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집권 4년차에 불어 닥친 역사 재평가
친일파 파묘 꺼내든 여권, 보수 진영은 바짝 긴장
KAL기 폭파 사건 재조사, 김현희 사건 재조명
10.26 당사자 김재규 유족 재심 청구, 뒤집어지나
역사 재조명에 긴장하는 보수, 역사 어디로 흐르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욱 변호사가 26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재규 형사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재심 청구서 내 당시의 보도 기사를 살펴보고 있다.ⓒ뉴시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욱 변호사가 26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재규 형사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재심 청구서 내 당시의 보도 기사를 살펴보고 있다.ⓒ뉴시스

【투데이신문 홍상현 기자】 문재인 정부 집권 4년 차가 되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역사 재평가가 불어닥쳤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친일파 인사의 무덤을 현충원에서 묘를 파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정부는 KAL기 폭파 사건을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이 10.16 사건에 대해 법원에 재심 청구를 하겠다고 밝혔다. 아직도 현대사의 많은 부분은 퍼즐이 맞춰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역사 재평가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보수 진영으로서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소 기자들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단순한 복수의 의미는 아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경멸을 의미한다.

프랑스 소설가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소설이 발간됐다. 백인 처녀를 사귀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동생을 위해 복수에 나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후 1978년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나왔는데 성폭행 당한 여인의 잔혹한 복수극이었다.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오역이 됐다. 이는 피해자인 여성이 복수한 내용인데 마치 피해자가 잘못한 것처럼 비쳐지는 제목이었다.

이 영화 제목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유행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이 발언하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었다.

조갑제가 조명한 박정희

조갑제는 박 전 대통령의 전기를 발간하면서 저서 제목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했다. 극우 논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 전 대통령을 칭송하는 책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박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은 역사 재조명을 의미하는 말이 됐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집권 4년 차가 되면서 역사 재조명이 시작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친일파 인사의 현충원 파묘이다. 발단은 김병기·이수진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지난 24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가 개최한 ‘2020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 자리에서 친일파 파묘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 ‘친일파 파묘’의 대상자는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의 현충원 안장 문제이다. 올해 100세로 생존해 있는 백 장군의 사후 국립묘지 안장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백 장군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의 전신 격인 국방경비대에 입대, 6·25전쟁에서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내고 1960년 예편한 뒤 주중·주프랑스 대사관 대사와 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 당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다. 즉, 친일파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24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현장 탐방 참석자들.ⓒ뉴시스
24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현장 탐방 참석자들.ⓒ뉴시스

보수진영의 반발

일단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는 친일파 파묘에 대해 극렬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6.25 전쟁 영웅으로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웅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보수 야당 역시 백 장군은 현충원에 안장돼야 한다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을 파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KAL기 폭파 사건을 재조사하겠다고 나서면서 또다시 보수 진영은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다.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기는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도양 상공에서 추락한 후 사라졌고, 탑승자 115명이 전원 실종됐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조사를 통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 테러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김현희는 1987년 대선 바로 직전에 우리나라로 압송되면서 당시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KAL기 폭파 사건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당시 전두환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 김현희라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희생자 가족들 역시 김현희의 진술 이외에 증거가 없다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최근 미얀마 안다만 해저에서 KAL 858기로 추정되는 동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희생자 가족들은 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조사를 촉구했다. 이에 결국 정부는 재조사에 나서기로 하면서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도 보인다.

10.26 사건 재조명

이런 상황에서 최근 10.26 사건을 재조명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판 육성 기록이 세상에 공개됐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쏴 시해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 전 부장이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 차 전 실장을 쏘았고, 우발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쏘았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 육성 기록을 통해서 박 전 대통령을 쏜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0.26은 네 번째 시도에서 성공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차 전 실장과의 충성 경쟁에 따른 질투가 아닌 차 전 실장을 쏘아 죽인 것은 ‘덤’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애초 목표는 박 전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이유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진술을 했다. 이로 인해 김 전 부장은 대통령을 꿈꾸며 쿠데타를 모의한 ‘내란’ 혐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혁명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김 전 부장 유족들이 김 전 부장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져서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가 나온다면 거꾸로 박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침해한 독재자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런 역사적 재조명 움직임에 대해 보수 진영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백 장군의 친일파 파묘 논쟁은 결국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사적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26 재심은 박 전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고, KAL기 사건 재조명의 경우에는 전두환 정권이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게 된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바짝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식했던 것이 뒤집히게 된다면 그에 따른 보수 진영은 정치적 입지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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