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는 강남역 10번출구 ⓒ뉴시스
강남역 살인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는 강남역 10번출구 ⓒ뉴시스

 【투데이신문 한관우 인턴기자】 여성 대상 범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됐던 때는 4년 전이다.

지난 2016년 5월 발생한 일명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을 두고 여론은 ‘여성혐오 범죄인가’, ‘묻지마 범죄인가’ 갑론을박을 펼쳤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며 사건의 원인은 가해자의 정신질환이라고 일축했다. 조현병 증상이 있는 가해자가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다 범죄를 감행했다는 게 경찰의 최종 판단이었다. 

하지만 경찰조사 과정에서 가해자가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증언한 점, 앞서 여섯 명의 남성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왔다 나갔지만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가 피해 여성이 들어오자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점 등을 미뤄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지금도 큰 상황이다.

서울역 폭행사건 피의자 이모씨 ⓒ뉴시스
서울역 폭행사건 피의자 이모씨 ⓒ뉴시스

강남역에서 서울역까지

강남역에 이어 서울역에서도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했다.

지난달 26일 서울역의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 앞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이 없는 여성의 얼굴을 가격해 전치 4주 이상의 상해를 입혔다.

이 사건은 피해 여성이 자신의 SNS를 통해서 피해 사실을 밝히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피해 여성은 “피의자가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다가와 고의적으로 어깨를 부딪히고 욕을 했다”면서 “이에 반문하자 주먹으로 왼쪽 눈가를 폭행했다”고 전했다.

철도특별사법경찰대(철도경찰)는 당초 CCTV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사건이기에 용의자 특정이 어렵다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역 외의 CCTV 등을 조회해 용의자를 특정, 긴급체포했다.

이 사건에 대해 강남역 사건과 마찬가지로 ‘여성혐오 범죄’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피의자가 사건 이전에 이웃에 사는 여성을 별다른 이유 없이 폭행한 전력이 있는 점, 사건 직전에도 다른 여성 행인들에게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갔던 점 등이 알려지며 SNS 등에서는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달 16일 열린 피의자의 두번째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서 재판부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 조현병에 인한 우발적 범죄”라고 이번에도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라고 판단했다. 또한 다수 언론도 이 사건을 ‘서울역 묻지마 폭행 사건’으로 보도했다. 

그간 수사기관과 언론은 여성 대상 범죄를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단정하고, 그것이 원인의 전부인 것처럼 몰아가기를 반복했다.

실제 지난 2018년 건장한 20대 남성이 폐지를 줍던 5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숨지게 한 ‘거제 폭행 사건’도, 이달 동작구와 송파구에서 남성이 일면식이 없는 여성 두명을 폭행한 사건도 모두 묻지마 폭행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과 언론이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원인을 결론짓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사이 피해자들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지난 3월 8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바닥에 여성폭력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여성 ⓒ뉴시스
지난 3월 8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바닥에 여성폭력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여성 ⓒ뉴시스

여성폭력의 원인은 여성혐오

최근 국제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故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인해 촉발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다.

이 사건은 인종차별이 불러온 혐오 살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전 세계 각지에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사건들이 단순 폭행이 아니라 혐오범죄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은 유색인종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회적으로 명백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1968년 증오범죄 방지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으며 지난 2009년에는 이를 개정해 인종문제 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 장애인 차별 문제 등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등 증오범죄에 대해 엄격히 대응하고 있다.

이처럼 한 사건을 해석하고 대응하기 위해선 사회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증오·혐오범죄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별도의 법적 처벌은 물론 관련 통계조차 없는 상황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음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자는 삼일에 한번 씩 패야한다’는 폭력적인 메시지가 농담처럼 통용되고 있으며, 강남역 사건에 대해 검찰은 “피의자가 여성과 교제 이력이 있고 여성혐오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지 않는 등 여성을 혐오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여성혐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성들은 여성혐오가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 여성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며 남성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여성혐오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여성혐오적 문화 아래서 여성이 남성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할 때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계에선 여성살인 사건을 ‘페미사이드’로 명명하며 이제는 페미사이드가 없어야 한다고 규탄한다.

사회학 교수 다이애나 러셀이 최초로 사용한 이 용어는 여성(female)과 살해(cide)를 합친 것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되는 일을 말한다.

여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멕시코에선 지난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사이드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12월 여성들을 중심으로 페미사이드 철폐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이 시위 참가들은 故 설리 씨와 구하라 씨 등을 거론하며 이들이 “여성이라 사회적으로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여성들은 여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회의 여성혐오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폭력을 단순한 폭력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시선이 많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성들 ⓒ뉴시스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성들 ⓒ뉴시스

언제까지 외면할 텐가

묻지마 범죄 역시 이런 차원에서 다시 봐야 한다고 여성들은 주장하고 있다. 강남역 사건이 정신질환자의 피해망상으로 벌어진 사건일 수 있지만, 왜 피해망상의 잣대가 여성을 향했나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학자인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서울역 폭행 사건 등은 전형적인 혐오범죄 특성을 보이는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허 조사관은 “혐오범죄는 피해자를 선별한다. 자신이 폭력을 휘둘렀을 때 보복당할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상대를 선택한다. 또 범행의 동기가 없다.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저지른다. 서울역 폭행 사건 등은 이 조건을 충족하는 여성혐오 범죄다”라고 설명했다.

여성계는 이 같은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몰아가는 언론의 보도 행태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 미디어팀 측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서울역 폭행에 대해 “묻지마 범죄다, 여성혐오 범죄다라고 답을 내리긴 힘들다”면서도 “언론에선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묻지마 범죄’라고 단정한다. 언론의 이런 태도가 사건을 심층적으로 바라보기 힘들게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이런 사건들이 기존에도 있었는데, (묻지마 범죄로 단정하는 보도가) 기존 사건들과 이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앞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무엇인지 논의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한다”며 “묻지마 범죄라는 보도를 통해 기존의 묻지마 범죄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로 사건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허 조사관도 “묻지마 범죄는 개인의 분노 등을 이유로 시간과 장소,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것을 말한다”며 “자신보다 약자를 골라 범행을 저지르는 행위를 묻지마 범죄로 묻고 지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가해자들은 비난 대상이 되기 쉽고, 이 과정에서 쌓인 분노가 여성에게 향하도록 오랜 시간 동안 훈련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범행 대상을 여성으로 고른 배경에는 신체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해쳤을 때 받을 사회적 비난이 위중하지 않다는 학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일각에는 여성 대상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라고 부르는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지난달 15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강남역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부르기가 두려웠다. 어떤 어휘가 만들어지면 그 어휘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유의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간 정신질환 가해자의 묻지마 범행으로 치부됐던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 ‘왜 하필 여성이었나’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우리 사회가 ‘묻지마 범죄’로 단정하며 여성혐오라는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간 것은 아닌지 이제는 물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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