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등 전북지역 20여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의 날! 낙태죄는 위헌이다.’ 기자회견에서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환하게 웃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등 전북지역 20여개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의 날! 낙태죄는 위헌이다.’ 기자회견에서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환하게 웃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지난 1월 1일부터 낙태죄가 폐지돼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선택하기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리 등을 이유로 약물 처방, 수술 등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비용 부담이 높은 점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동식 젠더폭력연구본부장은 지난 10일 제124차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 최근 5년(2016.1~2021.3)간 임신중단을 경험한 만19~44세 6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임신중단 경험자가 말하는 의료접근의 장애요인과 개선과제’를 발표했습니다.

조사결과 응답자들은 평균 임신 5.7주차에 임신사실을 인지했으며, 7.1주차에 임신을 중단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응답자 202명은 임신사실을 인지한 뒤 임신중단까지 1주 이상이 소요됐는데, 임신중단에 1주 이상이 소요된 이유로는 ▲낙태죄 ▲부모의견(동의) ▲임신중단 가능한 의료기관 정보를 찾느라 ▲비용부담 ▲사회적 시선 등이 꼽혔습니다.

또 비수도권의 경우 거주지역에서 산부인과를 찾기 어렵다고 답했으며, 임신중단이 가능한 산부인과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찾기 어렵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임신중지에 필요한 비용은 높은 수준입니다. 약물의 경우 1차병원에서는 30~40만원 정도였으며, 2차병원 이상에서는 40~50만원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또 임신중지 수술의 경우 50~80만원, 비싼 곳은 100만원을 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임신중지 약물 비용이 부담된다는 응답은 64.4%, 수술비용이 부담된다는 응답은 81.6%로 응답자 대부분이 임신중단 비용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여성들은 임신중단 과정에서 ▲신체적/정신적 부작용 우려(57.5%) ▲비용부담(57.0%) ▲정보 부족(41.2%) ▲주변 시선(34.7%) ▲상대방 또는 보호자의 동의(24.8%) ▲의료기관과의 거리(15.9%) 등 애로사항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김 본부장은 “그간 낙태 처벌법으로 인해 임신중단 의료접근에 관한 이해와 논의가 부족했다”면서 “안전한 임신중단에 있어 장애요인은 개인적, 사회적, 의료제도적 및 구조적 영역에서 존재한다. 의료접근성 제고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의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습니다.

임신중지뿐만 아니라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을 구하는데도 어려움이 큽니다. 응답자 가운데 59.6%는 응급피임약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 이 중 의료인의 거부로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4.2%였습니다.

의료인은 ▲응급피임약은 낙태약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효과가 없을 것이라서 ▲이유 없이 응급피임약 처방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 본부장은 “응급피임약 접근 제약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임신중단으로 연결된다”고 부연했습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SHARE(셰어)’의 나영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이 어디인지, 현재 접근 가능한 약물을 찾을 수 있는 곳이나 이 같은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문의하는 연락을 많이 받는다”면서 “정확한 정보가 없다보니 안전한 상담 환경을 찾을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현장에서도 구체적인 가이드가 부재하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법적 가이드 외에 실질적인 의료와 상담, 지원체계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이 같은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영 대표는 “(임신중지는) 건강에 관한 문제”라면서 “정보가 없어서 열악한 상황을 찾게 되고, 비용이 없어서 더 나은 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도록 국회와 행정부처가 책임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시민건강연구소 김새롬 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은 이날 “1차의료 수준에서 피임과 임신중지서비스 제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일랜드의 경우 일반의가 일정 교육을 이수한 후 내과적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고, 영국은 섹슈얼리티 클리닉 등 성생식건강을 다루는 1차병원과 전문간호사/조산사를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캐나다는 2017년부터 약물적 임신중지를 도입하고 일반의가 임신중지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김 센터장은 이 같은 해외사례를 참고해 산부인과가 부족한 지역에서도 안전한 임신중지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병원·약국찾기’를 활용해 임신중단의료를 제공하는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피임과 임신중지 이전 단계에서 정확하고 적절한 정보제공과 상담이 이뤄져야 하며 미성년자, 착취적 관계에 놓인 여성, 결혼이주여성 등에 대한 정책적 고려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 여성건강팀 박지영 활동가는 “민우회 한 회원의 사례에 따르면, 응급피임약 처방 과정에서 응급피임약 실패 혹은 성공을 확인 할 수 있는 의료적 정보, 실패 혹은 성공 이후에는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관리나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를 전혀 받지 못했다”면서 “응급피임약 복용법, 부작용, 실패 혹은 성공 여부, 이후 필요한 의료적 정보 등을 면담 과정에서 충분히 안내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박 활동가는 ”여성들은 ‘낙태죄가 폐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임신중단을 하려고하면 어떤 병원을 가야하는지, 얼마가 드는지, 아직도 낙인과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수술과 약물 중에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지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기초적이고 믿을 수 있는 정보는 찾아 볼 수 없고, 산부인과마다 천차만별인 수술비용 때문에 자신의 여건에 맞게 가장 합리적인 병원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각 지역에 임신중지를 포함 성과 재생산권 전반 과정을 필수의료서비스이자 공공의료서비스로 보장해 보건의료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필요한 과정”이라며 “임신중지가 보편적이고 당연한 권리이자 누려야할 의료서비스라는 인식 또한 정책과 제도 보완과 함께 나아가야할 지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낙태죄가 폐지됐지만, 아직까지 여성들은 임신중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더욱이 의료인의 임신중지 거부는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 이후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제도 개선과 더불어 의료인의 젠더감수성 제고가 필요합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하루빨리 관련 제도와 법령을 개선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을 보장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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