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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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한관우 인턴기자】 n번방 등 성범죄자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일명 ‘버닝썬 사건’의 주범 정준영과 최종훈 등은 ‘진지하게 반성한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형을 감경 받는 등 여전히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져 있다.

성범죄자들이 지나치게 낮은 처벌을 받아왔다는 지적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성범죄 가해자들에 대해 중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법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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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합의’로 처벌 피한 가해자들, 빨간 줄 하나 없다

지난 2004년,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고등학생 여럿이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A양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온라인 채팅으로 A양을 꾀어내 성폭행한 후 영상을 촬영했고, 촬영한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해 1년 동안 성폭행했다. 이 사건은 피해사실을 알게 된 A양의 어머니와 이모가 경찰에 신고하며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인근 지역의 고등학생이었던 가해자들은 그 수가 최대 100명이 넘어간다고 추정되지만 실제 수사된 인원은 44명에 불과하며, 그 중 기소된 인원은 10명에 불과했다.

기소된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34명은 ▲소년부 송치 20명 ▲다른 사건과 관련해 타청 송치 1명 ▲불기소 13명으로 처분됐다.

13명을 기소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A양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범죄는 친고죄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해야만 공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A양이 가해자들과 합의한 배경에는 A양 부친의 강요가 있었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던 A양의 아버지는 종종 폭력을 휘둘렀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A양 어머니와 이혼한 상태였다. 이처럼 가정에 소홀했던 부친은 사건 이후 친권을 행사하며 A양에게 가해자들과 합의할 것을 종용했고, 합의금은 모두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나눠가졌다.

사건은 울산지법이 기소된 10명에 대해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리며 종결됐다. 형사처벌을 받아 전과 기록이 남은 가해자는 한 명도 없으며, 가해자들은 이후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재판부는 “고등학생으로 진학·취업이 결정됐으며, 인격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교화 가능성이 있다”며 가해자들이 초범인 점·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여성단체에선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었지만,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는 이 사건으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난 2013년 6월에야 성폭력 처벌법이 개정되며 폐지될 수 있었다.

지난 2017년 조두순의 출소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돼 6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바 있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꾸준히 게시돼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게시판 캡처 ⓒ투데이신문
지난 2017년 조두순의 출소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돼 6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바 있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꾸준히 게시돼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 게시판 캡처 ⓒ투데이신문

“만취해 심신미약” 감형받은 조두순, 올해 출소

2008년 안산시 단원구에서 8세 아동이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조두순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의 범인 조두순은 징역 12년 형을 받고 올해 12월 만기 출소한다.

당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조두순에게 고작 12년 형이 내려졌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법체계 내에서 내릴 수 있었던 형량 중 큰 편에 속한다.

검찰은 조두순을 기소할 당시 일반 형법상 강간상해 죄를 적용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13세 미만의 아동에 대한 성범죄 사건이기에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로 기소하는 것이 옳았다. 당초 경찰은 사건을 검찰에 넘기며 이 법률을 적용했지만, 인계받은 검찰이 일반 형법을 적용하며 ‘경찰보다 법 모르는 검찰’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후 검찰은 조두순에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범행 당시 만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조두순의 주장이 인정되며 형이 감경됐다. 당시 무기징역에 대해 감경사유가 인정된다면 7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선고해야 했고, 유기징역 최고치가 15년인 점을 고려할 때 조두순에겐 7~15년의 형량이 선고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건 당시 판사들 사이의 동종범죄에 대한 권고형량이 최대 11년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할 때 징역 12년 형은 당시 선고할 수 있었던 최고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조두순의 심신미약 주장이 받아들여졌을까. 조두순은 범행 당시 만취해 있어 심신미약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피가 묻은 피해아동의 신발 등을 집에 가져가 방치한 점을 제시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피해자의 소지품을 그대로 방치할 정도로 방치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씨는 범행당시 증거 인멸을 위해 피해아동의 몸 위에 물을 틀어놓고 범행장소(화장실)를 밀대 걸레로 청소하는 등 심신미약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검찰은 조씨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고, 판사는 조두순의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판결 당시에는 피의자의 심신미약이 인정된다면 판사는 형을 감경하는 것이 의무였다.

1심에서 징역 12년 판결을 받은 조씨는 항소·상고했지만 판결이 유지되며 12년형을 확정받았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이익변경금지원칙에 의해 2심과 3심에서 조씨에게 더 높은 형량이 내려지는 일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항소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 검찰 측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7년 미만의 징역형이 나오면 항소하는 것이 관행이다”라고 밝혔다. 즉, 7년 이상의 형이 나왔기에 항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심신미약이 인정된다면 형을 ‘감경해야 한다’는 조항은 2013년 6월 성범죄에 한해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변경됐고, 2018년 소위 ‘김성수법’으로 불리는 형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감경할 수 있다’로 전면 수정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심신미약’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조두순의 심신미약 감형은 국민적 트라우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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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아니라는데…“사랑”이라며 무죄 판결한 대법원

2011년, 한 연예기획사 대표 B(47)씨가 여중생 C(15)양에게 접근해 성관계를 가지고 임신까지 시킨 사건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가해자의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처음 만났고, 당시 피해자는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연예인 해볼 생각 없느냐’며 연락처를 교환하고 연락을 주고받았다. 며칠 뒤 B씨는 C양과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 유사 성행위를 강제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성폭행을 저질렀다.

이후 B씨는 임신한 C양에게 가출을 유도했고, 자신의 자택에서 한동안 동거하게 됐다. 그러나 B씨는 아나운서를 협박한 혐의로 징역 10월을 살게 되고, 이후 9월달 출산한 C양은 돌연 B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다.

B씨는 1심에서 징역 12년, 2심에서 징역 9년을 선고받았지만 이어진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하며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C양이 B씨가 구속돼 있을 때 매일 면회를 갔으며 편지 등에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내용을 적고 ‘스티커를 붙이는 등’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 것으로 보여 성범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진 파기환송심에서 B씨는 무죄를 판결 받았고, 검찰이 재상고했지만 대법원이 형을 확정하며 가해자는 2017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C양은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과 자칫 가족들이 입을 피해가 두려웠다고 주장했으며, 매일 면회를 가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이유에 대해 “임신 사실이 들통날까 집에 갈 수 없었고 가해자가 면회와 편지를 강요했다”고 밝혔다.

C양에 대한 B씨의 행동은 그루밍 성범죄로 볼 수 있다.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는 스스로 성범죄를 당했다는 인식조차 없는 경우가 있으며, 겉으로 보기엔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해 성범죄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이다.

B씨는 연예기획사 대표 지위를 내세워 C양에게 접근했으며,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C양을 임신에 이르게 했다. 또한 C양이 형편이 좋지 못한 집안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할 것을 이용해 “집에는 말하지 말고 내 말대로 편지를 남기고 나와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였다. 이 사건은 연예기획사 대표라는 지위와 임신한 미성년자라는 약점을 이용해 C양을 그루밍한 성범죄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당시 그루밍 성범죄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기였기에 재판부는 B씨의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19일 ‘n번방 방지법’의 일환으로 의제강간 연령이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되며 이 사건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만일 오늘날 벌어진 사건이었다면 B씨는 처벌받았을 테지만, 사건 당시 의제강간은 13세 미만에 한정된 법령이었기에 처벌이 불가능했다.

가수 정준영 ⓒ뉴시스
가수 정준영 ⓒ뉴시스

정준영 “진지하게 반성한다”며 감형한 법원

이렇듯 문제적 법안들은 여러 사건들과 시민들의 반발을 겪으며 점차 개선돼 왔다. 그러나 수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한 뒤에야 수정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성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최근 단체 채팅방에 불법 촬영 성관계 동영상·사진을 유포하고 집단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가수 정준영이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또한 정씨와 함께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고 여성을 강제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수 최종훈 또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1심에서 각각 징역 6년,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감형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정씨에 대해 “본인의 행위 자체는 진지하게 반성한다는 취지의 자료(반성문)를 제출한 점을 고려했다”면서 최씨에 대해선 “피해자와 합의한 점은 유리한 사정이다”라며 감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 판결이 정당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형량이 지나치게 낮다고 항의하는 한편, 정씨의 반성문에 대해 ‘악어의 눈물’이라며 법원의 가해자 중심적 판결을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최고위원은 sns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가 여성‧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구조를 존속시키고 있다”며 “법원이 성폭력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비판은 계속 제기됐다는 점을 사법부는 명심하고 반성과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성범죄자들에 관대한 판결을 내려온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 커져가는 가운데, 우리 사회는 ‘n번방 사건’을 마주했다.

이 사건 범인들에 대한 처벌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그간 ‘성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나쁜 선례를 남겨온 사법부가 이번엔 다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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