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무역사건] 가발공장 여공들의 목숨 건 투쟁
빠르게 성장한 YH무역, 원동력은 ‘여성노동자’
점점 몰락하는 회사와 함께 노조 필요성 대두
코앞으로 다가온 폐업, YH무역 노조 투쟁 돌입
여공들의 목숨 건 농성, 유신체제 붕괴 발판 돼
선배 노동자들의 숭고한 희생 잊지 않길 바라

1972년 해외수출공업단지 가발공장 모습 ⓒ국기기록원
1972년 해외수출공업단지 가발공장 모습 ⓒ국기기록원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19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출품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발은 단연 효자상품으로 손꼽혔다. 꼼꼼한 손놀림을 이용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직접 꿰맨 한국 가발은 질이 좋고 수명도 길었고, 해외에서는 ‘가발’하면 ‘코리아’를 떠올릴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 총 수출량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YH무역도 한국의 대표적인 가발 수출 기업으로, 국내 수출 순위 15위 대기업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점차 가발 수출이 줄어드는 데다가, 업주의 자금 유용과 무리한 기업 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아 결국 폐업 공고에 이르게 됐다. 당시 사장은 회사의 재산을 정리해 미국행에 올랐다.

이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이 됐다. YH무역의 직원들은 이른바 ‘여공’이라 불리는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은 졸지에 실직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회사는 폐업의 원인과 그 책임을 되레 노동자들에게 미루려는 뻔뻔함을 보였다.

결국 늘 자신들의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해오던 여성노동자들은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섰다. 경찰에 의해 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머리채를 잡히는 와중에도 폐업 철폐와 정상화를 위해 맞서 싸웠다. 당시 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YH무역 노동조합 위원장 최순영(69)씨를 포함한 여성노동자들은 정의의 줄에 설 수 있었던 자신들이 자랑스러웠다고 회상한다.

YH무역 노조 최순영 지부장 ⓒ투데이신문

YH무역 성장 원동력은 ‘여성노동자’

1966년 설립된 YH무역은 노동자 10명으로 시작한 소규모 가발업체였다. 그 무렵 가발산업은 호황기를 맞았고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까지 뒷받침되며 YH무역은 설립 4년 만에 노동자가 4000명까지 늘어나는 등 급격하게 성장했다.

YH무역의 성장에는 여성노동자들의 공이 컸다. 노동자의 80% 이상이 여성이었고, 관리직 정도만 남성으로 구성돼 있었다. 실제 가발을 생산하는 현장 노동자는 모두 여성이었던 셈이다.

최순영씨는 1970년도 19살의 나이에 고향인 강원도 강릉을 떠나 서울로 상경해 YH무역에 입사했다. 최순영씨는 가발 제작 업무 중에서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직접 수작업 하는 최고급 인력이었다.

YH무역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출근하게 돼있었지만, 이는 관리직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도급제로 운영됐기 때문에 많이 일해야 그만큼 가져갈 수 있어 보통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10시가 돼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휴무는 월 2회로, 지금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에 쉬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주 2회 정도는 정시 퇴근하는 날이 있어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당시 청계피복 노동자들이 하루에 16시간씩 일한 데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일해 최영순씨가 벌어가는 월급은 1만원 정도였다. 그나마 최고로 쳐주던 수작업 인력이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많은 돈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정해진 시간 속에 미싱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일반 작업자들이 가져가는 월급은 2500원 정도에 불과했다. 수당은 오롯이 관리자들에게만 돌아갔다.

공장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주로 수출로 먹고사는 회사였기 때문에 공장에는 외국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공장을 살폈고, 그래서인지 시설도 깨끗했고 화장실 이용 등에 제한도 없었다.

하지만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기숙사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기숙사라고 해봐야 짐을 올려놓을 선반이 있는 방 수준에 불과했고, 한방에 적게는 12명 많게는 15명씩 함께 생활해야 했다.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변변치 못했고, 뜨거운 물도 안 나와 겨울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를 감아야 할 정도였다.

최순영씨는 그래도 YH무역의 근무환경은 다른 경공업 현장에 비해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것일 뿐,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선이 아닌 차악이었던 셈이다.

YH무역 노조 설립식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YH무역 노조 설립식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회사의 몰락과 노조 결성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자타 공인 한국 가발은 세계 최고 제품으로 인정됐으나, 중반에 접어들며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던 가전제품 산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또 가발산업에 뒤늦게 뛰어든 국가들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저렴한 가발을 판매하기 시작하며 한국 가발은 사양길을 걸었다.

고공행진을 해오던 YH무역도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가발산업의 하락세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대표의 자금 유용이었다.

YH무역 창립자 장용호는 마치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1970년  회사 자금을 들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동서였던 진동희 부사장이 사장 자리에 올랐다. 장용호는 빼돌린 회삿돈으로 미국에서 YH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장용호는 저렴한 가격 및 후불조건으로 YH의 생산품을 수입․판매했고 대금을 갚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자본을 회수했다. 진동희는 이를 돕는 대가로 YH무역의 일부 자본을 빼돌려 다른 회사를 설립했다.

YH무역 노조 지부장에 선출된 최순영씨
YH무역 노조 지부장에 선출된 최순영씨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이러한 이유들로 수년에 걸쳐 회사의 경영난은 점차 심해졌고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며 위기는 노동자들의 피부에까지 와닿았다. 그리고 1975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노조를 하기 위해 비밀리에 사람을 모았는데 제가 거기에 포섭이 됐어요. 그때는 노조가 뭔지도 잘 몰랐을 때죠. 그래서 전국섬유노조에서 노조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길래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봤었죠. 얘기를 나누며 가장 놀랐던 게 하루 8시간만 근무하고, 토요일은 오전만 근무하고, 일요일은 놀아야 한다는 거예요. 또 만일 근무를 할 때는 연장근무 수당을 줘야 하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만남 이후에 우리가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포섭했는데, 그래도 남자가 있으면 좋지 않겠나 싶어서 한명을 접촉했죠. 근데 알고 보니 공장장 처남이었던 거예요. 결국 공장장 귀에 우리가 노조를 결성한단 얘기가 들어갔고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4명이 해고가 됐어요. 나는 강원도 횡성의 하청공장으로 출장을 보냈고요. 제가 없는 동안에도 노조를 조직하려는 시도들과 회사가 이를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있었더라고요.”

최순영씨는 하청공장에서 일하며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불어 어차피 나가는 거 남은 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노조는 만들어 놓고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그만둘 바에는 노조나 만들고 다른 노동자들 위해 좋은 일이나 하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청공장에서 신임을 쌓으며 두 달 후쯤 서울 공장으로 돌아오게 됐죠. 회사에서 저를 불러서 좀 회사 편에 서달라고 하더라고요. 알았다고 하고 뒤에서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모아서 노조를 조직한 거죠.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노조가 결성된 거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제가 지부장까지 하게 됐어요(웃음).”

YH무역 노조는 대의원회의와 기숙사 자치회, 소그룹 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통해 계속해서 노사협의를 시도했고, 그해 말에는 회사 창립 최초로 관리직 노동자가 아닌 생산직 노동자도 50%의 상여금을 쟁취해내는데 성공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동자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동자들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폐업과 목숨 건 노조 투쟁

노조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경영진이 회생에 대한 의지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발사업이 사양화되니까 회사에서는 중공업으로 업종을 바꾸려고 마음먹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직원을 모집하지 않으면 이 분야는 자연감원 되거든요. 왜냐면 당시에 여성들은 23살만 되면 시집을 가고 일을 자연스럽게 관뒀으니까 굳이 나서서 해고하지 않고 그냥 인력충원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거죠. 그런데 노조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버틴 거예요. 회사에서 ‘가발산업을 이전한다’, ‘퇴직금을 좀 더 준다’는 말로 회유하니까 관두는 사람이 좀 나와서 노조에서 절대 사표 쓰면 안 된다고 막고 그랬죠.”

정상화를 약속했던 1979년 YH무역은 결국 4월 말로 폐업한다고 공고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40억원이 넘는 은행부채였다. 이는 폐업 수순을 밟기 위해 일부러 부채를 늘렸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도 원인으로 들며 폐업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까지 했다.

결국 노조는 회사와 부채를 내준 은행, 자금을 빼돌린 장용호를 소환할 권한이 있는 미국대사관, 노동청, 대통령을 상대로 회사 정상화를 촉구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경찰의 폭력과 탄압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한때 폐업 철회를 약속하고 노동청에서까지 나서 책임을 약속했지만 이는 농성을 막으려는 궁여지책이었다. 회사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노조는 극한투쟁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며 압박했다.

결국 노조는 그해 7월 30일까지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했다. 이날까지도 회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고 결국 노조는 야간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주간에는 조업, 야간에는 농성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회사는 8월 6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8일부터는 물과 전기를 끊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9일에는 기숙사를 폐쇄했고, 10일까지 퇴직금과 해고수당을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노동자들을 밀어붙였다. 이러한 상황을 외부에선 알리 없었고, 전국 섬유노조와 경찰이 한편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하며 노조는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노조는 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당시 여당이던 신민당사를 찾아가기로 결정했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 4인이 한조가 돼 기숙사를 빠져나가 신민당사로 향했다.

약속 시간인 9일 오전 9시가 넘어서고 187명의 노조원들은 무사히 신민당사로 모였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YH무역 노조원들을 흔쾌하게 받아줬다.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노동청장 장관 모두 부를 테니 대화로 풀어보자’며 그들을 지지했다.

노조원들은 그렇게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재개했다. 이전 농성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유명 정치인들이 찾아오고, 라디오에서도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또 동아일보 석간신문에도 그들의 모습이 크게 실렸다.

전경에게 끌려 나오는 노동자들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전경에게 끌려 나오는 노동자들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채 하루밖에 가지 못했다. 노조원들이 농성을 이어가는 동안 청와대에서는 YH무역 노조원들에 대한 강제해산 조치가 지시됐고 경찰의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낌새를 챈 노조원들은 10일 밤 긴급 결사총회를 열고 경찰이 들어오면 투신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일 새벽 2시경 이른바 ‘101호 작전’이 개시됐다.

“10일 밤이 고비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 종결대회일 수 있겠다 싶었죠. 신민당사 주변으로 경찰들이 모여드는 걸 봤어요. 그때부터 조합원들이 막 흥분하기 시작한 거예요. 유리창 난간에 매달려서 올라오면 떨어져 죽겠다고 난리가 났었죠. 조합원들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고, 김영삼 총재도 ‘오늘만큼은 우리가 여러분을 지키겠다’ 약속했죠. 근데 새벽에 일이 터진 거예요. 우리가 4층에서 농성 중이었는데 고가사다리를 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전부 가운데로 모여서 서로 팔짱을 엮어 끼고 끌려가지 않겠다고 앉아있었어요. 그 와중에 지부장을 보호해야 한다고 해서 저는 다른 사람인척하려고 옷 갈아입고 정중앙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순진했죠. 1000명이 넘는 서울시내 전경이 다 왔는데 안 끌려가겠다고 그러고 있었으니. 생각해 보세요, 4명이 달려들면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렇게 다 끌려 나간 거예요.”

경찰은 농성 참가자들은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해 갔다. 그뿐만 아니라 김영삼 총재와 박권흠 대변인 등 신민당원들 뿐만 아니라 취재 중이던 기자와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들까지도 경찰 폭력에 희생됐다. 무자비한 경찰의 탄압에 결국 당시 21살이던 노조 집행위원 김경숙씨는 목숨까지 잃었다.

수개월, 아니 수년에 걸쳐 이어져온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날 23분여 간 악으로, 깡으로 버텼던 치열한 싸움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노조 간부들은 구속되거나 지명수배됐고, 다른 노동자들은 경찰 조사 후 강제로 귀향길에 올랐다. 그리고 YH무역은 결국 폐업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부당함을 세상을 알리겠다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고, 이후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는 등 유신체제 몰락의 발판이 됐다.

“저는 그때 임신 중이었어요. 아이가 잘못될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죠. 저희의 가장 큰 계획은 우리의 억울함을 알려야겠다는 거였어요. 그때는 노조가 언론에 노출되지 않던 시대였거든요. 회사가 노조 때문에 망한 거라고 하는데, 회사가 돈을 빼돌려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우리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깨질 거 알고 시작한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애초 목표했던 대로 세상에 우리의 이야기를 알렸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의 싸움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게 아닌 걸 알아야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계획적이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싸움이 유신을 몰락시킨 첫 단추라는 걸 정확히 해야 해요.”

YH무역 노동자들
YH무역 노동자들 <사진 제공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

최영순씨를 포함한 최후의 그날에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은 스스로가 매우 정의로웠다고 평가한다.

“그날 조합원들은 매우 정의로웠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만나면 스스로가 정말 기특하다고 말해요. 어린 나이에 정의의 줄에 설 수 있었던 게 자랑스럽다고요. 싸움이 끝날 때까지 누구 한명 이탈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끼리 끊임없이 토론하고 결정한 덕에 배신자 없이 단단하게 이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어요.”

최영순씨는 후배 여성노동자들이 선배들의 투쟁을 잊지 않길 바란다. 지금 주어진 것들이 결코 세월의 흐름 따라 그냥 얻어진 것들이 아님을 알아주길 소망한다.

“오늘날 노조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우리 같은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이에요. 그냥 얻어진 것들이 아니라 많은 선배들이 목숨을 내놓은 투쟁으로 얻은 것들이라는걸요. 그리고 주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조금 더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요.”

끝으로 노동자 간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여성노동자들 중에서도 특히 비정규직이 많이 어려워요. 목소리를 내려면 조직의 힘이 제일 중요한데, 비정규직은 조직하기가 힘들죠. 또 투쟁을 당사자들이 나서서 끌어가기엔 부담이 너무 커요. 안 그래도 정규직 전환이 어려운데, 블랙리스트에 이름이라도 올려 봐요. 결국은 단체가 나서서 싸워줘야 해요. 지금의 양대 노총은 정규직과 대기업 노동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이 단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당함이 판치는 조직에 갇혀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만 해오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은 용기 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고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들이 보여준 열정과 결집력은 그간 있었던 그 어떤 투쟁보다도 뜨겁고, 끈끈하고, 단단했다. 지금의 노동자들이 당연하게 누려오는 것들은 모두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됐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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