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주환 기자】 구룡마을에 홀로 살고 있는 남순영(가명) 할머니는 이웃에게 새 옷을 선물 받았다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만날 허름한 바지만 입는다고 안타까워하던 옆집 이웃이 하나 사다줬다”라며 “저기 걸린 외투도 수유리 아줌마가 건네주고 간 거야”라고 전했다. 

구룡마을에서 주민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할머니는 최근에도 자다가 일어나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응급실에 실려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미로처럼 좁고 굽이진 골목길 탓에 구급차는 마을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그날 구급대원 두 명은 할머니를 들것에 싣고 나가려 했지만 집은 물론 문 앞으로 나 있는 길까지 워낙 좁아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이웃들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구급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얼마 전 겨울에는 바닥에 얼어붙은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아 힘을 주다가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 때 할머니는 넉 달 동안 방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다행히 이웃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할머니는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겨울에 눈 많이 내리면 길이 미끄러워서 못나가. 어느 날 방에 들어오려는데 하나는 훌렁 벗겨졌어 근데 한 놈이 안 벗겨지는 거야. 확 벗으려다가 넘어졌지. 아는 분 도움으로 겨우 병원에 가고 깁스하고 그랬어. 집에 와서는 화장실을 못가니까. 안에서 볼일을 볼 수 있게 이웃이 뭘 또 사다줬어. 다리를 다쳐도, 날씨가 추워도 나는 불 따뜻하게 떼고 수녀님도 도와주고 잘 먹고 편하게 살았어. 만날 찌개 끓여다 주고 부침개 내다주고 빵이랑 과일 들어오면 또 갖다 주고. 진짜 가족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해. 그래서 그렇게 살았어.”

구룡마을에 거주하며 주민들의 벗이 되고 있는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구룡마을 분원의 루치아 수녀는 외롭게 살아가는 주민들의 말동무가 돼 주고, 주변의 도움이 들어오면 이웃들에게 나누며 십 수 년을 지내왔다. 

그는 “욕심만 내지 않으면 지낼 만 하다. 여기 있는 쌀을 보라. 여기저기서 도움도 많이 주신다”라며 “재밌는 것은 기초수급자들이 또 쌀을 저희에게 전해 주신다. 어려운 분들이 오히려 돈을 조금씩 모았다가 이렇게 후원을 해준다. 있는 사람들보다 더 따뜻하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형성된 구룡마을은 빈민들의 마지막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급격한 도시화와 난개발은 빈민들의 주거지를 빼앗고 낙오자로 몰아세웠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행한 도시 미화 사업은 서울의 거리 일부를 말끔하게 만들긴 했지만, 철거민들은 다시 거리로 내쫓겼다. 

그렇게 거처를 잃은 사람들이 구룡마을로 모여들었다. 가진 것 없이 떠밀려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주민들은 여느 시골 마을이 그러했듯 산 좋고 물 좋은 구룡산 자락에서 금세 서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주민들의 얘길 들어보면 할머니가 이웃으로부터 받은 호혜는 구룡마을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한 주민은 “20~30년 전에는 마을의 정서가 어느 시골보다도 돈독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이어서 그랬나 보다”라며 “좀 어려운 사람 있으면, 이런 동네다보니까 알코올 중독이 된 사람도 간혹 있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돈도 주고 담배도 사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음식도 있으면 나눠먹고 그랬다”라고 회상했다. 

마을 사람들 간의 온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했다.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구룡마을의 주민들은 한 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했으며, 이웃이 지나가면 식사를 했는지 묻고 안 먹었다면 들어와서 함께 하자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또 골목 어귀에서는 3~4명의 주민들이 모여 간단한 안주와 함께 조촐한 술자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발 바람이 들이친 이후 이웃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그리고 좁힐 수 없는 앙금의 골이 패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70대의 한 주민은 구룡마을에는 아주 유명한 명언이 하나 있다고 귀띔했다. 그 명언이 무엇인가 물으니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도 주민들 간에 여간해서는 진심을 얘기하지 않아. 마을에는 웃지 못 할 명언이 있는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다’라는 말이지. 서로 항상 경계하고 속에 있는 얘기를 잘 안 해. 동네가 돈 벌려고 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피폐해졌어. 개발 얘기가 나오면서 내 조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적이 됐지.”

더욱이 2016년 구룡마을의 도시개발구역지정 및 개발계획 수립안이 통과된 이후, 상당수의 주민들이 선이주에 나서면서 구룡마을의 거리는 더욱 한산해졌다. 강남구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이주대책 대상가구 총 1107세대 중 454세대가 임대아파트로 이사했고 현재 653세대가 구룡마을에서 거주 중이다. 

이제 마을을 지키는 주민들 중 다수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자녀들은 장성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고, 가까웠던 이웃들은 임대 주택으로 이주하거나 병마 또는 불운의 사고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는 마을에서 젊은 편에 속했던 50대 주민이 잠든 채 일어나지 못했고, 한 이웃은 넘어져 부상을 입은 후 병세가 깊어지면서 숨을 거뒀다. 하루하루 개발이 미뤄지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다양한 방식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구룡산 능선따라 해가 넘어가면 골목은 더욱 조용해졌다. 한 주민은 “3년 전만해도 그래도 사람들이 거리에 좀 있었는데 지금은 먼지 밖에 없다”라며 “젊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말이면 자기 생활 찾아 나가니 마을은 더욱 조용하다. 이제는 죽은 사람들도 많고 참 외롭고 쓸쓸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