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보호종료청소년 신선·박지애·안지안씨
저마다 사연으로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져
갑작스러운 홀로서기에 무인도 떨어진 기분
끼니 제때 챙기지 못하고 굶는 날도 비일비재
자립지원으로 안정적인 자립 기대하지만 ‘글쎄’
가까이서 도와줄 사람 없어 ‘그림의 떡’일 뿐

경제적 문제나 가정문제, 학대를 이유로 부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은 아동양육시설, 위탁가정, 공동생활가정의 보호 아래 성장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어릴 때 일이다.

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보호종료청소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홀로서기를 해야만 한다. 시설의 보호 아래 정해진 대로 살아왔던 생활과는 달리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하는 자립 후 삶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는 독이 돼 보호종료청소년을 빈곤으로 내몰기도 한다. 자립정착금, 자립수당 등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있기는 하나 스스로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또 생활환경에 변화를 겪는 보호아동에 대한 세심한 지원도 미비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심리적·사회적·경제적 독립으로써의 자립은 어려운 상황이다.

<투데이신문>은  [열여덟, 맨땅에 헤딩] 시리즈를 통해 총 6편에 걸쳐 자립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해 어려움을 겪는 보호종료청소년의 삶을 조명해 봤다. 보호종료 당사자들을 만나 남들과는 다른 인생에 대한 이야기, 자립 준비와 이후 생활,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 등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더불어 전문가들을 만나 보호종료청소년의 안정적인 자립 정착을 위한 정책 과제에 대해 고찰해봤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투데이신문 전소영·김태규 기자】 아늑한 집에서 삼삼오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고, 잠 자고, 시시콜콜 이야기 나누는 일상이 모두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 같아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장면이기도 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혹은 부모로부터의 폭력, 학대 등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정을 떠난 아이들은 양육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 위탁가정 등의 도움을 받아 자라게 된다.

이들은 아동복지법 제16조 ‘보호대상아동의 퇴소조치 등’에 따라 만 18세가 되면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나 세상에 홀로서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보호 체계 아래 규칙적이고 통제되는 삶을 살아오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자유와 책임의 무게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어른이 된 이들을 우리는 ‘보호종료청소년’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2500여명의 청소년이 보호종료돼 자립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직접 겪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는 고충과 고민이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투데이신문>은 남들보다 일찍 혹독한 세상에 내던져진 보호종료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좌충우돌 우여곡절 자립기(記)를 들어봤다.

본보가 만난 신선(28)·박지애(21)·안지안(24)씨는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보호종료청소년들을 위해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냈다.

보호종료청소년으로서의 삶이 세간의 시선처럼 고통스럽거나 세상에 원망스러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쉬움, 안타까움은 있다는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자립 5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신선씨 ⓒ투데이신문

어른이 있었다면

#. 내가 한두 살 무렵, 부모님은 사업 실패로 이혼을 했다. 이후 아버지, 형과 셋이 살게 됐다. 아버지는 재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때마다 친할머니께서 형과 나를 돌봤다. 그러다 내가 9살이던 해, 할머니마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우리를 보육원에 맡겼다.

또래 친구들과 지내다 보니 심심할 틈이 없어 즐겁기도 했지만, 어린아이 취급을 하며 대부분의 개인행동이 제한돼 마치 군대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문에 어서 어른이 돼 보육원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보호종료 기준 연령은 법적으로 만 18세이지만 학업이나 직업교육 이수, 지병 등을 이유로 보호연장이 가능하다.

나는 보육원 원장님의 권유로 대학까지 마친 후 뒤늦게 보육원을 퇴소했다. 성인이 돼서까지 어린 친구들과 생활하는 게 불편했던 나는 매우 행복했다.

하지만 모든 걸 갑작스럽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매우 낯설었다. 마치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집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퇴소 예정 날짜보다 4개월이 지났지만 지낼 곳을 구할 수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LH 주거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갔지만 담당자는 관련 내용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공인중개사도 마찬가지였다. 주거지원을 받으려면 갖가지 서류가 필요한데 집주인에게 사정을 얘기해 설득한 후에야 무사히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대학에 다닐 때,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됐지만 이래저래 생각보다 많은 생활비 지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 학기 교재비만 수십만원이 들었고, 밖에서 식사를 하다 보면 생활비가 모자라기 일쑤였다. 휴대전화 요금을 못내 친구들과 연락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결국 ‘나중에 일하면 갚자’는 심경으로 생활비 대출을 받기도 했다.

이런 내 처지가 원망스럽진 않았다. 다만 홀로서기를 도와줄 어른이 가까이에 있었다면 어려움을 조금 덜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후배들만큼은 내가 겪은 어려움을 그대로 이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자립 5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신선씨

자립 3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케어센터’ 박지애씨 ⓒ투데이신문

맨땅에 홀로서기

#. 어머니는 열다섯의 나이에 아버지 없이 나를 낳았다. 의사는 산모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출산 중에 돌아가셨고, 나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내가 살던 보육원에서는 1명의 선생님이 12명의 아이를 돌봤다. 어린 시절 이모가 나만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나쁜 행동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나는 보육원을 19살이 되던 해 떠나게 됐다. 다른 친구들보다는 1년 빠른 퇴소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퇴소를 통보받고 보육원이 있던 광주에서 대전에 있는 공동생활가정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몇 달 못가 그곳을 떠나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왔다.

시설 밖에서의 삶은 굉장히 팍팍했다. 어떤 가격대의 집이 적절한지 몰라 그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계약해 살았는데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입주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혼자 살다보니 끼니를 거르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의 부탁으로 내 명의의 핸드폰을 개통해줬는데 수백만원 빚만 생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는 시설을 떠난 지 불과 몇 달 만에 수중에 있던 돈을 모조리 탕진했다.

돌이켜보면 돈이 없어서 힘들게 살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어른이 옆에 없어 몰랐을 뿐이다. - 자립 3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케어센터’ 박지애씨

자립 5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케어센터’ 안지안씨 ⓒ투데이신문

매일 외로움 그 자체

#. 어머니는 미혼모 시설에서 나를 낳았다. 어머니가 양육을 포기하면서 나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단체생활을 하다 보니 하기 싫은 일도 많았지만, 친구들과 떨어지지 않는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19살, 마지막 학기를 앞뒀을 무렵 보호종료를 통보받았다. 대학에 입학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원했던 무용을 하고 싶었지만 보육원에서는 취업을 권유했다.

무용이 아닌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자립해 혼자 생활할 때 무용을 하면 경제적으로 버거울 거라고 만류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공장으로 취업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공장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이 외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1년 만에 공장을 빠져나왔다.

공장에서 일하며 모아왔던 돈은 무용을 배우는 데 쓰기로 했다.

멋진 인생을 꿈꿨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공장에서 보낸 1년 동안 무용을 쉬었기 때문에 몸은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용 레슨까지 받으려고 하니 체력도, 정신도 점점 지쳐갔다.

생활도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고, 집은 치우지 않아 매일 어질러져 있었었다. 공과금은 생각지도 못해 밀리고 밀려 한 번에 내느라 생활비를 몽땅 날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잔소리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잔소리를 통해 가르침을 받지만 시설에서 자란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가까이에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는 좋은 분들을 만나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다니며 안정적인 삶을 찾아가고 있다.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론 좀 더 빨리 이런 삶을 누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 나에게 잔소리를 해줬다면, 조언을 해줬다면 자립 후 나의 삶이 조금 더 빨리 안정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 자립 5년 차 보호종료청소년 ‘케어센터’ 안지안씨

세 사람은 자립을 준비하면서 자립 후 정착하기까지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어려움들은 비단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나라 보호종료청소년의 상당수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부터 취업이나 학업, 진로 등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애먹거나 포기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는 시설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보호종료청소년을 위해 자립정착금과 자립수당, 주거, 교육, 취업 등을 지원한다. 또 자립전담요원을 두고 자립 계획 수립부터 자립 후 사후관리 등을 돕고 있다. 

어른들은 이러한 지원을 토대로 보호종료청소년 스스로 충분히 자립 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 막연한 기대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수당과 자립정착금 등은 집을 구하고 생계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다. 때문에 보호종료청소년의 10명 중 7명은 대학진학 대신 취업을 택하고 있다. 이마저도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 생계를 위해 진로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나 자격증 취득, 기술 습득 등을 위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 빠르게 취업이 가능한 서비스 판매직, 공장 등과 같은 단순 노무 업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자립 후 연락이 두절되면 어떻게 사는 지 조차 파악하기 어려운데, 그러한 보호종료청소년은 4명 중 1명 꼴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꾸준히 호소돼왔지만 우리 사회는 그간 보호종료청소년의 퇴소 후 삶에는 너무나 무심했다. 보호종료청소년들은 무관심 속에 또래 친구들은 경험해보지 않을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어야 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들은 일찍 어른이 돼버렸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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