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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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부모님과 성(姓)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모성(母姓)으로 바꾸겠다고 하면 허락하시겠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네 마음이지. 근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라고 했고, 아버지는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눈빛과 함께 그 자리를 피했다.

기성세대라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르겠다. 한국은 ‘호주제’를 근거로 자식이 태어나면 당연하게 부성(父姓)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지도 벌써 15년이나 됐다. 이후 관련법 개정과 함께 호주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부성 혹은 모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호주제 폐지 이후 10여년이 흐른 2020년, 자녀 성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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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를 폐지하라

1958년 민법 제정 이전부터 호주제는 존재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존재한 가부장제 가족제도로,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출생·혼인·사망 등 신분 변동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호주제는 부성 계승을 골자로 해 자녀가 부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러다 보니 미혼모나 이혼 가정, 재혼 가정 등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36조 1항에도 어긋나는 문제도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여성계는 호주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여론을 반영해 1989년 가족법에서 호주 권리 및 의무 조항을 대폭 줄이는 등 개선 신호탄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여성계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호주제 폐지 여론을 키워갔다.

그리고 2005년 헌재는 호주제의 근거가 되는 제778조(호주의 정의)와 제781조 1항(자는 부의 성·본 따르고 부가에 입적한다), 제826조 3항(처는 부의 가에 입적한다)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위헌법률 심판을 진행했다. 

재판관 9명은 6대 3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이들 조항이 남성혈통 중심으로 가족을 구성하도록 규정해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적 제도라는 판단했다. 그러면서 호주승계 순위, 혼인, 자녀의 신분관계 형성 등에 있어서도 정당한 사유 없이 남녀를 차별한다고 지적했다.

또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계 유지와 계승을 위해 그들의 의사나 복리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가족관계 형태를 강요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헌재 결정에 따라 이후 민법 제778조와 제826조 3항은 삭제됐으며, 제781조 1항은 개정 절차를 밟게 됐다.

현행 민법 제781조 1항은 ‘자는 부의 성·본(本)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합의했을 경우 모의 성·본을 따를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부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모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2008년에는 호주제를 대체할 가족관계등록법이 새롭게 시행됐다.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을 가(家) 단위로 편성했던 호주제와는 달리 부성주의 원칙 수정, 성 변경 등의 가족제도를 적용해 성 선택의 자유를 더욱 공고히 했다.

<사진 출처 = 혼인신고서 양식 캡처>

의식 변하는데 법 ‘제자리’

부성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오던 국민들의 인식도 차츰 변화했다. 

2018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33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녀의 성결정제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연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7.6%가 부성주의 원칙이 불합리하다고 답했다.

또 자녀의 성 결정 방법에 대해 응답자의 71.6%가 ‘부모가 협의해 선택한다’고, 23.6%는 ‘부모의 성을 함께 사용한다’고 답했다.

2019년 9월 여성가족부가 공개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에서도 ‘자녀 성·본을 부모가 협의해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에 대해 응답자의 70.4%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안타깝게도 미흡한 법제로 성 선택의 진입장벽은 여전히 높다. 관련 제도들은 인식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 중이다. 

민법 제781조의 경우 성 선택은 자녀 출생신고 시가 아닌 부부의 혼인신고 시에 결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혼인신고에서부터 자녀 출산 여부와 자녀 성·본까지 모두 결정해야 하는 셈이다.

또한 혼인신고서의 ‘성·본의 협의’ 항목에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데 협의 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둬 원칙은 부성, 모성은 예외 경우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게다가 모성을 따르기로 결정하면 부성과는 달리 혼인신고서 외에도 관련 협의서가 추가로 요구된다.

만일 혼인신고 이후 모성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는 법원의 허가를 거쳐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이마저도 외국인, 혼인 외 출생, 이혼·재혼으로 성이 달라졌을 때만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최근에는 부성을 우선적으로 하는 민법 조항을 폐지하고, 자녀의 성·본을 혼인신고가 아닌, 출생신고 때 결정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 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는 민법 제781조를 재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부성주의’가 아닌 ‘부부간 협의’를 원칙으로 하고, 자녀의 성·본은 혼인신고 시 정하되, 출생신고 시 변경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정 연령 이상이 지난 자녀가 본인 의사에 따라 성 변경이 가능하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법무부는 위원회 권고를 바탕으로 민법 및 가족관계등록법 등의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법률구조1부장은 “전통적으로 부성을 써왔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고칠 필요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며 “그러나 법에서 특정 성만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는 게 평등한 부부관계나 성 평등의 지향점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조 부장은 인식이 법을 바로잡기보다는, 법 개선을 통해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부장은 “호주제 또한 가족법을 공부하는 학자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려 했다면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법에서 문제점을 간파하고 세계적인 입법 흐름, 지향점 등을 토대도 법제가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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