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 윤상원 열사
광주 지키다 계엄군 총탄에 장렬히 산화

광주 광산구 임곡동에 복원된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설치된 기념비. ⓒ뉴시스
광주 광산구 임곡동에 복원된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설치된 기념비. ⓒ뉴시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5·18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래는 사실 5·18 당시가 아닌 이후에 만들어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당시 끝까지 광주를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시민군 최후의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을 설립하고 선생으로 활동하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되며 처음 발표된 뒤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불리게 됐다.

노래의 주인공인 윤 열사는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계엄군의 진압을 앞둔 1980년 5월 26일 저녁 전남도청 외신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역사는 군사독재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디딤돌 삼아 이뤄낸 민주화 이후 시민군의 패배를 승리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시민군을 이끌던 윤 열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을까.

광주 광산구 임곡동에 복원된 윤상원 열사 생가. ⓒ뉴시스
광주 광산구 임곡동에 복원된 윤상원 열사 생가. ⓒ뉴시스

민주화 꿈꾸며 노동운동 투신

윤 열사는 1950년 현재는 광주광역시로 편입된 전남 광산군 임곡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외교관을 꿈꾸던 그는 외무고시 통과를 목표로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지냈다.

1975년 군을 전역한 후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선배 김상윤을 만나 부당한 사회현실을 마주하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한 광주전남6월항쟁 김상집 이사장의 <윤상원 평전>에 따르면 윤 열사는 김상윤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철학적 바탕을 깨달았다. 외무고시 통과를 인생의 전부로 여기던 정외과 학생이 ‘인간의 진실한 생각은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졸업 후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해 은행원 생활을 하던 윤 열사는 6개월 만에 은행을 그만두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현장을 누비고, 들불야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등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윤 열사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중앙위원과 광주전남지역 책임자로 일하게 됐다. 그는 전민노련 활동을 위해 들불야학 강사를 그만두고 노동현장 문제에 집중했다. 이 시기 윤 열사는 노동자, 종교인, 농민들과 만나며 노동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윤 열사는 5·18 직전까지 당시 판매금지 됐던 사회과학 서적의 유통처이자 광주지역 청년운동권의 모임터 역할을 한 녹두서점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들불야학의 재정을 맡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울의 봄’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커져갔다.

대학가의 시위는 1980년 5월 13일부터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진행했고, 전남대는 하루 뒤인 14일부터 가두시위에 나섰다.

윤 열사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노동운동,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탄압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시위와 대중 투쟁이 격화된다면 자신도 나설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인근 민주광장. ⓒ뉴시스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인근 민주광장. ⓒ뉴시스

계엄군에 짓밟힌 광주

1980년 5월 18일 오전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신군부는 전국 92개 대학과 국회 등 1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등 전남북지역 30개 대학에도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전 전남대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군인들과 대치했고, 계엄군은 학생을 붙잡아 구타했다. 이에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내려치는 등 폭행하고 연행했다.

계엄군의 폭압에도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자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보도블록을 깨 던지면서 계엄군에 저항했다.

이 시기에 윤 열사는 녹두서점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계엄군에 맞서는 한편 고립된 광주의 상황과 통제된 언론이 전하지 않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들불야학 강사·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투사회보는 당시 전남대 사회학과 김상형 교수가 전해준 군부의 동향과 상황일지를 근거로 만들어져 신속하고 정확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창구가 됐고, 시민들을 규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은 도청 옥상에서 울려 퍼진 애국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그 순간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상대로 총을 쏘자 광주 시민들도 경찰서, 탄약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희생이 이어지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수습위원회과 재야 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윤 열사는 항전을 주장하며 녹두서점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투사회보를 만들어 ‘무기 회수 결사반대’, ‘군사독재 및 전두환 타도’ 등을 주장했다.

지난 2018년 5월 1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에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장소에 설치된 추모 전시물이 설치돼 있다. ⓒ뉴시스
지난 2018년 5월 1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에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장소에 설치된 추모 전시물이 설치돼 있다. ⓒ뉴시스

최후의 시민군 대변인

23일 오후 3시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윤 열사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 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시민군 대표 성명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윤상원 평전 p.290~292(김상집 지음. 도서출판 동녘 펴냄)

그러나 학생수습위원회는 계속해서 총기회수를 이어갔다. 결국 윤상원은 동지들과 함께 학생수습위원회에 총기회수중단을 요청했다. 무장을 해제하면 계엄군이 들이닥쳐 또다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5일 저녁, 항쟁파와 투항파의 논쟁 끝에 학생수습위원회는 새롭게 조직을 정비해 항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윤 열사는 새롭게 조직된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대변인을 맡게 된다. 결사항전의 출발점이었다.

이튿날인 26일,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하자 시민군은 곧바로 무장출동을 준비했다. 학생수습위원회는 명칭을 민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윤 열사는 이날 저녁 외신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욕타임스, AP통신, 요미우리신문, 독일 DNR방송, 볼티모어 선, 쥐트도이체차이퉁 등 외신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취재했다.

이 자리에서 윤 열사는 외신기자들에게 무한 미국대사와 연결해달라는 것, 국제적십자사에 구호를 요청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윤 열사는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로 회견을 마무리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공격하던 27일 새벽, 윤 열사는 도청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미리 학생들을 대피시킨 뒤 도청에 진입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날의 전투를 끝으로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전남도청은 계엄군에 함락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2020년 1월 3일 광주 북구 5·18국립민주묘지에서 윤상원 열사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2020년 1월 3일 광주 북구 5·18국립민주묘지에서 윤상원 열사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끝나지 않은 5·18

김상집 이사장은 <윤상원 평전>에서 “결사항전의 주역들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됐지만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민주화투쟁을 멈추지 않았다”며 “우리는 마침내 6월 민주항쟁의 승리를 일궈냈다”고 말한다. 윤 열사와 같이 결사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노력으로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 등 당시 발포 명령을 내려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책임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았다.

윤 열사의 말대로 시민군의 패배는 후대에게 민주화라는 승리를 안겨줬지만, 아직도 5·18은 진행 중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윤 열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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