우든 시민들의 긴장수준에 미흡하면 과감하게 교체 당했다. 정권이 긴장감을 잃고 불안을 높이면 반드시 단죄돼 왔다. 한국인은 불안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내밀한 개인정보나 CCTV가 포착한 개인마저 국가가 활용하는 긴장감 넘치는 나라를 기꺼이 선택한다. 이는 북미와 유럽의 나라들과 전혀 다른 역사를 달려온 한국인이 만들어낸 한국형 시민의식이다. 서방 선진국들은 이런 한국이 코로나19를 맞아 보여준 모습을 이해 못하거나 해석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겐 높은 긴장감이 빚은 우리만의 토착화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 관념이 있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살려줄 것인가. 경직된 시선으로 서로를 샅샅이 훑는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던 정의기억연대의 전 대표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그가 공익적인 시민운동을 발판삼아 사익을 추구했다는 의혹은 온갖 격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지난 100년간 우리사회가 겪어온 어떤 긴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사안엔 국가의 존립과 개인의 생존, 옳음을 추구하는 방법, 공동체 속의 개인과 개인을 지키는 공동체, 부의 축적과 사회적 자본의 관계 등 그간 한국 사회가 치열하게 벼려온 칼날들이 중첩돼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긴장의 방향에 따라 분노하거나 분열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따지며 서로가 공동체의 불안을 키운다며 대립한다. 그 모습마저 고도 긴장 사회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 혼란은 국가 간 대립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세계시민의 미래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시민운동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만의 답을 적어가는 과정이다. 앞선 어떤 나라가 아름답게 정해준 답을 좇느라 허덕이는 게 아닌, 우리만의 역사가 만들어낸 질문에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관식 답이다. 어느 날 우리의 길이 나면 다른 나라의 누군가도 안전하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 역사의 한 매듭을 지은 후 무엇을 해야 할지 잠시 서성이고 있다. 이제 우리의 비전은 우리만의 긴장감을 긍정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속였다던 병석의 회한을 곱씹을 필요는 없겠다. 돌이켜 보면 그 경험조차도 밀알이 됐다. 한때 세계의 전부라 생각했던 어느 나라의 시상식에서 읊어진 명언은 여러 의미로 이미 우리의 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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