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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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평범한 일상이었다. 회사를 다니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피곤에 취해 깊은 잠에 드는 특별하지 않은 삶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일상인줄 알았는데, 고작 가습기살균제 따위가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잠 한번 제대로 편하게 잘 수 없는 아픈 몸은 미래를 그리며 열심히 해오던 일을 그만두게 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스라졌다. 예상치 않은 인생의 변화에 가족 모두 지쳐갔고, 마음에 없는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때로는 ‘가습기살균제를 사지만 않았더라면’이라는 죄책감에 몸서리치곤 한다.

이것이 2021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삶의 현주소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재성씨 ⓒ투데이신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재성씨 ⓒ투데이신문

가습기살균제가 무너뜨린 일상

몸은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었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피곤하고 숨이 좀 차다고 생각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가습기살균제가 건강 구석구석을 갉아먹고 있다고 몸이 보내는 신호였다.

이재성(56)씨는 2001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해왔다. 아파트에서 살았던 이씨는 겨울철만 되면 건조한 실내 공기 탓에 가습기를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가습기 세균을 박멸해 준다는 가급기살균제를 우연히 알게 됐다. 그것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주로 아파트 생활을 했었습니다. 겨울만 되면 난방 때문에 실내가 건조해져 건강에 안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집에 있던 가습기를 사용했어요. 집집마다 가습기를 두고 사용했던 시절이었거든요. 하루는 마트에 갔는데 가습기살균제가 한편에 줄지어 진열돼 있더라고요. 그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제품을 하나 집어 들었죠. 옥시 제품이었어요. 워낙에 지명도가 높은 회사라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씨가 건강에 이상 징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해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2년이 지난 2003년경이다. 당시 그는 가습기살균제가 어떤 비극을 몰고 올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숨이 차고 몸이 점점 지쳐간다는 걸 느꼈어요. 하루가 다르게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죠. 담배는 전혀 하지 않고, 술도 잘 안 마시는 편인데 이상신호를 느껴 의아하긴 했죠. 그렇다고 큰 병원에 가야겠다고는 생각 안 했어요. 그저 동네 병원 다니면서 비염, 두통 등의 약만 처방받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죠.”

2011년 8월 매스컴을 통해 접한 당시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의 역학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폐 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씨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모두 가습기살균제 때문이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씨는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한 2001년부터 역학조사 결과가 발표된 2011년까지, 가습기살균제를 무려 10년가량이나 사용했다. 그러니 폐나 호흡기가 좋을 리 만무했다. 이씨뿐만이 아니었다. 이씨보다 조금 늦은 2005년경부터 6년 정도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던 아내와 아이도 피해를 입었다.

“2017년경에 CT 촬영을 했는데 ‘무기폐’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폐가 상당 기간 동안 찌그러진 상태였다고 하더라고요. 범위가 넓진 않지만 폐섬유화도 진행 단계에 있다고도 하더라고요. 지금은 천식과 기관지확장증 증상도 있습니다. 아이도 어릴 때 천식을 앓았습니다.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소아과에서 급성기관지염 같은 약만 처방받아 먹인 거죠.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아내 또한 천식 증상으로 병원을 내원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가습기살균제는 평범했던 이씨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여생의 업으로 삼으려던 택시 운전대를 놔야 했고, 취미 생활로 즐기던 등산도 멈춰야 했다.  

“개인택시 운전을 했어요. 70세에서 길게는 75세까지도 할 수 있는 일이라기에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빨리 시작했죠. 그런데 몸이 점점 하루종일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상태가 안 되더라고요. 결국 접고 지금은 요양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사무실에서 앉아 하는 일 아니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요. 이 때문에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절도 있어요. 일을 제대로 못하니 수입은 없고, 생활이 제대로 안 된 거죠. 그런 게 쌓이다 보니 불화가 늘더라고요. 일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기고요. 산악회를 다녔는데 조금만 올라도 숨이 차다 보니까 가기가 어려웠어요.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많은데 제가 힘들어하는 거 보면 안 좋게 보게 되잖아요. 자꾸 아픈 곳은 늘어나고 매일이 전쟁 같아요.”

정부는 폐 질환, 천식, 태아피해 등을 대표적인 가습기살균제 피해 질환으로 보고, 피해 종류와 정도에 따라 △거의 확실(1단계) △가능성 높음(2단계) △가능성 낮음(3단계) △가능성 거의 없음(4단계) 등 총 4단계로 분류해 왔다.

가습기살균제와 질병의 인과관계가 비교적 높다고 판단되는 1·2단계 피해자는 구제급여를 지급하고, 상대적으로 낮다고 평가되는 3·4단계 피해자는 ‘특별구제계정 급여’라 불리는 구제급여가 지급된다. 

하지만 정부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이씨는 피해 불인정자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병이 한두가지가 아닐 텐데 몇가지만으로 국한해 피해자 인정 여부를 판단한다는 게 이씨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씨의 자녀는 천식으로 4단계 피해자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를 인정받은 아이도 약 값을 지원받는 수준이 마저도 절차가 복잡해 몇달은 족히 걸린다.

“저는 불인정자입니다. 아이만 특별구제계정이 생기며 2018년에 천식으로 4단계 피해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이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병으로 병원에 가면 약값 정도만 지급되고 있어요. 피해자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길어요. 근데 피해자로 인정받아 보상을 받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병원에서 약을 타 그걸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신청해 판정을 받아야만 그에 대한 비용이 지급되는데 몇주가량 소요됩니다.”

지난 2019년 5월 7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전신질환 인정·판정기준 완화, 피해단계 구분철폐를 요구하는 삭발식에 참여한 이재성씨 ⓒ뉴시스
지난 2019년 5월 7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전신질환 인정·판정기준 완화, 피해단계 구분철폐를 요구하는 삭발식에 참여한 이재성씨 ⓒ뉴시스

이런 와중에 최근 전해진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의 무죄 판결은 이씨를 한번 더 좌절시켰다. 가장 먼저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당시 유공, SK케미칼만큼은 유죄가 나오리라 확신했다. 이씨는 1심 판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2심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기저를 달리 보고 반드시 뒤집힌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시레킷벤키저가 가장 많은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해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근데 가습기살균제를 가장 먼저 만들어 판매한 건 SK케미칼입니다. 그럼에도 옥시레킷벤키저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애경산업도 마찬가지고요. SK케미칼은 원료 개발자입니다. 다양한 제품에서 가습기살균제 성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정말 충격도 컸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최소한 옥시레킷벤키저만큼은 벌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환경독성에 대한 인간과 동물의 기저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걸 재판부가 잊지 않길 바라는 거죠. 과거에 임산부들한테 판매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입덧 예방약)도 동물실험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나 기형아가 출산돼 사용이 금지됐었습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씨는 최근 활동기간이 연장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그는 지난 2년간의 활동에 아쉬움을 표현하면서도 앞으로의 행보를 지지했다.

“사참위는 피해자들이 원해서 출범한 기관이에요. 사참위 출발 과정이 굉장히 길었는데 피해자들의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못했어요. 이제는 사참위 업무가 피해 구제와 보상 등 문제에 집중돼 있잖아요. 그것만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주길 바라요. 다만 걱정인 건 지금도 환경부와 사참위가 정보 제공을 놓고 갈등 중이잖아요. 그런 부분이 걱정스럽습니다.”

가습기살균제가 수면위로 떠오른 지도 어느덧 10년째. 지난 10여년 동안 이씨는 단 하루도 가습기살균제를 잊고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다. 얼굴에 힘든 기색이 역력했던 이씨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부모로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을 위한 활동을 멈출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되돌아보면 10년 동안 단 하루도 가습기살균제와 연관되지 않은 날이 없어요. 몸이 아플 땐 내려놓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모로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쉽게 바뀌지 않은 상황이죠, 그럼에도 시민이, 피해자가 스스로 바꾸고자 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피해자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도 바로 사람들로부터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씨는 정부와 가해기업에 적극적인 피해자 지원을 당부하면서도 무엇보다 시민사회의 관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줬으면 좋겠어요. 피해자 구제 절차 등 행정적인 부분도 구체적으로 개선되길 바라고요. 그리고 아직 피해자 배·보상 안 끝났냐고 물어보시는 분들 많아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촛불혁명 때처럼 다수의 국민들이 직접 피부로 느낀 문제는 아니어서인지 오래 기억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온라인상에서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어떤 학교에서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다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시민 활동 참여가 독려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1월 14일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가습기 메이트' 제조 판매 업체 1심 무죄 판결과 관련 피해 증언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선미씨 ⓒ뉴시스
지난 1월 14일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가습기 메이트' 제조 판매 업체 1심 무죄 판결과 관련 피해 증언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선미씨 ⓒ뉴시스

또 다른 가해자라는 올가미

좋은 엄마가 되려면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판촉사원의 말에 망설임 없이 가습기살균제를 집어 들었다. 그저 아이들이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건만, 그날의 선택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왔다.

김선미(36)씨는 2008년 10월경 아이의 유모차를 사기 위해 방문한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애경산업의 가습기살균제를 처음 구매하게 됐다. 내 아이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그 마음뿐이었다. 

“아이 유모차를 사려고 이마트를 갔는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애경의 가습기살균제 판촉 행사를 하고 있었어요. 판매자분이 ‘요즘 알만한 엄마들은 다 이거 쓴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엄마도 아니다’라며 애경의 가습기메이트를 추천해줬어요. 환절기였고 가습기를 매번 닦는 게 어려우니 섞어 사용하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저 아이들을 위해 구매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가습기살균제는 김씨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해 써왔던 가습기살균제는 오히려 아이들을 병들게 했다. 

“저랑 남편, 딸, 아들 모두 호흡기 피해를 입었어요. 특히 저와 아이들은 천식 피해를 입었습니다. 딸은 어린 시절 열경련도 있었고, 폐렴도 자주 왔어요. 천식으로 약도 먹고요. 아들은 코가 막혀서 잠을 못자요. 13년 동안 코가 막혀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난해 8월부터는 병원에서 다시 건강 모니터링을 시행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저는 폐 기능이 안 나올 때는 60% 정도, 잘 나올 때는 70%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천식 때문에 6년째 면역치료를 받고 있어요. 다른 환자들은 면역 치료를 받으면 차도가 있다던데 저는 효과가 없어서 계속 치료가 연장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이들은 면역치료를 받아오지 않았는데 최근에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김씨 가족의 피해는 건강악화 뿐만이 아니었다. 김씨는 건축 전공자로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경력이 무너졌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뛰어놀며 즐거워야 할 체육시간에 한걸음 물러서 있어야 했다. 또 천식으로 언제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 모를 아이들을 위해 전문 교사가 있는 학교를 찾아 살던 동네를 떠났다.   

“저는 원래 건축을 전공해 관련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저와 아이들이 병원을 드나들게 되면서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해야 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더라고요. 처음에는 알바를 전전하다가 현재는 다른 일에 비해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해서 근무할 수 있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도 했습니다. ‘천식안심학교’ 때문에요. 천식안심학교는 교내에 천식 관련 교육을 받은 선생님이 교내에 상시 근무하는 학교입니다. 네뷸라이저(호흡기 치료기) 사용을 돕고 아이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병원까지 5~10분 내로 이송 조치가 가능한 학교입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그런 학교가 한곳 뿐이라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죠. 무리하게 이사를 하면서 들어간 비용만 지난 5년 동안 수천만원이고요. 지금도 매달 월세가 수십만원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아이들 학교생활에 영향이 있습니다. 체육시간 같은 때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아야 하는데 항상 ‘약한 아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어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요. 첫째의 경우 친구들과 놀며 사회성을 길러야 할 나이에 2년 이상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15~30일 정도 입원 후 일주일 퇴원하고, 또 입원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또래 아이들보다 사회성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씨와 아이들은 4단계 피해를 인정받아 구제급여 대상자에 포함됐다. 불행 중 다행이긴 하지만 김씨와 가족들이 받은 피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저와 아이들이 4단계 피해인정을 받았어요. 비교적 관련성이 적다는 의미죠. 어쨌거나 2019년부터는 저와 딸이,  2020년 12월 부터는 아들이 구제급여가 책정돼 치료비를 지원받고 있어요. 그동안 들어간 치료비를 전부 지원해 주는 건 아니에요. 저희 가족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피해가 좀 집중돼 있는데 일부는 못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현재 폐기능 저하로 요양생활수당 심사를 요청해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신청자가 워낙 많다 보니 심사가 더딘 상황이에요. 3·4단계 피해자는 상위 단계 피해자분들보다 지원이 적은 편이죠. 상위 피해자분들의 피해가 큰 만큼 그에 상응하는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히 마땅합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다고 평가되는 3·4단계 피해자는 배 ·보상에 있어 다소 배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이죠.”

가습기살균제피해자 김선미씨 ⓒ투데이신문
가습기살균제피해자 김선미씨 ⓒ투데이신문

김씨는 아이들에게 늘 죄인인 것만 같다. 때문에 누구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분노를 간신히 참아내던 그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일이 벌여졌다.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의 무죄 판결이었다.

“근무 중에 기사로 처음 그 소식을 접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어요. 만우절도 아닌데 장난 한번 지나치다고 생각했어요. 오보라고 생각해서 금방 정정보도가 나올 거라는 마음으로 기다렸죠. 그런데 진짜였어요. 그때부터 화가 나고 막막하더라고요. 내 아이들이 아팠던, 내가 아팠던 10여년의 시간은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김씨는 늘 자신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가해자라고 생각해왔다. 기업과 국가로부터 아이들이 입은 상처를 끝까지 사과받고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이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재판부의 판결은 이러한 김씨의 실낱같은 희망까지 무참하게 끊었다.

“저희 아이들은 어디서 잘못됐다는 걸까요. 무죄라고 하면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잖아요. 제가 잘못 낳았다는 얘기 아닌가요. 저는 또 다른 가해자라는 입장으로 지난 10여년을 죄인처럼 살아왔어요. 어디서 사과를 받아야 하나, 애들한테는 어떻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까 굉장히 괴로웠어요.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말로만 하는 사과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엄마가 무식해서 이런 피해가 발생한 건 미안해. 그래서 정부가, 기업이 너희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게 노력했고 앞으로 너희가 받은 피해에 대해 받을 수 있는 보상은 이런 것들이 있어. 만일 아플 때는 이렇게 하면 돼’라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인 사과죠. 그거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굉장히 암울합니다.”

김씨는 사법부에 2심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고려한 신중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기업은 더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제가 2015년에 재판부에 제공한 보고서가 있어요. 미국에서 CMIT 성분을 일주일 동안 물고기에게 집중적으로 투입했더니 죽었다는 연구 결과예요. 물론 효과를 보기 위해 물고기에게 장기간 다량을 주입했지만 이러한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봤어야 하잖아요. 물론 물고기는 어류니까 동물은 아니에요. 하지만 어류든 동물이든 피해가 없다고 해서 사람도 그런 건 아니잖아요. 한두명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가습기살균제를 동물이 만들었거나,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왜 기준이 동물실험인 건지 모르겠어요. 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제 존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현대사회는 점점 화학제품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치약, 샴푸, 비누, 섬유린스, 세제 안 쓰는 집 없어요. 저희만 피해자는 아닐 거예요. 운이 나빠서 먼저 피해자가 된 것뿐이죠. 내일은, 1년 후에는 동네 주민이, 판사님이, 대통령님이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화학제품은 조금 더 조심히 다뤄져야 하고, 규제하고 단속해 재발방지하는 게 필요하죠. 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에 대해 철저히 배·보상하도록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법으로 강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재판부가 이런 부분을 조명해 주길 바랍니다. 가습기살균제 가해자들이 무죄를 받는다면 기업은 더 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어요.”

김씨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에 있는 사참위에 대해 그간의 아쉬움과 앞으로의 기대를 함께 전했다.

“피해자들이 직접 기업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할 순 없잖아요. 환경부에 대한 감시나 제어도 그렇고요. 그런 걸 사참위가 해주길 바랐죠. 지난 2년 동안 사참위 활동이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성과를 이룬 부분도 있죠. 그래서 환경부 같은 정부 기관보다는 훨씬 더 피해자들에게 이로웠다고 생각해요. 연장된 기간 동안은 기업과 정부에 좀 더 압박을 가해주길 바라요. 정부와 기업, 피해자가 함께 합의 테이블에 나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김씨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올해만큼은 정부와 기업의 진심 어린 사과만이라도 들을 수 있길 소망했다.

“올해는 정부와 기업이 사과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단순히 사과 말고 책임 있는 사과요. 피해자들한테 사부작사부작 하지 말고 언론에 나와 공식적으로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대로 보상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마디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몸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시위까지 참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김씨를 더욱 지치게 하는 건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김씨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저희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피해자이고, 하루하루 피해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할 만큼 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가습기피해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다음에 있을지 모를 화학제품 피해자들을 위해 몸이 아파도 시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저희의 목소리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국회의원분들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이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아이들에게 꼭 안전한 사회를 남겨주고 싶습니다.”

문제의 가습기살균제는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 투명한 액체가 남긴 얼룩은 지독하게 남아 있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에 생긴 얼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질 뿐이다.

이 끔찍한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것은 가습기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한 가해자들뿐이다.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

다만 더 늦기 전,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삶에 진 얼룩과 더불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의 과오를 씻겨내길 바라랄 뿐이다. 

*본 인터뷰는 독립된 공간에서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한 가운데 진행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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