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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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연애

이진우

 

 큰일 났다. 화장실에 다녀 온 사이 일행들이 사라졌다. 먼저 식장으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오 분 전에 처음 본 사람들이라 얼굴도 못 익혔는데. 서둘러 손에 남은 물기를 허공에 털어낸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곽 과장, 유 부··· 아니, 용 부장, 좌 대리··· 곽 과장, 용 부장, 최 대리, 아니, 조 대··· 아니, 좌 대리···
 어째 하나같이 희성들이었다. 대사 외우는 건 자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5층에 도착할 때까지 외울 수 있을까. 외운다고 한들 얼굴과 매치시킬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영어 시험을 앞둔 고등학생처럼 입에 붙지 않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곧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곽 과장, 오 부, 아니, 용 부장, 좌 대...
 코드가 뽑힌 TV처럼 혼잣말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을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은 이미 눌러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내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정장이었다. 햄릿이었나?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입었던 검은색 타이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거울 삼아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넥타이를 고쳐 멨다.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마지막으로 팔자 주름 사이에 들러붙은 속눈썹을 떼어내고 나서야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맞아, 사람이 있었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 여자는 유난히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는데 유난히 하얀 피부 때문이었다. 유난히 하얀 피부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이 유난히 싸늘해 보였다. 헤어진 남자의 결혼식에 깽판이라도 치러 가는 걸까. 저런 표정이라면 깽판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5층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곁눈질을 했지만 여자의 시선은 오로지 엘리베이터 문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빨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지만 초조해 보이진 않았다. 곧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자는 전동 킥보드라도 탄 듯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고 그제야 중요한 게 떠올랐다.
 곽 과장, 유 부··· 아니, 용 부장, 좌 대리··· 곽 과장, 용 부장, 최 대리, 아니, 조 대··· 아니, 좌 대리···

 곽 과장과 용 부장, 좌 대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랑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김 대리고 나를 고용한 사람이겠지. 잠시 후 김 대리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김 대리는 자신의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치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마침내 김 대리의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던 좌 대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흔들었다.
 “야아아!”
 하마터면 나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비명이 들린 곳을 돌아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여자가 신부의 손을 부여잡은 채 날뛰고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예뻐!”
 엘리베이터 안에서 봤던 그 싸늘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여자였다니. 3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여자는 웨딩드레스에 대한 신부의 안목과 메이크업 상태를 칭찬했고 이토록 성대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에 대해 축하하는 마음과 동시에 질투를 감출 수 없다는 얘기들과 아직까지 마땅한 남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쏟아냈다. 빠르지만 정확한 딕션이었고 적절하게 배치된 휴지와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리듬감이 일품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 거리에서도 들릴 만큼 풍부한 성량이라니.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도를 높여 김 대리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야! 못 알아볼 뻔 했어! 강 대리!”
 그래도 씨발은 속으로만 외쳐서 다행이다.

 “만 원은 수수료인 거 아시죠?”
 알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처럼 중개인이 내 앞에 이 만원을 툭 던져 놓았다. 마치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던 조연출 같은 눈빛이었다. 일당을 받고 물러나자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용 부장이 중개인 앞에 섰다.
 “오늘 진짜 너무 잘해주셨어요!”
 중개인은 용 부장의 손을 부여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허 참, 젊은 친구가 정신머리하고는! 아 글쎄 아직도 나랑 오 부장을 헷갈린다니까. 저번에는 어쨌는 줄 알아? 오 부장 생일에 나한테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냈더라고. 내 생일 때 술까지 얻어 마신 친구가 말이야! 허허허!
 용 부장은 놀라운 애드립으로 나의 실수를 무마함과 동시에 웃음을 유도했다. 한 번도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부장이란 사람들은 진짜로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저기···”
 흰 봉투에 담긴 일당을 챙긴 용 부장이 내 옆을 지나갈 때 그를 불러 세웠다. 용 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연기하세요?”

 커피 한 잔에 오천 원. 이만 원을 벌어서 오천 원을 쓰는데 십 분도 안 걸렸다. 이런 식으로 살다보면 한 달 안에 파산하겠지. 용 부장은 얼마를 받아갔을까. 남자가 가져간 만 원이 수수료가 아니라 벌금 같은 건 아니었을까. 곧 진동벨이 울렸고 카운터에서 커피와 냅킨을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몇 모금 홀짝거렸을 때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잠시 망설이다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뵌 분 맞으시죠?”
 여자는 연기를 하느냐고 물었을 때의 용 부장 같은 눈빛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킬 수도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앉아도 될까요?”
 여자는 정지 화면처럼 나를 쳐다보다가 책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앉으라는 의미인지 짐을 싸서 떠나겠다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책이 있던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 커피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같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여자의 얼굴은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싸늘했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근데 이제 뭘 하지. 그제야 아무 계획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침묵이 길어지자 여자가 몸을 뒤척였고 나는 여자가 내 뺨이라도 후려칠까 움찔했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악명 높은 형사 앞에서 취조당하는 수배범의 감정이란 게 이런 것이었을까. 그걸 세 달 전에만 알았더라면 오디션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거고 가짜 하객 노릇 따위도 하지 않았겠지. 여자는 다시 책을 꺼냈다. 회색 표지에 프랑스어로 짐작되는 글자들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할 말이 떠올랐다.
 “혹시··· 연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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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지는 얼어 있었다. 촬영 장소인 저수지 옆 공터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두꺼운 롱패딩에 마스크를 착용한 스탭들이 저마다 하나씩 커다란 대비와 눈삽을 들고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화면에 눈이 보이면 안 되니까 쌓아놓지 마.”
 팔짱을 낀 채 눈을 치우는 스탭들을 지켜보던 PD가 말했다. 스탭들은 군말 없이 눈삽에 눈을 퍼 담고 카메라 앵글이 닿지 않을 곳으로 가져가 뿌렸다. 눈 밑에 깔려있던 흙이 모습을 드러내자 촬영팀이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돌아보니 똑같이 생긴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둘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똑같은 자세로 커피를 들고 있었고 똑같은 색깔의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이 대머리였다. 이거 대학생 졸업 영화 아니었나. 대머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학생이라고는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들의 머리 모양이 자의적 선택에 의한 것인지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둘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누구랑 먼저 악수를 해야 할까. 나는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와 먼저 악수를 한 다음 왼쪽에 있는 대머리와 악수를 했다.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와 먼저 악수할 때 왼쪽에 있는 대머리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장면이 저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맞아요. 늘 바보처럼 헤헤거리던 모자란 남자의 내면에 실은 억압된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거든요.”
 “빌 클레버리의 영화처럼 말이에요.”
 빌 클레버리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이게 시나리오 상으로는 주인공의 환상인데 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게 중요한가요?”
 “이건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시나리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현실의 이미지와 일치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라캉이 그랬죠.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타자에게 종속된 욕망은 주체의 삶으로 온전히 편입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욕망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두 대머리는 사전에 준비라도 한 듯 호흡을 맞춰 서로의 말을 이어갔다.
 “아, 이제 이해가 되네요.”
 둘은 동시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가서 의상 갈아입고 오시죠. 준비 되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시간 동안 얼어붙은 저수지 옆에서 팬티 바람으로 춤을 췄지만 오케이 싸인은 나오지 않았다. 대머리 형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렸고 다 좋은데 한 번만 더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대체 다 좋은데 왜 한 번 더 가야 되는 걸까. 마침내 슬레이트의 숫자가 20을 넘겼을 때 그들은 잠깐 쉬었다가 가자고 말했다. 제작부 스탭 하나가 자신이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 나에게 덮어주었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내가 팬티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그냥 받아들기로 했다. 모두를 위해서 그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보조 출연자에게 다가가 담배를 빌렸다. 내가 팬티 바람으로 춤을 추고 있을 때 옆에서 에스키모처럼 두꺼운 털옷을 입고 춤을 추던 댄서들 중 한 명이었다. 이 남자의 내면에는 대체 어떤 욕망이 억압되어 있는 걸까.
 “잠시만요.”
 코쿤 털 뭉치가 달린 후드 밑에서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자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건넸다. 담배를 입에 물고 ‘여섯 시간 촬영에 십 만원’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출연을 결정한 나의 경솔함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
 갑작스러운 말에 여자를 돌아봤다. 여자는 모자를 벗으며 소리 쳤다.
 “저 희주예요!”
 박희주. 2년 전쯤에 연기를 배우던 학생이었다.
 “아! 희주!”
 희주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 다가갔다가 동시에 물러섰다. 나는 얼른 뒤돌아 패딩의 지퍼를 채우고 목 끝까지 올렸다. 다시 돌아봤을 땐 희주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희주야.”
 “네?”
 “불 좀···”
 희주가 주섬주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선생님. 학원 옮기셨어요? 얼마 전에 놀러 갔는데 안 계시던데.”
 곁눈질로 눈치를 보던 희주가 물었다.
 “그만뒀어. 제대로 연기 좀 해보려고.”
 사실은 잘린 거였다. 담당하던 대학의 연극영화과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학교는 나의 모교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다른 학원에 취업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여긴 어쩐 일이니?”
 “영화 찍으러 왔죠.”
 희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 형제 맞지?”
 “당연하죠.”
 희주가 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구나···”
 희주의 표정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힘드시죠?”
 “아니 뭐, 이 정도 갖고.”
 희주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원래 쟤네들이 이상한 거 좀 많이 찍어요. 아, 선생님 쟤네 별명이 뭔 줄 아세요?”
 희주가 갑자기 혼자 키득거렸다.
 “뭔데?”
 희주는 주위를 살피더니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고함 형제요.”
 “아, 그런 사람들 많지 뭐. 연출하는 친구들 중에 안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희주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고함이 뭔지 모르세요?”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희주를 쳐다보았다.
 “아이참, 그것도 모르세요? 불알이요!”
 희주는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거렸다. 그러다 담배 연기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해대며 주저 앉았고 턱으로 쏟아진 침을 아무렇지 않게 슥슥 닦아냈다. 처음 학원에 들어 왔을 때 친구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다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였다. 내 연기 교육이 성공적이었던 걸까. 국어 교육이 실패한 것은 분명했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니?”
 희주가 애교스럽게 혀를 한 번 내밀고는 대답했다.
 “중학교 때부터요.”
 나는 희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염색을 한 것 빼고는 학원을 다닐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시 갈게요! 배우 분들 준비해 주세요!”
 멀리서 제작부 스탭이 소리쳤다. 나는 다시 패딩을 벗었고 희주는 다시 코쿤 털이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출발하기 전에 나는 희주에게 물었다.
 “빌 클레버리가 누군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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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십 분째 수연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나란히 걷기도 힘든 좁은 골목이었는데 수연이 앞장 서서 걸었고 나는 뒤따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다 똑같은 골목이어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길을 잃은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수연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진짜 이런 곳에 극장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수연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이 수연이란 것과 핸드폰이 없다는 것이 그녀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다시 말해 그날 카페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도 이게 전부였다. 굳이 추가 하자면 그녀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녀의 번호를 물었을 때 그녀는 핸드폰이 없다고 대답했다.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지. 명백한 거절 앞에서 낙담해 있을 때 수연은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 위에 내 번호를 쓰게 했고 오늘 오전에 전화가 왔다.
 발신자 정보 없음
 액정에 뜬 문구가 꼭 수연의 표정 같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수신자 부담 전화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연결을 원하시면 별표를 눌러주세요.
 핸드폰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표정한 여자. 그 표정에 홀린 멍청한 배우 지망생. 가도 가도 똑같은 골목. 불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그러나 이 미로 같은 골목을 혼자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수연이 멈춰 섰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3층 건물 앞이었는데 어떤 간판도 붙어 있지 않았고 심하게 녹슨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셔터가 올라갔고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센 턱수염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상태였다. 꼭 대부에 나온 말론 브란도 같았다. 수연은 남자와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바로 수연을 따라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가 가버린다고 한들 수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곧 시작합니다.”
 정말 극장이란 말이야? 남자는 나를 향해 숱이 많은 흰 눈썹을 한 번 씰룩거렸다. 네가 생각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안 보면 후회할 걸, 하는 은근한 도발이 뒤섞인 눈짓이었다. 나는 수연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셔터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원은 왜 그만두셨어요?”
 이력서를 훑어보던 원장이 말했다.
 “아, 그게··· 집안 사정 때문에···”
 학부 시절부터 열심히 따랐던 교수의 꼬임에 넘어가 대학원에 갔고 태도가 돌변한 교수의 온갖 사적 심부름, 이를테면 컴퓨터 수리, 논문 자료 조사, 지인의 결혼식 참여, 가족의 이삿짐 도우미 등에 질려 그만두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하철에서 빈자리 하나 딱 났을 때 서로 앉으려고 달려들지? 그게 교수 자리야!
 교수 자리 운운하며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던 교수의 말이라 열이 받기는 했지만 비유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미련 없이 대학원을 그만두었으니 교수로부터 배운 것들 중 유일하게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강사 생활을 전전하는 대학원 동기들을 보면서 그 지하철이 아침 8시에 신도림역으로 가는 2호선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원장은 이력서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원장실을 나서려고 했는데 원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원장은 다시 파일을 열어 이력서를 들여다보더니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학교 연극영화과 없어지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수연은 수신자 부담 전화로 연락했다. 이번에도 미로 같은 골목을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말없이 뒤따라 걸었다. 목적지는 허름한 3층 건물의 지하. 우리가 앉은 자리를 포함해 여섯 개 정도의 테이블 있는 작은 바였는데 벽에는 영어가 아닌 것이 분명한 글자들이 인쇄된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영어가 아닌 것은 분명한 가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은 바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수연이 깨워 주문을 하자 빠른 손놀림으로 칵테일 두 잔을 만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바에 엎드려 잠들었다. 수연은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부른 건 수연이었지만 그녀는 네가 불렀잖아,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날 극장을 나온 뒤 영화에 대해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수연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저번에 봤던 영화 너무 좋았어요.”
 수연이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사실 기억에 남는 건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스크린을 바라보던 수연의 옆모습 뿐이었다. 그곳은 극장이라기보다는 DVD방에 가까웠는데 푹신한 4인용 소파와 스크린 하나가 전부였고 그 은밀한 분위기 때문에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수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힐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영화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알몸의 남자가 얼어붙은 강가에서 해괴한 춤을 추는 장면과 A Film by Bill Clavery라는 자막뿐이었다.
 “특히 그 장면 있잖아요. 얼어붙은 강가에서 나체의 남자가 성기까지 덜렁거리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요. 옆에서는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다 가린 여자 댄서들이 춤을 추고요. 그게 뭐랄까··· 굉장히 메타적으로 느껴졌어요.”
 수연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회임이 분명했다.
 “사실 굉장히 이상한 장면이잖아요? 계속해서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영화이고 그 장면도 남자의 환상이라고 봐야 하는데 갑자기 인물이 바뀌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현실의 이미지와 일치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죠. 라캉이 그랬었죠.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저는 그 씬이 타자에게 종속된 욕망이 주체의 삶으로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는 간극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신부의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던 수연처럼 한 호흡에 말을 쏟아냈다. 완전한 몰입. 메쏘드. 간절한 내적 동기가 강력한 정서적 기억과 만났을 때 빚어지는 마법. 나는 진짜 빌 클레버리의 영화에 감동한 관객이었다. 대사를 다 끝내고도 한동안 감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미있네요.” 
 나는 최면에서 풀려나듯 수연을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연이 웃고 있었다. 진실한 연기만이 관객을 감동시킨다. 나는 흥분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름다운 보랏빛과는 달리 바카디보다 독한 향 때문에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참아보려 했지만 기침이 터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은 재미있다는 듯 조금 더 크게 웃었다. 흐름을 놓칠 수 없었다. 페르소나. 접신. 또 다른 인격. 예술가병 걸린 선배들의 허풍 정도로 취급했던 바로 그 상태로 빠져들었다. 쉴 새 없이 대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수연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빠른 속도로 빈 잔이 늘어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 수연이 결혼식장에서 봤을 때처럼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혼자 누워있었다.

  여전히 저수지는 얼어있었다. 촬영 장소인 저수지 옆 공터에도 다시 눈이 쌓여 있었다. 두꺼운 롱패딩에 마스크를 착용한 스탭들이 저마다 하나씩 커다란 대비와 눈삽을 들고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화면 안에 눈이 보이면 안 되니까 쌓아놓지 마.”
 팔짱을 낀 채 눈을 치우는 스탭들을 지켜보던 PD가 말했다. 스탭들은 군말 없이 눈삽에 눈을 퍼 담고 카메라 앵글이 닿지 않을 곳으로 가져가 뿌렸다. 눈 밑에 깔려있던 흙이 모습을 드러내자 촬영팀이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고함, 아니 고환 형제는 동시에 악수를 청했다. 나는 왼쪽에 있는 대머리와 먼저 악수를 한 다음에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와 악수를 했다. 왼쪽에 있는 대머리와 먼저 악수할 때 오른쪽에 있는 대머리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재촬영을 하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맞아요. 늘 바보처럼 헤헤거리던 모자란 남자의 내면에 실은 억압된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거든요.”
 “빌 클레버리의 영화처럼 말이죠.”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대머리 형제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번에도 두 시간 동안 얼어붙은 저수지 옆에서 팬티 바람으로 춤을 췄지만 오케이 싸인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대머리 형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렸고 다 좋은데 한 번만 더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슬레이트의 숫자가 20을 넘어갔지만 쉬는 시간은 없었다.
 “춤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 추나요?”
 23번째 테이크가 돌아가던 중 왼쪽에 앉은 대머리가 버럭 짜증을 냈다.
 “난 좋은데 왜.”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머리가 말했다.
 “이게 좋다고? 진심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스탭과 배우들은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눈빛들을 교환하며 눈치를 살폈다. 촬영감독은 녹화 중지 버튼을 누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어떻게 추는 게 좋을까요?”
 “그냥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해. 훨씬 더 양식적인 몸짓이어야 한다고. 지금 춤추는 꼴을 좀 봐. 꼭 여자 뒤에 착 달라붙어서 추는 클럽 댄스 같잖아. 금요일 밤 홍대에 가면 널려 있는 놈들 말이야! 아주 현실적이지!”
 내 기억이 맞다면 빌 클레버리의 영화 속 남자는 정확히 그런 춤을 추고 있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또 다른 대머리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곧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 설마··· 빌 클레버리가 표현주의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넌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데!”
 두 대머리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들은 빌 클레버리의 영화가 표현주의냐 표현주의를 가장한 사실주의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봤다면 이 상황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본 건 나체로 춤을 추는 남자와 수연의 옆모습뿐이었다. 마침내 빌 클레버리의 영화가 표현주의임을 주장한 대머리가 빌 클레버리의 영화가 표현주의를 가장한 사실주의임을 주장한 대머리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대머리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다른 대머리를 덮쳤고 두 대머리는 그대로 뒤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곧 모든 스탭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팬티는 왜 입고 있는 거야! 이건 빌 클레버리잖아! 그럼 팬티를 벗겨야 된다고!”
 바닥에서 한 번 뒤엉킨 탓에 악을 쓴 게 빌 클레버리의 영화가 표현주의임을 주장한 대머리인지 표현주의를 가장한 사실주의임을 주장한 대머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돈 많아요들?”
 두 대머리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소품을 사러 갔다가 돌아온 PD가 팔짱을 낀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고환 형제를 향해 걸어가자 길을 막고 있던 스탭들이 홍해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아침에도 말했죠. 이미 한참 전에 제작비 오버됐다고. 영화 안 찍을 거예요?”
 두 대머리는 초콜릿을 두고 싸우다 엄마에게 들킨 꼬마들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시 준비해요! 시간 없어요! 돈은 더더욱 없고요!”
 PD의 한 마디에 고환 형제를 포함한 모든 스탭들은 일사분란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내가 팬티만 입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살이 베인 듯 아파왔지만 촬영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오케이 싸인은 15번의 테이크가 더 돌고나서야 나왔다. 수연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그날 이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엔딩 크래디트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곧 관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고 사회자가 고환 형제를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두 대머리가 클로드 고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할 때쯤 극장을 빠져나왔다. 흡연 구역으로 갔을 때 담배를 피우고 있는 희주가 보였다. 피하려고 했는데 희주가 나를 불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희주 옆으로 갔다.
 “어떡해요. 추운데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희주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은 무슨. 네가 더 했지.”
 희주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희주야.”
 “네?”
 “불 좀···”
 희주는 핸드백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힝, 개고생만 하고 이게 뭐예요.”
 희주가 허공으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나는 희주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연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따가 뭐하니?”
 “친구 만나러 가요.”
 “그렇구나.”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희주는 마지막으로 길게 담배 연기를 뱉은 뒤 능숙하게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껐다.
 “갈게요 선생님! 다음에 또 봬요.”
 “그래 연락해.”
 희주는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희주를 불렀다. 희주가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용기를 내 물었다.
 “클로드 고반이 누군지 아니?”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 골목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힘든 좁은 골목, 빌 클레버리의 영화를 틀어주던 이상한 극장, 바카디보다 독한 보랏빛 칵테일을 팔던 이상한 바. 문득 그런 곳들이 진짜로 있긴 했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번호가 찍힌 액정을 보자 어쩐지 우울해졌다. 전화는 얼마 전에 면접을 봤던 연기 학원의 원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원장은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다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면서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 당선소감 / 이진우(남, 1988년생, 프리랜서 영상촬영가)

△ 소설 부문 당선자 이진우

출근길에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에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당선 소감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감사한 분들의 이름부터 불러보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른 길을 선택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 효윤이와 가족들, 지루했던 대학 생활을 풍요롭게 해준 Bassment167의 멤버들, 한 번도 소설을 가르쳐주신 적은 없지만 늘 소설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해주신 이효인 교수님, 부족한 글을 작품이라고 불러주시고 가능성을 높게 사주신 김현숙 작가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문학이 직업이 되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험서를 읽듯이 소설을 읽었고 이력서를 쓰듯이 소설을 썼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고 이제 문학은 저에게 취미(趣味)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문학이 직업이라는 형식이나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저에게 주신 이 기회가 제가 작가임을 증명하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부디 문학에 대한 애정과 즐거움을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의 편지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끝까지 쓰겠습니다.

■ 심사평 / 김현숙(소설가)

작가 지망생들의 신선하고 풋풋한 응모작을 읽는 일은 늘 새로움과 설렘을 동반한다. 그건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황을 이뤄 소설 부문만 128편.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 온 작품은 총 10편이었다. 올해의 특이점이 있다면 응모자 대다수의 연령이 20대에서 40대 초반이라는 사실, 그리고 직장인신춘문예의 특성상, 모두 자신이 처한 일터에서 땀 흘려 일한 절절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 참신하고 생생한, 실험적 기법의 수작이 많았고 그만큼 심사가 용이하질 않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 온 10편의 작품 중 선자의 시선을 끈 작품은 「수족관, 미늘」, 「바늘빼기」, 「빈집이 전해 준 말」, 「영원히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상한 연애」 등 5편이었다. 모든 작품이 각각 장점과 단점이 눈에 띄어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수족관, 미늘」은 붕장어 식당을 운영하는 아픈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일을 배우는 딸의 모습이 대견하고 아릿한 감동으로 다가왔고, 유려한 문체, 은비늘처럼 빛나는 섬세한 감각이 단연 빼어났으나 작품 전반을 흐르는 뭔지 모를 기시감이 맘에 걸렸다. 보다 신인다운 참신함과 패기를 기대한 탓일까. 특히 결말 부분의 상투성이 흠결로 남아 아쉬웠다.

「바늘빼기」의 경우, 원고 말미에 ‘집필 경험 없음’ 이라 본인이 밝혔듯 구성이나 문장의 유연성은 떨어지나 이야기 전반에 걸쳐 고교 동창들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고 무엇보다 죽은 친구에 대한 화자의 우정이 후반에 갈수록 더욱 짙게 드러나 감동을 자아내는 점이 강점이었으나, 결말의 미흡함이 선정의 감점 요인이 되어 제외되었다.

「영원히 시작하는 마음으로」는 부자(父子) 두 사람이 모두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잔잔한 상생이 고요한 울림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열네 살이나 연상인 여자와의 결혼을 앞둔 화자의 갈등과 고뇌에 대한 천착보다는, 교회의 이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 종교적인 분위기로 흘러 직장인신춘문예의 취지와는 다소 좀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렸음이 안타까웠다.

「빈 집이 전해 준 말」은 알바로 중국집 배달원을 하는 화자가 인근 가구점 사장의 부탁으로 막 이사간 어느 젊은 여자의 새집을 방문, 서류에 도장을 찍어 오라는 심부름을 맡는다. 그러나 도착한 집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현관문은 잠겨 있질 않아 가구점 사장의 허락으로 겨우 집안에 발을 들인다. 이삿짐이 미처 정리되지 않아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는 짐더미 속에서 화자는 한 권의 앨범을 발견하곤 무료함과 호기심에 무심코 그것을 뒤적이다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다소는 황당한 설정이나 생에 대한 나름의 따스한 시선과 사유가 끝까지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구성의 묘미가 결여된 평면적 서술, 그리고 수필적 요소 다분한 결말 부분의 미약함이 끝내 선택을 미루게 했다.

「이상한 연애」는 매우 모호하고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고실업시대의 불운 속에 직장, 연애 등 그 어느 것에도 정체성을 찾지 못해 부유할 뿐인 젊은이의 초상을, 짐짓 무척 예사로워 보이나 결코 예사롭지 않은 문체로 담아 낸 솜씨가 놀라웠다. 더없이 평이한 서술 속에 번뜩이는 풍자와 위트, 유머가 숨겨져 있음은 대단한 재능이다.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웃프다는 말, 그 웃픔, 페이소스 속에 한 가닥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어법도 독특하였다.

라캉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화자의 모든 행위를 그에 대입하자면 그 모든 것은 연극영화과 출신답게 한낱 연기를 위한 연기일 뿐인 것. 문장의 잦은 생략법으로 단락 간 의미 전달이 명확치 않은 점, 빈번한 행갈이 등 몇 가지 미흡함이 남긴 했으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점차 완숙해 갈 것을 믿기에 기꺼이 당선작에 올린다. 역량 있는 신인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 외 모든 응모자들에게도 꾸준한 정진과 문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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