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기정년제] 불합리한 정년에 법정까지 간 여성들
여성 정년 ‘26세’로 인정한 사법부?…“결혼하면 퇴직”
공무직도 다를 바 없어…정년 12년 깎인 전화교환원
불붙은 ‘여성조기정년’ 논란…결국 폐지로까지 이어져
여성조기정년 철폐,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까지 영향
여성노동 평가절하하는 잘못된 사회 관념에 경종 울려

ⓒ제작사 더 램프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뭐 그렇게들 열심히 해. 어차피 결혼해서 임신하면 잘릴 텐데. 총무부 미스 킴이 우리 미래야.”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 정유나는 임신 후 회사의 압박에 못 이겨 퇴사한 총무부 선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말이면서도 그것이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과거 여성에게 결혼은 곧 퇴직을 의미했다. 때문에 당시 회사들에서는 여성의 정년 연령을 결혼 연령을 기준으로 삼거나, 남성과 정년의 기준을 달리 적용하곤 했다.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정년이 짧은 것이 마치 사회 이치인 것 마냥 받아들여지던 시절이기에 부당한 줄 알면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 여성들이 나타났다. 회사원 이경숙씨와 전화교환원 김영희씨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중 잣대에 불만을 품었고, 성차별적인 정년제도 철폐를 위해 법정싸움까지 불살랐다. 이들의 용기 있는 투쟁은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이라는 값진 결과를 낳았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여성의 결혼은 곧 ‘퇴직’

이경숙씨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봉제수출업체인 방일물산에서 영업부 외무사원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1983년 4월, 당시 24살이던 미혼의 이경숙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고, 다니던 회사마저 관두게 됐다.

결국 이경숙씨는 사고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사고 이전까지 이경숙씨의 월급은 10만9000원이었으며, 사고 직후 월급이 약 33%가량 오르며 동료들의 임금은 21만원까지 올랐다.

이경숙씨는 당시 법정 퇴직연령인 55세를 기준으로, 3600여만원을 배상해달라고 요청했다. 임금과 남은 근로 가능 연한에 비례한 손해배상액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손해배상액은 대략 850여만원이었다. 이경숙씨가 요구한 금액에 약 1/4 수준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여성의 정년을 25세로 인정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여성은 평균 26세에 결혼을 하고 퇴직 후 가사노동에 종사한다고 본 것이다. 기혼 여성 근로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미혼 여성 근로자가 퇴직연령인 55세까지 직장에 근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25세까지만 수입을 인정하고, 26세부터 55세 까지는 일반도시 성인여성의 평균임금인 일 4000원으로 책정해 이같이 판결했다.

당시 여성평우회에서 활동했던 이경숙 전 의원은 모 일간지 한구석에서 이경숙씨의 판결 기사를 보게 됐다.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이 사건은 양성평등에 위배되며 앞으로 모든 여성들이 겪게 될 부당함이라고 판단했다.

ⓒ투데이신문
회사원 이경숙씨의 재판을 도운 이경숙 전 의원 ⓒ투데이신문

실제 이경숙씨뿐만 아니라 다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에 따른 노동의 가치를 차별받아 왔다고 이경숙 전 의원은 말했다.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친구들이 한 학급에 90%는 됐어요. 결혼하면 퇴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죠, 은행원들도 결혼각서라는 걸 쓰고 입사하기도 했어요. 결혼하고 신혼여행 갔다 오면 책상이 없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여성평우회는 1심 선고 후 항소를 포기하려 했던 이경숙씨를 설득해 2심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성평우회를 포함한 6개 여성단체가 모여 ‘25세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여성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구성해 이경숙씨 사건의 문제점을 세상에 알리고 공론화했다. 변호는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힘썼던 조영래 변호사가 돕기로 했다.

연합회는 이경숙씨 사건의 쟁점을 2가지로 봤다. 우선 여성의 정년을 25세로 본 ‘여성조기정년제’의 부당성과 가사노동의 가치 저평가였다. 이경숙씨 사건을 단지 교통사고 배상금 문제를 다투는데 그치지 않고, 결혼 적령기가 된 여성은 회사를 관두고 가사노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당시 사회적 관행에 맞서는 방향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 같은 여성계의 연대와 움직임은 재판 결과를 뒤바꿨다.

1심과 달리 2심 재판부는 여성의 정년을 25세가 아닌 당시 법으로 규정된 55세로 인정했다. 다만 사고당시 월급을 기준으로 월급인상과 상여금 등은 인정되지 않고 사고에 따른 노동상실만 인정해 945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실질적인 피해보상에 대한 아쉬움은 있으나, 조기정년철폐라는 유의미한 성과는 분명하게 이뤘다.

 1961년 전화교환원 업무 모습 ⓒ국가기록원/뉴시스

2년이나 짧아진 정년

여성의 정년차별은 공무직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1970·80년대에는 전화국에서 각 가정이나 직장에 전화선을 연결해 줘야만 통화가 가능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전화교환원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전화교환원이 7480명까지 증원됐을 때도 남성은 단 3명밖에 없을 정도로 여성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김영희씨도 수천명의 전화교환원 중 한명이었다. 그는 1961년 체신부 중앙전화국 교환원으로 임용돼 일을 시작했다. 평소 부당함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인 김영희씨 눈에 조직 내 성차별이 눈에 들어왔고, 하나씩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는 돈 한푼 주지 않고 여성들에게만 요구돼 왔던 이불과 커튼 세탁 문화를 없애는 데서 시작했다. 노동조합에까지 발 담그며 매달 월경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위생관리를 위해 비데시설과 샤워장까지 설치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보다 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김영희씨 심기를 건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82년 1월 1일부로 체신부 전기통신 업무가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으로 이관됐다. 한국통신은 같은 해 5월 20일 인사규정을 새롭게 재정비했는데 다른 직종의 정년이 55세인 것과 달리 전화교환원의 정년을 43세로 규정했다.

심지어 당시 남성의 경우 정년을 3년 연장해 58세까지 근무할 수 있게끔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되레 12년을 깎아내린 셈이다.

김영희씨는 바뀐 인사규정에 따른 첫 번째 정년퇴임 대상이었다. 이를 부당히 여긴 김영희씨는 회사와 노조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해 말 결국 등 떠밀리듯 회사를 나오게 됐다.

그러나 김영희씨는 포기하지 않고, 대부분 여성으로만 구성된 전화교환원의 정년을 43세로 규정하고 자신에게 정년퇴직을 통고하는 것은 헌법과 근로기준법에 위반된다며 한국통신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노조에서 인사규정을 인정했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등 사측에 유리한 증언이 이어졌고 결국 김영희씨는 1·2심 모두 패소했다. 그러나 여성계에서 김영희씨의 사건은 관심 있게 보고 연대했으며, 당시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현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여성 기능직 공무원 정년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는 등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8년 대법원은 전화교환원의 정년을 다른 직종과 달리 정년을 낮게 정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심리판단하지 않은 원심의 판결은 위법하다고 보고 돌려보냈다. 이후 김영희씨는 소송 시작 8년 만인 1989년 4월 19일 최종판결에서 최종 승소했다.

전화교환원 김영희씨 ⓒ투데이신문

재판 과정에서 한국통신은 전화교환원의 정년을 53세로 늘렸고, 김영희씨는 1992년 정년퇴직하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반직의 정년인 58세와 비교해 여전히 차별적인 대우였다. 때문에 이후에도 김영희씨가 또다시 퇴직과 복직을 반복하고 소송을 진행한 끝에 전화교환원의 정년은 58세로 연장됐다.

이경숙씨와 김영희씨 사건은 이후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 과정을 거치고, 남녀고용평등법 외에 여성노동정책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이 이뤄지고 있다. 이경숙 전 의원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현장에, 우리 사회에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것이 앞으로 여성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법률적으로 미흡했던 부분들은 많이 해결됐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들이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요. 여성이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해요. 과거보다는 물론 나아졌지만 여전히 부족해요. 예컨대 결혼 후에도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지만 현실적으론 결혼 후 육아를 병행하면서 일을 한다는 게 여전히 어렵잖아요. 그사이 경력은 단절되고 취업률은 떨어지게 되는 거죠. 기업과 사회, 국가가 여성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위기, 이를 뒷받침할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겠죠.”

남성중심의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경숙씨와 김영희씨의 선택은 어쩌면 무모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부당한 것은 바꿔야 한다는 두 사람의 용기 있는 목소리는 여성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념에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여성, 그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변화를 이끌며 여성노동운동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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