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노숙인은 나에게 꽤 익숙한 존재다. 고향인 대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거주지는 변함없었다. ‘두류역’, 내 집 앞에 있는 지하철역이다. 그들은 ‘지상’이 아닌 ‘지하’에 보금자리를 텄다. 지하에 머무는 그들을 오가며 곁눈질로 훔쳐봤던 어릴 적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시간은 또 속절없이 흘러 기자라는 꿈을 위해 서울에 발을 내딛게 됐다. 서울역에는 어릴 적부터 익숙한 그들이 더욱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 남성이다. 더벅머리의 그가 노숙인들 무리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내 생에 첫 젊은 노숙인과의 조우였다.

그렇게 서울에 상경한 지 어언 8개월. 27살의 나는 노숙인, 특히 젊은 노숙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실, 나 역시도 언제든 거리로 나앉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슴에 지녔던 탓일지도 모른다. 외줄 타듯 아슬아슬한 서울 생활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니 말이다.

기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넘어 같은 20대 청년의 눈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고 싶었다. 또 되묻고 싶었다. 과연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몇 번의 실수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촘촘한가. 또, 젊은 노숙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떤가. 단순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이유로 나와 그들은 다른 존재인가. 

나는 그들의 불행을 전시하고 싶지 않았다.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빈곤 이야기가 권태로워질 무렵, 나는 생과 사가 오가는 그들의 삶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글로 써 내려간다. 우리와 그들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코로나19 음성 확인 문자메세지 ⓒ투데이신문

어제 받았던 든든한 저녁식사 덕일까. 나는 아침을 기분좋게 시작 할 수 있었다. 갈비찜, 야채볶음, 미역국, 빵, 잡곡밥 등 다양한 음식들이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준 까닭이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활기차게 지도를 펼쳐보였다. ‘종로 5가역, 혜화경찰서 옆‘이라는 글씨가 내 눈에 띄었다. 정확한 위치가 적혀있었기에 길을 헤맬일도 없을 뿐더러 금방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몇 가지 선택지들 중에 서울 혜화경찰서 인근에서 나눠주는 무료급식을 선택한 이유는 온전히 ‘출근길‘ 때문이다. 혜화경찰서 인근에서 진행되는 무료급식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 한마디로 사람들로 가득찬 혼잡한 출근길 지하철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간 지하철만 타기만 하면 위축됐다. 그렇게 스쳐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니 내가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지하철을 탑승했던 시간대는 항상 출근길과 퇴근길이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또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그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싶지 않았다.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면 그나마 가슴 깊숙이 자리잡은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지하철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같았다. 나도 남들과 똑같이 지하철을 타고,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한명의 사회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출근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선 그 순간 지하철에 탑승했다. 갑작스레 핸드폰 알림이 울린다. 문자다. ‘문자 올 사람이 없는데..‘ 나는 대출문자겠거니 하며 휴대전화를 열어보았다. ‘<중구보건소> 박OO님 코로나19 PCR검사 결과 ‘음성‘입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코로나19 음성 확인 판정서가 머리 속을 스쳐갔다. 왠지 모르게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듯 했다. 나는 서울혜화경찰서 인근 무료급식에서 밥을 먹고 난 뒤 확인 판정서를 받고자 했다. 들뜬 마음으로 종로5가역을 향해 나아갔다. 아쉽게도,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짐작조차 못한 채로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밥지도에 쓰인 서울혜화경찰서 전경 ⓒ투데이신문

부지런히 종로5가역으로 향했던 나의 눈에 서서히 서울혜화경찰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첫번째 시련이 나에게 닥쳐왔다. 도대체 무료급식이 시작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을 몇 번 겪었던 터라 나는 태연했다. 그러나, 경찰서 인근을 수차례 배회해도, 두 눈을 씻고 여기저기 둘러봐도, 무료급식소는 끝끝내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오기가 생겼다. 기필코 무료급식소를 찾고 말겠다는 패기만 가득찬 오기다. 나는 주변 상인들에게 무료급식소에 대한 정보를 하나 둘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저편에 떡볶이와 순대, 어묵을 취급하는 자그마한 노점상이 보인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저기 어르신, 혹시 이 근방에 무료급식소 없습니까?” 떡볶이를 휘적이던 어르신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금 떡볶이를 휘적이며 “저짝, 저 신호등 건너가 쭉 올라가면 하나 있습디다“ 저쪽 신호등, 저 신호등이 정확히 어느 신호등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의 시선이 닿는 곳엔 이미 수많은 신호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다. 나는 용기내 재차 물었다. “어르신, 저기 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쭉 직진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르신은 떡볶이 주걱을 내려보이며 “저 우로, 저 우로 쭉 올라가면 하나 있을끼라“고 대답했다. 나는 저 위로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귀찮음 가득한 어르신의 표정이 한 번만 더 물었다간 불호령을 듣게 될거라 경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는 어르신에게 감사 인사만을 남기고는 눈 앞에 아른거리는 떡볶이들과 애틋한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러곤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우연히 발견한 무료급식소는 노인무료급식소였다.ⓒ투데이신문

대략 10여분 걸었을까. 저 멀리 ‘OOOO무료급식소‘ 간판이 보인다. 나는 OOOO무료급식소, 저 곳이 노숙인이 건네준 지도에 쓰인 곳이길 바라며 급식소를 향해 다가갔다. 빨간색 간판에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 수록 멀리선 보지 못했던 글씨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인무료급식소‘라 떡하니 적혀있는 것을 청년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의 후원으로 어르신들이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드실 수 있습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라고 이리 저리 외쳐대는 봉사자가 보인다. 아뿔싸, 이 곳은 노인무료급식소인 것이다. 노인을 위한 급식소에 젊은 내가 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민하기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배고픔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용기를 냈다. 그러곤 “저기, 저도 혹시 급식을 받아 볼 수 있을까요?“ 봉사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봉사자는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윽고 “죄송하지만 여긴 노인들에게만 제공되는 무료급식소에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예상했던 답변이라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감사합니다라는 답변과 함께 뒤를 돌아보였다. 그러나,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본능은 솔직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배까지 곪으니 스트레스가 물 밀 듯 밀려왔다. 이미 오전 11시가 훌쩍 넘었던 터라 다른 무료급식소를 찾아가기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그렇게 나는 아침 겸 점심을 포기했다.

나는 나무그늘 아래에 놓여진 벤치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잘못된 판단으로 저녁까지 굶게 된다면 꼼짝없이 하루를 굶어야 했기에 신중하게 생각했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선 코로나 19 음성 확인 판정서가 필요했다. 판정서가 없다면 저녁을 얻어 먹기란 쉽지 않다. 이를 몸소 경험했던 나다. 그렇기에 나는 그 판정서를 받기 위해 보건소로 향하는 선택을 내렸다. 판정서만 갖고 있는다면 요며칠 저녁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아침과 점심을 굶더라도 저녁 만큼은 확실하게 먹자는 마음 하나로 지친 몸을 이끌고 보건소로 향했다. 

코로나19 음성 확인 판정서를 받기 위해 방문한 중구 보건소 ⓒ투데이신문

당시 종로구에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종로구 보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구 보건소에서 음성 판정이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중구 보건소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었기에, 나는 종로구 보건소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얄팍한 술수는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켰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종로구 보건소에 다다랐지만 이제 막 점심식사를 하러가는 직원들의 대답은 관할 보건소에 가야한다는 말 뿐이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때 의료진이 보건소에서 음성 확인증을 발급 받으시면 된다 말했기에 나는 따로 관할이 지정돼 있는지 알 지 못했다. 내가 부족했고 어리석었다. 섬세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결국 나는 다시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또 나는 대중교통에 몸을 실었다. 연일 내리쬐는 뙤약볕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쳤던 터라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는 게 우선이었다. 버스 안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 시원한 바람을 쐬며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바짝 들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꿀맛 같은 단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천국 같던 버스의 문이 열리고 나는 거리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온 몸으로 뙤약볕을 맞이해야 했다.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중구 보건소에 도착했다. 주민등록상 거주지가 대구광역시로 등록돼 있는 탓에 나의 주민등록증을 함께 제출했다. 10분 가량 지났을까 나는 코로나19 음성 확인 판정서를 손에 쥐게 됐다. 그렇게 보건소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중구 보건소에서 벗어났다. 드디어 이 종이를 손에 쥐게됐다는 안도감과 오늘 저녁은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이번주가 지나면 나는 또 콧속 깊은 곳을 면봉으로 해집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종이를 다시 받기 위해 이곳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참, 밥 한번 먹기 힘들다.‘

코로나19 검사결과 보고서 ⓒ투데이신문

그렇게 나는 자그마한 불만을 품은 채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러곤 코로나19 음성 확인 판정서를 잃어버릴새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서울역을 향하는 내내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누군가에겐 고작 종이 한장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마치 금은보화가 들어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 혹여나 실수로 떨어트리진 않았을까 가는 여정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한끼도 먹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해온 탓에 이 종이가 제공하는 저녁이 더욱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주머니를 수시로 확인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 행동은 서울역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저녁이 제공되는 오후 5시까진 꽤 시간이 남았기에 나는 어딘가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갈 곳은 없다. 그냥 거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전과 달라진 점은 주머니에 손을 가만히 꽂은 채 앉아있다는 것이다. 손에 땀이 차도록 나는 주머니에 손을 빼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다소 건방져 보이는 자세였겠지만, 나에겐 밥을 먹기 위한 필사(必死)의 자세였다. 가만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달갑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과 옷, 그리고 꾀죄죄한 옷차림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이젠 익숙했다. 그러나 이런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푸짐한 눈칫밥은 내 주린 배를 채워주진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서울역 지하통로에서 시간을 보냈다 ⓒ투데이신문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하나, 둘 쌓여 온 몸을 짓누르기 시작할 때, 나는 지상에서 지하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나는 지상보다 지하가 익숙한 그런 사람이 됐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와 그늘, 제 갈길 가기 바쁜 사람들. 이곳에서 시간을 또 다시 죽이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노숙인이 한명 보였다. 몸은 꽤나 불편해 보였다. 지팡이에 의지한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저 사람도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온 사람이다. 분명 지하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동정의 눈길도 누군가에겐 실례가 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렇기에 그저 가만히 정면만을 바라봤다. 서서히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지하에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고된 일을 마치고 그들의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5시가 가까워졌다. 나는 걸터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보였다. 그러곤 다시 지하에서 지상으로 향했다. 밥을 먹기 위해선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올라가야한다. 나에겐 선택지가 없다. 별 수 없다. 배고픔 앞에 자존심까지 챙기기엔 사치였다. 

서울역에 위치한 무료급식소 앞에 당당히 줄을 섰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다소 연세가 있어 보였다. 그 사이에 아직 젊은 나는 다소 이질적이었다. 그 탓일까, 무료급식소 직원부터 그 주위를 오고가는 사람들 까지 꼭 나를 한번씩 쳐다보곤 했다. 그러곤 옆사람을 툭툭치며 나를 가르키기도 했다. 난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아닌데, 어느새 그렇게 돼 버렸다. 젊은 내가 무료급식을 얻어먹는 이 슬픈 광경이 그들에겐 그저 신기한 장면이다. 마치 그 줄 속에서 나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무료급식소를 바라보고던 고개를 바로 옆 차도로 틀었다. 차량은 빠르게 스쳐지나가기에 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미처 보지 못할테니 말이다.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노숙인들 ⓒ투데이신문

꽤 오랜시간 차도를 바라봤다. 그러자 서서히 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입장이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나는 무료급식소에서 정식으로 저녁을 얻어먹게 됐다. 직원들은 꽤 많은 노숙인들을 능숙하게 통제했다. 노숙인들도 별다른 소동없이 직원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나 역시 그 통제에 몸을 맡겼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대기장소에는 적막만이 울렸다. 어색할 만큼 조용했다. 이따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가만히 텔레비전을 바라보거나 앞만 바라봤다. 안내원은 대기하고 있는 노숙인들의 숫자를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그러곤 3명씩 나눠 음식 먹는 곳으로 안내했다. 

노숙인 3명이 나가자 직원은 그들이 앉았던 의자에 연신 소독약을 뿌려댔다. 그리곤 의자가 뜯어질 만큼 행주로 벅벅 문질러댔다. 방역을 위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다 나가기도 전에 그렇게 의자를 닦아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마치 나 스스로가 엄청 더러운 물건이 된 듯 했다. 땀을 많이 흘리긴 했어도 그들과 나는 의자를 저렇게 까지 닦을 만큼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 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다른 노숙인 2명과 함께 한 조를 이뤘다. 그러곤 내가 앉았던 자리를 물끄럼히 바라봤다. 예외는 없었다. 직원은 또 내가 앉았던 자리에 수차례 소독약을 뿌려댄 뒤 의자를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음식을 나눠주는 곳으로 다가갔다. 직원들이 앉아있으라는 곳에 앉았다. 따로 배식을 받는 것이 아닌, 자리에 앉아있으면 직원들이 음식이 담긴 식판을 나눠주는 구조다. 이것 역시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함이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책상 마다 세워진 칸막이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곤 식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녁식사로 나온 음식 ⓒ투데이신문

김치, 호박볶음, 김, 쌀밥 가득, 컵라면 하나. 오늘 나의 저녁이다. 하루를 꼬박 굶었기에 이정도도 감사했다. 반찬투정을 하기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음식을 먹는 와중 직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거기 왜 음식을 나눠주세요.“ 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노숙인이 멋쩍게 웃고만 있었다. 다소 당황했는지 얼굴은 서서히 붉어져 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김을 먹지 않는 한 노숙인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노숙인에게 그의 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이를 제지하느라 작은 소동이 벌어 진 듯 했다. “먹기 싫으시면 그냥 버리시면 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라는 말에 노숙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음식을 먹는 소리만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소동이 일단락 되고 나는 다시 내 식판에 고개를 파묻었다. 가만 생각하니 이상하다. 가진게 적은 사람들은 제 몫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 나누려 한다. 첫째날, 나 역시도 내 몫의 음식을 누군가와 나눴고, 김을 나눠 주려던 노숙인도 그의 몫을 나눠주려 했다. 모든 노숙인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내가 봐온 노숙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아는 것을 나누려고 했다. 첫째날 만났던 노숙인 선배도 그랬다. 그가 아는 노하우를 어떻게 해서든 알려주려 했다. 밥지도를 건네준 노숙인도 그간 노력해 만든 그 지도를 나에게 선뜻 공유해 보였다.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가 라는 생각에 다다를 무렵, 식판에 있던 음식은 텅 비워졌고 나는 그렇게 그곳을 벗어났다.

저녁을 해결한 나는 이제 몸이 뉘일 곳을 찾아 나서야했다. 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나는 그렇게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어느때와 다를 바 없이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꿈만 같은 그 곳으로.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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