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인지장애 노인들이 꾸려가는 ‘기억다방’
깜빡 잊어도, 서툴러도, 실수해도 괜찮아!

기억다방 바리스타 이정례씨 ⓒ투데이신문
기억다방 바리스타 이정례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어서 오세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야겠네.”

<투데이신문>은 조금 낯설면서도 아주 특별한 카페를 찾았습니다. 주문이 서툴러도, 음료가 시킨 대로 나오지 않아도 어느 누구 하나 화내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는 그곳은 서울 금천구치매안심센터의 ‘기억다방’입니다.

‘기억을 지키는 다양한 방법’이라는 의미를 지닌 기억다방은 경증치매 또는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어르신들이 바리스타로 참여하는 카페입니다.

기존에는 이동형 카페로 운영됐습니다. 서울 시대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나 지역사회 축제 등에서 다양한 음료와 다과를 제공하는 방식이었죠.

하지만 어르신들의 지속적인 인지능력 향상을 위해 올해 3월부터 금천구치매안심센터 로비에 고정형 카페를 오픈했습니다.

기억다방의 음료는 매일 아무 때나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주 화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목요일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자는 목요일에 맞춰 기억다방을 찾았습니다. 이날의 바리스타는 이정례(69)씨였습니다.

반가운 인사를 뒤로하고 부랴부랴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온 이정례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업 준비입니다. 비어있는 커피머신의 물을 채우고, 음료를 만들 재료와 담아 줄 용기도 미리 질서 정연하게 정리했습니다.

기억다방 안내문과 티켓 ⓒ투데이신문

센터를 방문한 어르신과 가족들이 수업이나 상담을 마치고 나면 기억다방으로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손에는 티켓을 하나씩 들고 있는데요, 일종의 음료 교환권입니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티켓에 적힌 음료 중에 원하는 것에 체크해 바리스타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단, ‘기억다방에서 나의 소중한 기억, 행복한 기억, 따뜻한 기억을 지킬 수 있도록 따뜻한(차가운) OOO을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별거 아닌 문장 같지만 치매나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커피와 자몽차 등 음료 4잔을 주문받은 이정례씨는 빠르게 제조에 들어갔습니다. 음료를 만드는 과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티백을 이용한 차가 대부분이고, 커피는 자동 머신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커피머신이 갑작스럽게 말썽을 부렸습니다. 이리저리 눌러보던 이정례씨는 결국 센터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선생님의 손길이 닿은 후에야 제자리를 찾은 커피머신을 본 이정례씨는 “전에 한번 해봤는데 까먹었네”라며 웃어넘깁니다.

일하면서 실수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실수를 덜기 위해 끊임없이 나름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엉차랑 오미자차를 탔어요. 분명 왼쪽이 오미자인 걸 아는데 말 시키면 순간 잊어버려요. 이미 줬는데 다시 물어보면 답이 없어요(웃음). 그래서 나름 공부를 했어요. 보면 알지만 오미자는 알맹이가 있어요. 모과는 입자가 굵어요 나무를 부셔놓은 것처럼요. 국화는 말린 꽃잎을 빻아 놓은 것처럼 생겨서 그나마 구분이 쉬워요. 어떻게 하면 안 잊어버릴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한 거죠.”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정례씨는 기억다방에서도 열정 넘치는 바리스타로 유명합니다. 소독기가 있는데도 병을 일일이 뜨거운 물로 닦을 정도였다네요.

그래서인지 이정례씨는 음료 한 잔도 결코 그냥 전달하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이 음료 챙기는 것을 직접 챙겨 담아주기도 하고, 기억다방 소식을 듣고 찾아온 손님에게는 이런저런 말도 붙여봅니다.

이날도 아프신 할머니가 생각나 들렸다는 한 청년을 이정례씨는 아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방문하게 됐는지 묻기도 하고, 직접 센터 안내를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한 듯 보였던 청년도 돌아갈 때는 눈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돌아갔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활기차 보이는 이정례씨는 과거 지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60대 초반에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은 이정례씨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고, 누군가 다가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졌습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연한 계기로 금천구치매안심센터와 인연이 닿아 수업을 듣게 됐고, 인지장애도 많이 호전됐습니다. 그러다 올해 고정 기억다방 오픈을 앞두고 바리스타 제안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봉사활동 정도로만 안내를 받아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뭐든 하겠다고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 선택은 너무나 잘한 일이었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침울했던 과거 모습은 집어던지고, 사람들과 말을 섞고 웃을 수 있는 지금이 이정례씨는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기억다방 바리스타 이정례씨 ⓒ투데이신문

이정례씨는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어르신들을 보면 괜히 더 마음이 쓰인다고 합니다.

“보면 특히 아버님들이 치매센터라는데 거부감이 크세요. 당신께서 치매가 아닌데 왜 그런데 가야 하냐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서 여길 방문하시면 (음료 한 잔 드리려고 해도) 쭈뼛쭈뼛 다가오지 않으세요. 그럼 여유가 있을 때는 제 얘길 해드리죠. 여기 와서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해드리면 자주 와야겠다고 하세요.”

‘힘들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이정례씨는 일이 매우 즐겁고, 기억다방에서 좋은 기운을 얻어 간다며 오히려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이정례씨의 말처럼 기억다방에서는 긍정적인 기운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치매·경도인지장애 가족이 있다면 기억다방을 방문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잊고 지내던 행복했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오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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