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면, 6월에는 6월 민주화 항쟁(이하 6월 항쟁)이 있다. 수십년간의 군부독재를 끊어낸 6월 항쟁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각계각층의 시민운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6월 항쟁은 4·13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그중에서도 이한열 열사의 사망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 우리에게 이한열 열사는 국가포격의 무고한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피해자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대표 학생운동가였다. 본지는 학생운동가로서의 이한열 열사의 삶과 그의 죽음이 남긴 대한민국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6월 항쟁을 조명해보는 <6월 그때, 그 사람>을 기획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 세워진 조형물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1987년 6월 9일, 전경이 쏘아 올린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연세대학교 앞에서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린 채 다른 학생에 의해 부축해 끌려 나갔다.

불과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故 이한열은 우리 역사 속에 군부 정권의 독재와 잔인하고 폭력적인 무력진압의 희생자로 남았다.

6월 항쟁의 희생자라는 수동적 이미지와 달리 생전 이한열은 민주주의 탄압에 누구보다 분노했고, 군부독재에 누구보다 앞장서 싸운 주체적 인물이었다.

국가폭력의 안타까운 희생자이기 전에 자랑스러운 학생운동가였던 이한열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한열과 그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사진 제공 =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시위 선봉에 선 학생 이한열

이한열은 농협 직원이던 아버지와 가정주부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위로 셋이나 되는 누나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그는 순하고 조숙했다고 한다.

성적은 월등하게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만 읽고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다. 독서를 좋아하고 시 쓰기를 즐기는 문학청년이었다. 

이한열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한열은 사회 비판적인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성격대로 무난하고 평범할 것만 같은 그의 삶은 대학교 입학과 함께 변곡점을 맞는다.

1986년 이한열은 재수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이 한창이었고, 그곳에서 알게 된 5·18민주화운동의 실체와 군부독재, 민주주의 탄압에 이한열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는 1학년 학기 초 광주지역 동문인 선배의 소개로 학생운동 비밀조직에 발을 담그게 됐다. 당시 비밀조직에 속한 학생들은 학년에 따라 각자 역할이 달랐다.

1학년은 주로 매주 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교내 행사나 시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참여의식이 남다른 학생들은 거리나 가정집에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가두시위에도 참여했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이한열은 늘 시위 선봉에 있었다. 인천 5.3 민주항쟁을 비롯해 5·18 전후 오월 정신 계승 주간 활동 중심에 그도 함께했다. 이한열은 전경과의 갈등을 힘들어하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오월의 마지막 투쟁이 전개됐다. 살인적 가스의 작용으로 민주학우들이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피의 오월이 서서히 잠들어 간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나날들. 많은 것을 잃고 찾아낼 수밖에 없었던 깨달음들. 많은 시간들이 연달아 신문을 장식했고 우리는 집회에서 많은 이슈를 주장했다. 십여개 가량의 이유와 5월 노래들. 강의실 안에서도 그 노랫소리는 은은히 흘렀고, 수업거부의 민주토론에서 우리는 그 노래를 불렀다. 적과 흑으로 얼룩져버린 아이보리. 내가 왜 투석전에 뛰어들어야 했는가. 눈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그 매움조차 느낄 수 없는 투쟁의 선봉에서 왜 나는 그토록 잔인하게 돌을 던져야 했는가. 전경들에게 직접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나의 입이 무색토록 그들은 이미 나의 목표였다. 주먹만한 돌이 전경의 방패를 타격했다. 나의 행동에 대해 타당성은 둘 수 없다. 한 사회 속의 개체로서 느끼는 한계. 인간적인 한계들. 사고의 동물들이 느끼는 한계. 이러한 한계 상황이 오월을 온통 잠식시켰다. ” - 오월, 마지막 투쟁 (이한열 유고글, 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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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의 마지막 6월

1986년 하반기는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수배당하거나 조직 사건으로 구속된 시기로, 학생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공안기관에서는 성과를 올리기 위해 경쟁하듯 반국가단체에 대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일삼고 피해를 조작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듬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발생과 함께 구속돼 있던 학생운동가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학생운동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아침저녁,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우 일상적으로 투쟁을 벌였다.

잦은 시위를 경찰은 원천봉쇄로 막아내려 했다. 각 학교의 시위대는 안전한 시위를 위해 5·18 시민군을 모티브로 한 ‘사수대’를 구성했다. 사수대는 시위대 맨 앞 혹은 뒤에서 경찰의 동태를 살피고, 진압 병력을 온몸으로 막는 역할을 했다.

연세대에는 ‘소크’라는 이름의 사수대가 존재했는데 서클과 학회 남학생들이 많이 차출됐다. 이무렵 표면적으로는 만화에 관심있는 학생들의 모임이지만 실상은 학생운동의 위장 서클이던 만화사랑의 조직활동가를 지낸 이한열도 사수대로 자주 차출됐다. 그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시위 현장에 함께 나간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사수대 역할을 매우 성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그날도 이한열은 선봉에 있었다. 

1987년에는 4·13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이 이어지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은 극에 달해갔다.

분노한 시민들은 6월 10일 전국적으로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계획했고, 이를 하루 앞둔 9일 연세대에서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결의대회가 끝난 후 100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은 어김없이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무자비하게 발사했다.

이 무렵 경찰은 시위 진압용 최루탄으로 SY44(깡통탄), KM25(사과탄), 다연발 최루탄(지랄탄)을 사용했다. 경찰이 진압에 사용한 최루탄 양은 진압용이 아닌 살상용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났다. 최루가스에 오랜 시간 노출돼 피부병에 걸리는 것은 물론, 목표점에 도달한 후 터지는 형태의 깡통탄을 직격으로 맞아 실명하거나 파편으로 부상을 입는 일도 잦았다.

그날 시위에도 경찰은 어마어마한 양의 최루탄을 남발했다. 진압이 고조에 달했던 그 시각 현장에 있던 이한열에게 경찰이 쏜 깡통탄이 날아들었고, 그대로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어가던 이한열은 동료 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현장을 떠났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7일간 사경을 헤맨 끝에 이한열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한열 장례행렬 <사진 제공 = (사)이한열기념사업회><br>
이한열 장례행렬 <사진 제공 =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이 아닌 이한열들을 기억하라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이후 일어난 6월 항쟁은 20일간 폭발적으로 이어졌다. 정권은 여전히 탄압으로 일관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중심이던 시위는 전 국민으로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억눌려 있던 국민들의 감정을 폭발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통스럽고, 억눌리는 상황은 지속돼왔지만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된 이유는 공개된 상황에서의 비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의 경우 진실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한열 열사는 많은 사람이 시위에 동참한 상황에서 숨길 수 없이 벌어진 죽음이었다. 당시 최루탄은 독재정부를 상징하는 폭력적인 도구였고, 이로 인해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사람들의 억눌림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 인문학자 이종우 박사

“1987년 이전에는 소수의 운동가들이 시위에 참여했다면 이후에는 깨어있는 대중들까지 목숨 걸고 나섰다. 6월 항쟁은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낳은 결과다. 6월 항쟁은 한국 사회의 하나의 변곡점이었고, 그 최정점에 이한열 열사의 희생이 있었다.” - ‘한국의 사회운동 연구’ 성공회대 김상숙 교수

이한열은 항쟁의 추동력이 됐고, 그의 죽음에 160만 시민이 애도했다. 일면식도 없던 시민들에게 그 대학생은 남이 아닌 나, 내 친구, 내 가족이었다. 

6월 항쟁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수많은 이한열들의 희생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우리는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룩하기까지 이한열의 죽음이 가지는 의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한열의 죽음이 어느 학생운동가의 희생이 아닌, 당대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수많은 시민들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팽배했던 민주화 요구에 기름을 붓는 촉발제 역할을 했다. 또 학생들 중심의 움직임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번지며 전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변화시키는 한편 군사독재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는 계기가 됐다. 이한열 열사가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바가 결코 축소돼서는 안 되지만, 그 말고도 당시 민주화 열망에 가득했던 수많은 대학생들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인문학자 이종우 박사

*참고 문헌*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이한열>(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김상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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