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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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통해 불완전한 자신을 완성하려 한다. 때로는 그 사랑에 자기 모습을 투영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대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감정의 깊이를 키워간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랑은 기적이라고 했던가. 언제나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같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러기란 쉽지 않다.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 놀라운 경험은 성숙을 위한 계기가 되지만, 반대로 끝없는 추락의 이유가 된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 한 청년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올가을 관객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뮤지컬 ‘베르테르’가 올해로 벌써 20주년을 맞이했다.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내 수많은 ‘베르테르’ 마니아를 양산하며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 묘사를 젊은 감성으로 표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베르테르의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려운 작품이지만, 그래서 또 매력 있는 뮤지컬이다. 이를 증명하듯 조승우, 엄기준, 박건형, 송창의 등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스타 배우들이 모두 주인공 베르테르 역을 맡으며 작품 역사의 맥을 이었다.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되고 있는 이번 20주년 기념 시즌 역시 화려한 캐스트로 기대감을 높인다. 먼저 주인공 베르테르 역에 ‘엄베르’로 오랫동안 무대에 서 온 엄기준을 시작으로 카이, 유연석, 규현, 나현우가 합류하며 5인 5색의 베르테르를 그린다. 그리고 ‘영원한 첫사랑’ 롯데 역에 김예원과 이지혜가, 롯데의 약혼자 알베르트 역으로 이상현·박은석이 열연한다. 베르테르의 거울과도 같은 정원사 카인즈 역은 송유택, 임준혁이 연기하고 펍의 여주인 오르카는 김현숙, 최나래가 맡았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독일 문학가 괴테의 1774년 발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유명 소설이 원작이다. 괴테가 25살 때 쓴 첫 소설이기도 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돼 있으며 후반부는 수신인의 서술로 이어진다. 괴테의 실제 경험과 친구의 이야기가 함께 담긴 내용에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청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현대로 오면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도 생겨날 만큼 당시 이 소설이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력이 엄청나 한동안 발간이 중단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를 최초로 뮤지컬화 한 것이 바로 뮤지컬 ‘베르테르’다. 뮤지컬 역시 원작과 전반적인 흐름은 같지만 생략되거나 다르게 표현한 부분도 많아 느낌이 새롭다. 서양 뮤지컬의 일반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고 스토리와 무대 연출, 음악 등을 국내 정서에 맞게 제작하며 극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한 것도 인상 깊다.

이번 ‘베르테르’에는 직전 시즌이었던 2015년 연출을 맡은 조광화 연출이 다시 합류했다. ‘로맨틱 판타지’ 콘셉트에 맞게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인 발하임을 거대 화훼산업단지로 설정해 노란 해바라기를 베르테르의 상징으로 등장시켰다. 무대 곳곳에 눈에 띄는 해바라기는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영원한 순정을 떠올리게 한다. 전반적으로 따스한 느낌이 감돈 무대에 회색빛 구조물을 더하면서 반전을 주기도 했고, 각 인물들을 상징하는 꽃이나 의상 색감으로도 성격을 표현한다. 이렇듯 뮤지컬 ‘베르테르’는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인 요소가 적절히 어우러지며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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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랑의 경험은 불현듯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던 베르테르는 우연히 자석산의 전설에 대한 인형극을 펼치던 롯데를 보게 된다. 싱그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롯데의 모습을 보고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 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내린 소나기처럼, 롯데는 갑작스레 나타나 베르테르의 삶을 한꺼번에 완전히 적셔버렸다. 롯데 역시 베르테르를 두고 좋은 친구가 생겼다며 행복해하나, 운명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끈다. 뜨거운 사랑을 키워가던 베르테르에게 뒤늦게 알게 된 롯데의 약혼자 알베르트란 존재는 커다란 좌절을 안긴다. 끝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발하임을 떠났던 베르테르지만 결국엔 롯데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그새 달라진 상황에 주체 못 할 감정은 격정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가랑비에 천천히 젖어들 듯, 롯데의 마음속에도 어느 순간부터 베르테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열정과 감성을 상징하는 베르테르와 규율과 이성을 중시하는 알베르트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롯데를 바란다. 롯데는 그 가운데 선 인물로, 내면에 순수하고 따스한 감성을 지녔지만 자신을 감싼 사회적 제도와 틀을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베르테르의 사랑을 인지하고 난 뒤부터 롯데 역시 혼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의 결심을 돌려놓지 못했다. 쓸쓸히 뒤돌아선 베르테르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홀로 남겨진 해바라기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아프게 각인된다.

▲ 최윤영 평론가·공연 칼럼니스트- <br>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공연을 말하다’ 크리에이터<br>-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MC<br>-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br>-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br>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크리에이터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이처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편의 서정적인 동화처럼 펼쳐져 가슴을 울린다. ‘내 발길이 붙어 뗄 수가 없으면’으로 대표되는 30여 곡의 넘버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이 한데 어우러진 현악기 선율도 한몫한다. 이렇게 작품은 애틋한 사랑의 감정과 순미한 감동을 선사하며 추억 뒤 편에 자리한 젊은 날의 초상으로 다시금 기억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새 감상의 기준도 달라진 걸까.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들었던 오래된 넘버가 2020년 오늘에 와선 조금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오르카는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토대로 사랑이 준 고통 때문에 힘겨운 베르테르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는 인물이다. 또 그가 유일하게 기대어 속내를 털어놓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픔을 토로하는 베르테르를 따뜻이 다독이다가도, 그 사랑 역시 지나가고 말면 그뿐이라며 시원하게 뱉어낸 한 마디 한 마디는 소중한 위로로 남는다. 하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오르카가 청춘이 백년인 줄 아느냐며 늦기 전에 누구든 만나라 이르고, 끝내 혼자인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대목은 놀랍게도 예전만큼 와닿지 않는다. 작품 전반을 이끈 테마가 ‘사랑’이고 또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라 그렇다고도 보이지만, 그 역시 주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한 만큼 이제는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젊은’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기에 더욱 고려해 볼 만한 부분이다.   

금단의 꽃을 마음에 품은 대가는 너무도 컸다. 끝 모를 갈망은 결국 한 청년을 영원한 안녕으로 이끌었다. 짧지만 뜨겁게 행복했던 경험을 한 베르테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을 했음에 결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걸 만큼 무모하지만 그만큼 진심으로 가득했던 사랑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누군가 과연 사랑에도 가치를 따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베르테르’를 꼭 만나보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올가을, 베르테르가 전한 낭만과 따스한 위로는 그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감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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